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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길이 있다
용머리로-쑥고개로
이야기를 품은 고갯길을 만나다
꿈틀거리는 용을 품고 있을 듯한 용머리고개 용머리고개는 그 이름만으로도 꿈틀거리는 푸른 용을 품고 있을 듯하다. 용의 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용머리고개! 이곳은 전주천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가려다 천 일에서 하루가 모자라 땅에 떨어져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강감찬 장군이 전주천을 건너는 초립동을 붙잡고 비를 내리라고 명령하자 초립동이 다시 용으로 변신하여 비를 내렸다는 신비로운 전설도 전해진다. 새해에는 완산칠봉과 다가산 사이에 쭉 뻗은 도로 어딘가에서 그 옛날 용이 다시 날아오를 것만 같다. 훨훨 날개를 펼치는 푸르른 용과 함께 맘껏 새날을 시작해 보자.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쑥고개 용머리고개는 효자동으로, 효천지구로, 김제 금구 방향으로 곧게 이어진다. 그 길은 전주 서부의 중심 도로인 쑥고개로와 만난다. 도심의 개발과 확장에 따라 도로도 넓고 편하게 바뀌었지만, 도로명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친숙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쑥고개는 숙호재, 숙호치라고도 불렸는데 중턱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효자동에서 용복동까지 이어지는 꽤 험난한 고개로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시간이 여유로운 날에는 삼천 마실길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호랑이바위를 찾아 쑥고개를 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국립전주박물관 박물관에서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천천히 옥외 전시를 둘러보고 실내로 들어간다. 1층 선비서예실과 역사실, 2층에 미술공예실과 전주와 조선왕실을 관람하고 나면 점점 더 박물관에 빠져든다. 서예, 금동장식신발, 전 낙수정 동종, 전통 가구 전주장 등 다양한 전시품을 둘러보고 어린이박물관에서 다양한 체험까지 하면 박물관이 더욱더 궁금해진다. 충신 이흥발의 행적을 기리는 정려각 이흥발지려(李興渤之閭) 아픈 역사는 기억되고 알려져야 한다. 이흥발은 정묘호란 이전 해부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나라 걱정을 하였으며,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패하자 관직을 버렸다. 이후 영조 때 그를 기리는 정려각이 천잠산 자락의 이흥발 묘소 아래 세워졌다. 쑥고개로를 지나는 길이라면 한 번쯤 들러서 그 뜻을 되새기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일상 속 여유를 주는 용호근린공원 도심 속 공원은 존재만으로도 일상의 여유를 준다. 전라북도교육청 건너편, 토지주택공사 전북지역본부 뒤쪽에 용호근린공원이 그렇다. 공원 내 용호저수지에 제멋대로 자란 갈대가 도심 속 자연의 여유로움을 더해 준다.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은 언제든 이용 가능한 편안한 산책길로, 인근 직장인들은 잠깐의 휴식처로 공원을 즐겨 보자. 손짓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전주시수어통역센터 전주시수어통역센터는 농인들의 원활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지원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농인들에게 수어 통역 서비스와 수어 교육을 하고 있으며, 매년 수어문화제를 열어 농인에게는 공연 문화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는 청각·언어장애 인식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힘찬 망치질과 담금질로 연장을 만드는 한일민속대장간 용머리고개는 대장간이 많기로 유명했다. 지금도 전통 그대로 화덕에서 시뻘겋게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한일민속대장간이 그곳에 있다. 무형문화재 김한일 야장과 그의 아들이자 전승자 김창호 씨가 함께 지켜 가고 있다. 달구면 달굴수록 강해지는 무쇠 같은 강인함으로 오랫동안 대장간이 이어지길 소망해 본다. 넓고 쾌적한 체육시설 완산수영장 수영장에 들어서자마자 훅 끼치는 수영장 특유의 냄새가 반갑다. 음-파! 음-파! 어디선가 강습받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완산수영장은 레인이 많아서 강습, 자유 수영, 걷기가 모두 가능한 곳이며, 다이빙풀이 있어서 스킨스쿠버와 프리다이빙을 즐길 수 있다. 다자녀가정에는 할인 혜택이 있으니,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방문해 보자.
2023.12.21
#용머리로
#쑥고개로
아름다운 시절
전주 교통의 중심에 있던
용머리고개
옛날 전주천에는 용이 살았단다. 승천하기 위해 천 일간 수행했던 용은 하루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다. 몸은 완산칠봉 계곡에, 한이 남은 머리는 현재 용머리고개에 자리 잡았다. 전주와 부안, 김제를 잇는 고개인 용머리고개는 예로부터 많은 곡물이 유통되던 요충지였다. 자연스럽게 용머리고개에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장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장간과 유기전 등 장인의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던 용머리고개. 시끌벅적하던 고개는 이제 그 활기를 잃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의 곁으로 돌아온 용머리고개에는 대장간과 유기전 대신 숲과 도서관이 생겨났다.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던 용머리는 이제 힐링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간과 함께 활기를 흘려보낸 용머리고개는 고즈넉한 모습으로 주민과 함께하고 있다.
2023.08.24
#용머리고개
#전주역사
#전주기록
뜻밖의 전주
전라감영 뒷길
전주, 빛나는 길
서문을 지나면 새로운 세상길의 시작은 패서문(안내석)이다. 서문은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던 길목. 이몽룡이 어사 되어 내려올 적, 애끓는 춘향을 만나기 위해 허리춤에 마패 숨기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완판본 ) 불원천리 달려갔다. 전주와 완주를 배경으로 한 도 서문에서 시작된다. 이 이야기의 최고(最古)본인 대창서원판 (1919)의 첫 문장이 ‘전주 서문 밖 30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1894년 전주를 기반으로 집강소를 설치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무혈입성했던 곳도 서문부터다. 호남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는 이름에 ‘서문’을 앞세웠다. 일제강점기에 목회자로 일한 김인전(1876~1923)·배은희(1888~1981)·김가전(1892~1951)은 어린이와 여성의 지위를 높였고 교육에 앞장서 민족의식을 드높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보한(1872~1931)과 방애인(1909~1933)은 각각 ‘걸인성자 이거두리’와 ‘거리의 성자’로 불리며 시민의 존경을 받았다. 사람은 가고 흔적은 희미해졌어도 이들이 선사한 감동은 전주 사람들의 정신에 깃들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전주시는 3년 전, 방애인이 시민의 성금을 모아 1932년에 세운 전주고아원이 있던 자리를 ‘전주 최초 고아원 터’로, 이보한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위로하며 함께 걸었을 매곡교와 싸전다리 둑길을 ‘이거두리 이야기길’로 부르며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반듯하고 당당한 이들의 삶은 후세대의 든든한 버팀목이며, 결결이 새겨 놓은 위로이자 가슴 벅찬 자랑이다. 전주 사람이 기억하는 길의 여정이 길을 차이나거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등록문화재 제174호)과 전주화교소학교, 중화요리 ‘진미’ 등이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1908년부터 1931년까지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포목상점은 1920년대 이들이 전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은 단층 건물로 중국 상해의 전통적인 비단 상가 형태를 따랐다. 해방 후 지금의 ‘현대이용원’이 있기까지 수차례 건물의 용도가 바뀌면서 내·외부의 변화가 있었지만, 사인 폴(Sign Pole)이 돌아가는 이 건물 앞에서 ‘비단이 장사 왕서방 (중략)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서도 띵호와’ 하는 (1938·김정구)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본정통(本町通)’의 흔적은 1929년 전주에 처음 생긴 대형 음식점인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등록문화재 제173호)에서 찾아진다. 지금도 ‘우동집이었다’, ‘소바집이었다’, 말이 많지만 그게 무엇이든 면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전주의 일본식 면 요리의 출발지임은 확실하다. 박다옥과 같이 첫 모습 그대로 세월을 머금고 있는 ‘송용진한의원’(1969년)과 ‘이시계점’(1970년)은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돼 훗날 지금의 시대를 또렷하게 말해줄 것이니, ‘송용진한의원이 잘 될 때는 하루 집 한 채 값을 벌었다.’거나 ‘이시계점이 바둑기사 이창호가 태어나고 바둑돌을 처음 잡은 곳’이라는 설명에 후세대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전주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떠올리는 공통의 기억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감성은 여럿이다. △휴전 이후에 이승만이 카퍼레이드하면서 지나갔다. 시민들은 길옆에 쭉 앉아서 손뼉을 쳤다. △1955년 공보관에서 신석정·이철균·백초 시인과 허소라·김해성·채만묵·장태윤 등 전북대 문학동아리 ‘청도’ 동인의 시화가 전시됐다. 대학생들의 최초 시화전이다. △1950·1960년대 자리는 2층 전시실과 3층 공연장인 이었다. 큰 행사를 많이 했고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많았다. 10년 동안 비어 있다가 극장 건물의 천장을 성당처럼 아치로 쌓아서 음식점을 열었다. △전주 최초의 신호등은 도로 광고탑인 미원탑 아래 있었다. △1970년에 전주 최초의 백화점인 풍남백화점이 들어섰다. △1970년대 초반에는 귀금속을 파는 금은방이 스무 곳도 넘었다. △1970년대 은 화가들의 전시회를 많이 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많은 사람이 이 길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80년대는 손목시계와 벽시계 선물이 많았다. 시계를 사러 오고, 고치러 오고, 시계 약도 바꾸러 왔다. △전주여고, 전주여상, 기전여고 등 여학교가 가까워서 여학생이 특히 많았다…. 이 길에 얹힌 이야기 모두가 전주의 귀한 유산이다. 길에 스민 속엣것들을 찾아불과 십수 년 전까지 행인이 차고 넘쳤던 길이었기에 1919년 3월 13일과 14일 ‘전주3·1운동’에 참가한 선인들의 걸음걸음도 이곳에 남아 있다. 용머리고개와 매곡교·서천교를 지나온 시위대는 전주우편국(현 경원동 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그 무리에는 서문교회·천도교 교인들과 신흥학교·기전학교 학생들뿐 아니라 꼬리잡기 놀이를 하듯 이거두리의 뒤를 따르며 만세를 부르던 걸인과 나무꾼, 기생과 소리꾼들도 있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끝까지 평화 시위를 고집한 이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는 건 백성이며, 나라는 죽어도 기어이 살아남은 것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치며 “나라를 빼앗겼는데 어찌 분노하지 않는가? 한 가족, 한 이웃, 한 민족이 모욕을 당했는데 어찌 앉아만 있는가?”라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목이 메게 외쳤을 것이다. 그 절절한 외침으로 전주는 바르게 성장했다. 길의 끝은 팔달로 옛 전주시청(현 기업은행) 앞. 1960~1970년대 시민들의 약속과 만남의 장소였던 ‘미원탑 터’(전주미래유산) 안내판과 그 곁에 서 있는 돌기둥 ― 도로의 기준점인 ‘전라북도 도로원표’다. 돌기둥 옆에 쓰여 있는 ‘서울 272㎞ 평양 525㎞’처럼 전라북도는 여기서부터 모든 길의 거리를 잰다. 이곳에서 길에 담긴 부침의 역사를 느끼며 자기 존재의 기준과 근원이 되는 구심점을 생각하고 더 찬란하게 빛날 생의 지도를 떠올려 볼 일이다. 평범하지만 뚜렷한 빛깔을 지닌 ‘전주, 빛나는 길’. 새로운 것은 곧 낡은 것이 되지만, 오래된 것이 새로울 때 그 가치는 영원하다. 이 길에 자연스레 스민 속엣것들이 그렇다. ‘전주, 빛나는 길’ 함께 걷기 행사 지난 12월 4일(토)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전북예술회관에서 서문교회까지 ‘전주, 빛나는 길’ 함께 걷기 행사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의 이거두리(이제학 분)와 꽃거지(조민지 분), 60·70년대 중국인소학교 교사 이얼싼(이종화 분)과 중국음식점 사장 꿔바로우(이우송 분), 1970·1980년대 시계 수리공인 고장난벽시계(정준모 분)와 양장점 종업원인 양복남(최욱로 분)으로 분한 배우들은 거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달고 야물게 들려줬고, 30여 명의 시민과 관광객은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걸으며 길의 사연들에 물들었다. 글 최기우 | 극작가·최명희문학관 관장 전라북도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희곡집 , , , , 어린이희곡 , 인문서 , , 등을 냈다.
2021.12.22
#전라감영
#서문교회
#차이나거리
#도로원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