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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길이 있다
용머리로-쑥고개로
이야기를 품은 고갯길을 만나다
꿈틀거리는 용을 품고 있을 듯한 용머리고개 용머리고개는 그 이름만으로도 꿈틀거리는 푸른 용을 품고 있을 듯하다. 용의 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용머리고개! 이곳은 전주천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가려다 천 일에서 하루가 모자라 땅에 떨어져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강감찬 장군이 전주천을 건너는 초립동을 붙잡고 비를 내리라고 명령하자 초립동이 다시 용으로 변신하여 비를 내렸다는 신비로운 전설도 전해진다. 새해에는 완산칠봉과 다가산 사이에 쭉 뻗은 도로 어딘가에서 그 옛날 용이 다시 날아오를 것만 같다. 훨훨 날개를 펼치는 푸르른 용과 함께 맘껏 새날을 시작해 보자.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쑥고개 용머리고개는 효자동으로, 효천지구로, 김제 금구 방향으로 곧게 이어진다. 그 길은 전주 서부의 중심 도로인 쑥고개로와 만난다. 도심의 개발과 확장에 따라 도로도 넓고 편하게 바뀌었지만, 도로명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친숙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쑥고개는 숙호재, 숙호치라고도 불렸는데 중턱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효자동에서 용복동까지 이어지는 꽤 험난한 고개로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시간이 여유로운 날에는 삼천 마실길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호랑이바위를 찾아 쑥고개를 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국립전주박물관 박물관에서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천천히 옥외 전시를 둘러보고 실내로 들어간다. 1층 선비서예실과 역사실, 2층에 미술공예실과 전주와 조선왕실을 관람하고 나면 점점 더 박물관에 빠져든다. 서예, 금동장식신발, 전 낙수정 동종, 전통 가구 전주장 등 다양한 전시품을 둘러보고 어린이박물관에서 다양한 체험까지 하면 박물관이 더욱더 궁금해진다. 충신 이흥발의 행적을 기리는 정려각 이흥발지려(李興渤之閭) 아픈 역사는 기억되고 알려져야 한다. 이흥발은 정묘호란 이전 해부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나라 걱정을 하였으며,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패하자 관직을 버렸다. 이후 영조 때 그를 기리는 정려각이 천잠산 자락의 이흥발 묘소 아래 세워졌다. 쑥고개로를 지나는 길이라면 한 번쯤 들러서 그 뜻을 되새기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일상 속 여유를 주는 용호근린공원 도심 속 공원은 존재만으로도 일상의 여유를 준다. 전라북도교육청 건너편, 토지주택공사 전북지역본부 뒤쪽에 용호근린공원이 그렇다. 공원 내 용호저수지에 제멋대로 자란 갈대가 도심 속 자연의 여유로움을 더해 준다.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은 언제든 이용 가능한 편안한 산책길로, 인근 직장인들은 잠깐의 휴식처로 공원을 즐겨 보자. 손짓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전주시수어통역센터 전주시수어통역센터는 농인들의 원활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지원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농인들에게 수어 통역 서비스와 수어 교육을 하고 있으며, 매년 수어문화제를 열어 농인에게는 공연 문화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는 청각·언어장애 인식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힘찬 망치질과 담금질로 연장을 만드는 한일민속대장간 용머리고개는 대장간이 많기로 유명했다. 지금도 전통 그대로 화덕에서 시뻘겋게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한일민속대장간이 그곳에 있다. 무형문화재 김한일 야장과 그의 아들이자 전승자 김창호 씨가 함께 지켜 가고 있다. 달구면 달굴수록 강해지는 무쇠 같은 강인함으로 오랫동안 대장간이 이어지길 소망해 본다. 넓고 쾌적한 체육시설 완산수영장 수영장에 들어서자마자 훅 끼치는 수영장 특유의 냄새가 반갑다. 음-파! 음-파! 어디선가 강습받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완산수영장은 레인이 많아서 강습, 자유 수영, 걷기가 모두 가능한 곳이며, 다이빙풀이 있어서 스킨스쿠버와 프리다이빙을 즐길 수 있다. 다자녀가정에는 할인 혜택이 있으니,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방문해 보자.
2023.12.21
#용머리로
#쑥고개로
아름다운 시절
전주 교통의 중심에 있던
용머리고개
옛날 전주천에는 용이 살았단다. 승천하기 위해 천 일간 수행했던 용은 하루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다. 몸은 완산칠봉 계곡에, 한이 남은 머리는 현재 용머리고개에 자리 잡았다. 전주와 부안, 김제를 잇는 고개인 용머리고개는 예로부터 많은 곡물이 유통되던 요충지였다. 자연스럽게 용머리고개에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장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장간과 유기전 등 장인의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던 용머리고개. 시끌벅적하던 고개는 이제 그 활기를 잃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의 곁으로 돌아온 용머리고개에는 대장간과 유기전 대신 숲과 도서관이 생겨났다.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던 용머리는 이제 힐링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간과 함께 활기를 흘려보낸 용머리고개는 고즈넉한 모습으로 주민과 함께하고 있다.
2023.08.24
#용머리고개
#전주역사
#전주기록
뜻밖의 전주
전라감영 뒷길
전주, 빛나는 길
서문을 지나면 새로운 세상길의 시작은 패서문(안내석)이다. 서문은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던 길목. 이몽룡이 어사 되어 내려올 적, 애끓는 춘향을 만나기 위해 허리춤에 마패 숨기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완판본 ) 불원천리 달려갔다. 전주와 완주를 배경으로 한 도 서문에서 시작된다. 이 이야기의 최고(最古)본인 대창서원판 (1919)의 첫 문장이 ‘전주 서문 밖 30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1894년 전주를 기반으로 집강소를 설치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무혈입성했던 곳도 서문부터다. 호남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는 이름에 ‘서문’을 앞세웠다. 일제강점기에 목회자로 일한 김인전(1876~1923)·배은희(1888~1981)·김가전(1892~1951)은 어린이와 여성의 지위를 높였고 교육에 앞장서 민족의식을 드높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보한(1872~1931)과 방애인(1909~1933)은 각각 ‘걸인성자 이거두리’와 ‘거리의 성자’로 불리며 시민의 존경을 받았다. 사람은 가고 흔적은 희미해졌어도 이들이 선사한 감동은 전주 사람들의 정신에 깃들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전주시는 3년 전, 방애인이 시민의 성금을 모아 1932년에 세운 전주고아원이 있던 자리를 ‘전주 최초 고아원 터’로, 이보한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위로하며 함께 걸었을 매곡교와 싸전다리 둑길을 ‘이거두리 이야기길’로 부르며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반듯하고 당당한 이들의 삶은 후세대의 든든한 버팀목이며, 결결이 새겨 놓은 위로이자 가슴 벅찬 자랑이다. 전주 사람이 기억하는 길의 여정이 길을 차이나거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등록문화재 제174호)과 전주화교소학교, 중화요리 ‘진미’ 등이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1908년부터 1931년까지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포목상점은 1920년대 이들이 전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은 단층 건물로 중국 상해의 전통적인 비단 상가 형태를 따랐다. 해방 후 지금의 ‘현대이용원’이 있기까지 수차례 건물의 용도가 바뀌면서 내·외부의 변화가 있었지만, 사인 폴(Sign Pole)이 돌아가는 이 건물 앞에서 ‘비단이 장사 왕서방 (중략)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서도 띵호와’ 하는 (1938·김정구)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본정통(本町通)’의 흔적은 1929년 전주에 처음 생긴 대형 음식점인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등록문화재 제173호)에서 찾아진다. 지금도 ‘우동집이었다’, ‘소바집이었다’, 말이 많지만 그게 무엇이든 면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전주의 일본식 면 요리의 출발지임은 확실하다. 박다옥과 같이 첫 모습 그대로 세월을 머금고 있는 ‘송용진한의원’(1969년)과 ‘이시계점’(1970년)은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돼 훗날 지금의 시대를 또렷하게 말해줄 것이니, ‘송용진한의원이 잘 될 때는 하루 집 한 채 값을 벌었다.’거나 ‘이시계점이 바둑기사 이창호가 태어나고 바둑돌을 처음 잡은 곳’이라는 설명에 후세대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전주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떠올리는 공통의 기억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감성은 여럿이다. △휴전 이후에 이승만이 카퍼레이드하면서 지나갔다. 시민들은 길옆에 쭉 앉아서 손뼉을 쳤다. △1955년 공보관에서 신석정·이철균·백초 시인과 허소라·김해성·채만묵·장태윤 등 전북대 문학동아리 ‘청도’ 동인의 시화가 전시됐다. 대학생들의 최초 시화전이다. △1950·1960년대 자리는 2층 전시실과 3층 공연장인 이었다. 큰 행사를 많이 했고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많았다. 10년 동안 비어 있다가 극장 건물의 천장을 성당처럼 아치로 쌓아서 음식점을 열었다. △전주 최초의 신호등은 도로 광고탑인 미원탑 아래 있었다. △1970년에 전주 최초의 백화점인 풍남백화점이 들어섰다. △1970년대 초반에는 귀금속을 파는 금은방이 스무 곳도 넘었다. △1970년대 은 화가들의 전시회를 많이 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많은 사람이 이 길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80년대는 손목시계와 벽시계 선물이 많았다. 시계를 사러 오고, 고치러 오고, 시계 약도 바꾸러 왔다. △전주여고, 전주여상, 기전여고 등 여학교가 가까워서 여학생이 특히 많았다…. 이 길에 얹힌 이야기 모두가 전주의 귀한 유산이다. 길에 스민 속엣것들을 찾아불과 십수 년 전까지 행인이 차고 넘쳤던 길이었기에 1919년 3월 13일과 14일 ‘전주3·1운동’에 참가한 선인들의 걸음걸음도 이곳에 남아 있다. 용머리고개와 매곡교·서천교를 지나온 시위대는 전주우편국(현 경원동 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그 무리에는 서문교회·천도교 교인들과 신흥학교·기전학교 학생들뿐 아니라 꼬리잡기 놀이를 하듯 이거두리의 뒤를 따르며 만세를 부르던 걸인과 나무꾼, 기생과 소리꾼들도 있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끝까지 평화 시위를 고집한 이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는 건 백성이며, 나라는 죽어도 기어이 살아남은 것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치며 “나라를 빼앗겼는데 어찌 분노하지 않는가? 한 가족, 한 이웃, 한 민족이 모욕을 당했는데 어찌 앉아만 있는가?”라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목이 메게 외쳤을 것이다. 그 절절한 외침으로 전주는 바르게 성장했다. 길의 끝은 팔달로 옛 전주시청(현 기업은행) 앞. 1960~1970년대 시민들의 약속과 만남의 장소였던 ‘미원탑 터’(전주미래유산) 안내판과 그 곁에 서 있는 돌기둥 ― 도로의 기준점인 ‘전라북도 도로원표’다. 돌기둥 옆에 쓰여 있는 ‘서울 272㎞ 평양 525㎞’처럼 전라북도는 여기서부터 모든 길의 거리를 잰다. 이곳에서 길에 담긴 부침의 역사를 느끼며 자기 존재의 기준과 근원이 되는 구심점을 생각하고 더 찬란하게 빛날 생의 지도를 떠올려 볼 일이다. 평범하지만 뚜렷한 빛깔을 지닌 ‘전주, 빛나는 길’. 새로운 것은 곧 낡은 것이 되지만, 오래된 것이 새로울 때 그 가치는 영원하다. 이 길에 자연스레 스민 속엣것들이 그렇다. ‘전주, 빛나는 길’ 함께 걷기 행사 지난 12월 4일(토)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전북예술회관에서 서문교회까지 ‘전주, 빛나는 길’ 함께 걷기 행사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의 이거두리(이제학 분)와 꽃거지(조민지 분), 60·70년대 중국인소학교 교사 이얼싼(이종화 분)과 중국음식점 사장 꿔바로우(이우송 분), 1970·1980년대 시계 수리공인 고장난벽시계(정준모 분)와 양장점 종업원인 양복남(최욱로 분)으로 분한 배우들은 거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달고 야물게 들려줬고, 30여 명의 시민과 관광객은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걸으며 길의 사연들에 물들었다. 글 최기우 | 극작가·최명희문학관 관장 전라북도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희곡집 , , , , 어린이희곡 , 인문서 , , 등을 냈다.
2021.12.22
#전라감영
#서문교회
#차이나거리
#도로원표
전주의 꽃심
“전주 기록물은 전주에 있어야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김세신 어르신이 발로 뛰며 수집한 전주 기록물
한자 공부에서 시작된 기록물 수집 스무 살 무렵,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기 위해 2년간 천자문을 쓰고 익혔어요. 아마도 못다 한 공부의 한을 그렇게 풀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익힌 한자는 후에 기록물 수집을 업으로 삼는 결정적 계기가 됐지요. 한창 돈벌이를 찾던 와중에 눈에 띈 게 고미술품, 고문서를 판매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동서학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당시 서학동, 교동, 완산동 일대에 고문서, 고미술품 가게들이 참 많았거든요. 자연스럽게 다양한 고문서, 고미술품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래된 문서의 가치를 잘 모르니 무게를 재서 그 값을 매기던 시대였어요. 한자 공부를 한 덕에 낡은 문서가 지닌 가치가 보이더군요. 10여 년 전 했던 한자 공부가 큰 자산이 된 셈이죠. 그렇게 오래된 문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강점을 토대로 고미술품도 함께 수집, 판매하는 가게를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항아리, 가구들도 함께 모았는데 모으고, 보관하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고문서와 고미술품 위주로 수집해 왔습니다. 1968년 궁도대회 채점표, 전주시에 기증수집 일을 시작하고 7~8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정보를 알아볼 수도 없던 시대니 무작정 발로 뛰면서 기록물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발로 뛴 덕에 일은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쪽 업계에서 제법 인정도 받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괜찮은 수집물이 있다고 먼저 연락을 주는 이들도 생겼지요. 얼마 전 전주시에 기증한 1968년 전주 청양정에서 열린 궁도대회 채점표인 획기지도 그렇게 얻게 된 것입니다. 17년 전쯤 광주에 사는 지인이 궁도대회 경기 결과를 기록한 획기지가 있는데 전주에서 열린 대회 같다면서 연락이 왔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획기지에는 매회마다 적중된 화살 수와 참가자 전원의 성적이 빠짐없이 기재돼 있었고, 당시로선 찾아보기 힘든 여성 선수에 대한 기록까지 있더군요. 하지만 당시엔 오랜 시간이 지난 기록물이 아니었기에 큰 가치가 있진 않았어요. 그래도 전주에서 열린 대회 기록물이니 그 가치를 떠나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지난해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 소식을 듣고 천양정 궁도대회 획기지를 기증했어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기에 전주시에 기증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히 기증할 기록물인데 상까지 받게 되니 그저 뿌듯할 따름입니다. 평생의 꿈, 내 고장 기록물 연구소오래된 기록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지역입니다. 역사적 사건의 기록물이 아닌 이상 본고장에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지요. 전주의 기록물은 전주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이번에 진옥 주장 술통을 비롯해 1968년 전북대 전주성심외국어학원 학생 모집 요강 전단지, 전주 최씨 족보 등도 모두 전주의 기록물이기에 전주에 있어야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기록물을 모으는 일을 하다 보니, 전주에 관련된 기록물을 참 많이도 모았습니다. 전주 시내 학교 졸업 앨범, 족보, 다양한 책자들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기록물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이에요. 그 바람을 현실화하는 계획도 세웠답니다. 바로 내 고장 기록물 연구소를 여는 겁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후쯤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껏 해온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의미 있는 내 고장 기록물 수집에 정진할 계획입니다. 김세신(71) 어르신은 전주시 완산동 용머리고개에서 ‘국보고미술원’을 4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문서, 고미술품 등 근대 유물을 수집, 판매하고 있다.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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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도
#기록물
#기증
기획 특집
천년의 이야기를 품은 숲, 같이 걸을까요?
전주 마실길
천년의 시간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을 출발해 좁은목약수터 방향으로 걷다 보면 처음 마주하게 되는 길이 억경대에서 만경대 구간이다. 해발 630m 고덕산 초입에서 숲을 오르다 보면 낯선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여름의 숲, 우거진 녹음에 감춰진 흙빛 돌 산성이 이질적이면서도 정겹다. 숲길을 벗어나 남고산성을 걷는다. 돌을 이고 지고,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간절한 무게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붙잡는다.남고산성은 가팔랐으나 단아했고 산세와 어우러져 고즈넉했다. 남고산성은 삼국 통일 이후 남북국시대에 지어진 석축 산성으로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도읍이던 전주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견훤이 쌓았다 한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 부윤을 지낸 이정란이 왜군 방어를 위해 보수한 산성이다. 지키고자 하는 생의 간절함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이 숨겨 놓은 이야기가 장엄하다.천년전주 마실길은 남고산성을 지나 억경대와 만경대로 발걸음을 이끈다. 억경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가빴던 숨을 돌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전주 풍경에 가슴이 벅차다. 고층 빌딩에서 바라본 전주와는 천양지차. 그 풍경에 넋을 잃을 무렵, 문득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바람을 머리에 인 숲이 무겁게 일렁인다. 천길 바위 머리 돌길을 돌고 돌아,나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구월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 만경대를 지나 충경사를 향하면서 만경대 암각서에 새겨진 시구를 읊조린다. 새로운 나라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 포은 정몽주와 태조 이성계 그들에게 길은 우국과 충정이었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였다. 어디 그뿐일까? 관직에서 물러난 64세의 노부인 이정란이 다시 칼을 잡고 적진으로 뛰어든 길 역시 우국과 충정이었고 백성에 대한 애민이었다. 남고산성 숲에는 우국과 충정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천년전주 마실길, 그 숲 곳곳에 역사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싸전다리를 지나 초록바위에서 완산칠봉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마실길이라는 이름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마실길’이란 이웃에 놀러 가는 길을 뜻한다. 사부작사부작 걷는 걸음마다 삼나무 잎사귀나 편백나무 향이 밟힌다. 여름에는 매미 소리와 청량한 숲 내음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겨울에는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로 가득하다. 완산칠봉 오르는 길은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뿐일까? 장군봉 팔각정을 만나고 금송아지 바위의 전설을 듣고, 크고 작은 돌탑과 가람시비를 만난다.천년전주 마실길을 두른 숲은 천년의 삶과 문화와 역사를 안고 있다. 그 숲속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고목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 같다.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억경대-만경대-남고산성-충경사-매화봉-장군봉-완산공원-금송아지바위-용두봉-용머리고개-다가공원-완산교-매곡교-초록바위-남천교-국립무형유산원 기억을 재생하는 숲, 모악산 마실길과 삼천마실길전주 모악산 마실길은 모악산이 품은 길이다. 길은 마을에서 시작해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바람과 나무와 숲을 잇는다. 추동마을 입구에서 시작해서 고개 너머 독배마을까지 이어지는 12.3km의 구간 동안 위뜸에 살았다는 강릉 함씨와 비선골에 살았다는 김해 김씨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굿을 해 주는 무녀 쟁인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험한 산이 아닌 고즈넉한 평야의 숲길이 마을과 마을이 지닌 이야기를 품고, 뒤 숲이 지닌 이야기와 앞 숲이 품은 이야기로 마을 지도를 만든다. 천년전주 마실길의 숲이 삶과 역사를 품은 숲이라면 모악산 마실길의 숲은 옛 풍경과 잊힌 기억을 재생하는 숲이다.가래나뭇골(추동마을)을 지나고 원당마을을 지나 시앙골을 넘고 학이 날아든다는 학전마을을 지나 만나게 되는 노송 군락지는 곧게 뻗은 노송들이 푸른 하늘을 이고 우뚝 서 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숲이 아니라 하늘 향해 곧게 뻗은 노송들이 장엄한 분위기를 내뿜는 숲이다. 마치 마을과 마을을 지키고 사람과 사람을 지키는 장승처럼 우람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삼천 마실길은 마을과 역사를 잇는 길이다. 옛 전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 길이라고 할 수 있다.탐진 안씨의 집성촌인 능안마을에서는 탐진 안씨들이 대대로 마을을 지켜 온 흔적을 엿볼 수 있고, 능안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찾을 수 있다. 소란소란 걷다 만나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에도 한번 들러 보자. 탐진 안씨가 지킨 마을 이야기와 더불어 전주의 옛이야기에 빠져보는 즐거운 기회가 될 것이다. 모악산 마실길추동마을-원당마을-학전마을-완산생활체육공원-노송 군락지-신금마을-화정마을-봉암마을-독배마을-독배고갯마루
2020.09.11
#마실
#모악산
#충경사
#정몽주
#만경대
멋진 하루
달하, 전주에서 정읍까지 비취오시라!
조선왕조실록과 정읍 선비‘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이름 붙은 객사와 경기전이 없었다면, 전주는 돈냥이나 좀 있는 그저 그런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좌우익 양 날개를 거느린 객사는 우람하고 부성의 맨 오른쪽에 자리한 경기전은 섬세하다. ‘전주 이씨’ 나랏님의 국성(國姓)이 태어난, 경사스러운 터이기에 경기전(慶基殿)이라 했다. 성전이나 궁전 등, 하느님이나 임금이 계신 곳에만 ‘전’을 붙인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 즉 임금의 초상화는 임금이니, ‘전’이다. 거기에다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자리한다. 조선왕조실록 말씀이다.임진년에 왜병이 쳐들어온다. 높은 양반들 먼저 피난하신다. 경기전을 지키던 9급 참봉 오희길과 유신은 실록과 어진을 지킨다. 공무원의 롤모델이다. 재난 대비 매뉴얼에 따라 태인의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게 토스한다. 두 분 다 정읍의 선비들이다. 폭서와 장마가 있었지만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정읍 내장산에서 1년 하고도 18일을 지켜 내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어지게 하니 그 아니 특별한가. 수레는 몇 대였을까? 과연 정읍으로 가는 길에 원평과 태인을 거쳤을까? 아니면 저쪽 구이를 돌아 산외 길을 택하였을까? 정읍의 두 선비는 자비로 말과 양식을 대며 보물을 지켜 냈다. 내장산의 용굴 은봉암이나 비래암에 몰래 모셨는데 첩자가 정보를 팔아먹지는 않았을까? 이 이야기는 왜 아직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였을까? 동학농민혁명과 경기전400년 후,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을 깬다. 올해 처음 제정된 국가기념일 5월 11일이 바로 그날이다. 장성 황룡강전투마저 승리한 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전봉준은 풍남문에 올라 전주부성을 조망한 뒤, 관찰사 집무실 선화당을 집강소로 사용한다. 열 받은 초토사가 관군을 이끌고 용머리고개에서 부성 안쪽으로 대포를 날린다. 정읍 가는 직행버스 간이 정류장에서 보이는 위쪽 언덕에서 말이다. 이런 이런, 경기전 경내까지 포탄이 날아든다. 전북 사람이면 이렇게 못 한다. 경기전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자 전봉준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편지를 쓴다.“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공북문을 열고 동학군이 부성을 빠져나간 후 120년, 지금 전라감영 복원이 한창이다. 새로 짓는 선화당은 시민들이 직접 활용하는 공간이면 좋겠다. 게서 전주대사습이 열려도 좋겠다. 정읍과 전주, 제대로 즐기기전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오셨다면, 일단 한옥마을이다.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이성계가 풍년가를 읊은 오목대에 서면 한옥마을의 기와지붕이 주욱 늘어섬을 볼 수 있다. 어두울 것 같은데 오묘한 밝음이 있다. 경기전에서 푸른 곤룡포 입으신 이태조를 알현한 다음에는 서쪽에 있는 최명희문학관에 들르시라. 전주의 얼인 ‘꽃심’을 써 내려간 혼불의 한 자락을 붙들 수 있을 터. 경기전과 전동성당의 고딕양식과의 대조에 홀딱 반한 이분들 모시고 내처 향교로 간다. 은행나무 시즌이면 더 좋다. 향교 가는 길에 영화 에 등장한 한옥 학인당을 들르는 것은 필수. 한옥에서 한잠 주무신 후에는 정읍으로 길을 잡는다.‘새 시상’이 오길 바라던 드라마 의 촬영지 ‘정읍 김씨집’을 찾아가는 길은 산외 방면 길이 좋다. 세트 아닌 진땡이다. 여기서 이참에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무성서원’까지 자동차로 15분이면 족하다. 서원의 태극 문양은 사진발을 잘 받게 만든다.내장산 가는 길 전봉준공원에 서면 18.94m의 동학100주년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내장산은 사람 사는 동네에 이렇게 가까운 국립공원은 세계에 드물다. 설악의 단풍보다 보름은 늦게 찾아온다. 해서 정읍의 가을은 길고 아름답다.한겨울 눈이 올 때 내장산을 찾는 사람은 고수다. 깎아지른 듯한 은적암 가는 길을 ‘실록길’이라 한다. 그냥 차 타고 왔던 길로 훅 돌아가면 바보다. 정읍경찰서 앞에서 쌍화탕을 마셔야 한다. 중스푼으로 쌍화차 안에 든 밤을 건져먹는 맛을 정읍 바깥에서는 흉내도 못 낸다. 한 끼 자신 듯 든든하다.이제 포털에 접근하면 왕조실록은 누구나 키워드별로 검색이 가능하다. 정읍 선비가 없었다면 조선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을 것이다. 달님이 노피곰 도다샤 전주와 정읍을 서로 비추인다. 그 손길이 앞으로 남원에서 고창에서도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글 신귀백 | 영화평론가신귀백 씨는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이다. 장편다큐 감독으로, 전북독립영화제・무주산골영화제・전북비평포럼에서 활동했다. 저서로 , 가 있다.
20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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