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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주
싸전다리와 매곡교
어제와 오늘, 시민의 삶이 이곳에서 교차하다
그림. 정인수 전주천 제일의 다리, 새벽 시장으로 이어져남부시장에서 전주천을 건너 초록바위 옆을 지나 남원과 순창으로 이어지는 큰 다리, 싸전다리. 이 다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싸전(쌀가게)들이 밀집해 있던 곳에 위치한 다리다. 전통적으로 전주는 곡창지대이자 호남 지방의 수부(首府)로, 쌀을 사고파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이곳에서 남부시장으로 오가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싸전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전라북도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인 전주교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 다리는 튼튼한 구조 덕분에 1936년 대홍수 때에도 유실되지 않은 유일한 다리였다. 현재의 다리는 1965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도 노인들이 즐겨 찾던 쉼터였다. 해방 이후에도 호남 제일의 시장인 남부시장과 함께하며, 시민들은 싸전다리를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여러 다리들 중 단연 으뜸으로 여겼다. 싸전다리 아래 전주천 변에는 쌀, 담배, 담뱃대, 나무 땔감, 우시장 등 온갖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손님으로 북적였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도 이어져, 매일 새벽 4시부터 오전 11시까지 초록바위 아래 싸전다리와 매곡교 사이 천변에서 남부시장 새벽 시장이 열린다. 특히, 남부시장이 관광 시장으로 유명해진 요즘, 이곳에서 옛 장터의 정취와 시민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 더욱 가치가 크다.1958년 전주사범학교 10회 졸업앨범에 실린 매곡교(위)와 완산교(아래)ⓒ전주시민기록관 제공가난한 이들을 품었던 이거두리 선생을 기억하며싸전다리에서 완산동 방향으로 전주천 하류에 위치한 매곡교 또한 전주의 역사와 함께해 온 다리다. 오래전부터 이곳은 남부시장과 완산동, 전북 서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매곡교 일대는 과거 판잣집이 늘어서 있었으며, 담배 가게, 종이방, 주점, 국숫집, 수제빗집, 옷가게, 기름집, 개고깃집 등이 밀집해 있었다. 당시의 매곡교는 지금처럼 널찍하지 않아 사람들이 서로 비켜 가며 걸어야 했지만, 그만큼 정이 넘쳤다. 이 온정의 중심에는 이거두리 선생이 있었다.전주 서문교회 신도였던 이거두리 선생(본명 이보한, 1872~1932)은 이 매곡교와 싸전다리 주변에서 한평생 가난한 자들을 돌본 인물이었다. 그는 전주와 인근 걸인들과 함께 3·1운동과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조문을 위해 모인 사람들로 전주 신작로가 가득 메워졌으며, 만장 행렬이 10리에 이를 정도였다. 싸전다리와 매곡교, 그리고 이거두리 선생의 이야기는 전주 미래유산 43호로 지정되어 그 뜻이 이어지고 있다.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시간이 흐르면서 매곡교와 싸전다리 주변은 정비되고 재개발되면서 옛 모습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싸전다리를 건너던 장사꾼과 매곡교를 오가던 시민들의 발걸음은 이제 한옥마을과 완산꽃동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고 있다. 싸전다리와 매곡교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다. 이곳은 호남 제일의 시장이었던 남부시장의 영화와 전주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마다 지난날의 흔적이 스며 있으며, 다리 아래 흐르는 전주천은 전주의 역사와 함께 쉼 없이 흘러간다. 오늘도 이곳을 찾는 이들은 과거와 현재가 맞닿은 다리를 건너며,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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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전주
전라감영 뒷길
전주, 빛나는 길
서문을 지나면 새로운 세상길의 시작은 패서문(안내석)이다. 서문은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던 길목. 이몽룡이 어사 되어 내려올 적, 애끓는 춘향을 만나기 위해 허리춤에 마패 숨기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완판본 ) 불원천리 달려갔다. 전주와 완주를 배경으로 한 도 서문에서 시작된다. 이 이야기의 최고(最古)본인 대창서원판 (1919)의 첫 문장이 ‘전주 서문 밖 30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1894년 전주를 기반으로 집강소를 설치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무혈입성했던 곳도 서문부터다. 호남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는 이름에 ‘서문’을 앞세웠다. 일제강점기에 목회자로 일한 김인전(1876~1923)·배은희(1888~1981)·김가전(1892~1951)은 어린이와 여성의 지위를 높였고 교육에 앞장서 민족의식을 드높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보한(1872~1931)과 방애인(1909~1933)은 각각 ‘걸인성자 이거두리’와 ‘거리의 성자’로 불리며 시민의 존경을 받았다. 사람은 가고 흔적은 희미해졌어도 이들이 선사한 감동은 전주 사람들의 정신에 깃들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전주시는 3년 전, 방애인이 시민의 성금을 모아 1932년에 세운 전주고아원이 있던 자리를 ‘전주 최초 고아원 터’로, 이보한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위로하며 함께 걸었을 매곡교와 싸전다리 둑길을 ‘이거두리 이야기길’로 부르며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반듯하고 당당한 이들의 삶은 후세대의 든든한 버팀목이며, 결결이 새겨 놓은 위로이자 가슴 벅찬 자랑이다. 전주 사람이 기억하는 길의 여정이 길을 차이나거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등록문화재 제174호)과 전주화교소학교, 중화요리 ‘진미’ 등이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1908년부터 1931년까지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포목상점은 1920년대 이들이 전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은 단층 건물로 중국 상해의 전통적인 비단 상가 형태를 따랐다. 해방 후 지금의 ‘현대이용원’이 있기까지 수차례 건물의 용도가 바뀌면서 내·외부의 변화가 있었지만, 사인 폴(Sign Pole)이 돌아가는 이 건물 앞에서 ‘비단이 장사 왕서방 (중략)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서도 띵호와’ 하는 (1938·김정구)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본정통(本町通)’의 흔적은 1929년 전주에 처음 생긴 대형 음식점인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등록문화재 제173호)에서 찾아진다. 지금도 ‘우동집이었다’, ‘소바집이었다’, 말이 많지만 그게 무엇이든 면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전주의 일본식 면 요리의 출발지임은 확실하다. 박다옥과 같이 첫 모습 그대로 세월을 머금고 있는 ‘송용진한의원’(1969년)과 ‘이시계점’(1970년)은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돼 훗날 지금의 시대를 또렷하게 말해줄 것이니, ‘송용진한의원이 잘 될 때는 하루 집 한 채 값을 벌었다.’거나 ‘이시계점이 바둑기사 이창호가 태어나고 바둑돌을 처음 잡은 곳’이라는 설명에 후세대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전주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떠올리는 공통의 기억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감성은 여럿이다. △휴전 이후에 이승만이 카퍼레이드하면서 지나갔다. 시민들은 길옆에 쭉 앉아서 손뼉을 쳤다. △1955년 공보관에서 신석정·이철균·백초 시인과 허소라·김해성·채만묵·장태윤 등 전북대 문학동아리 ‘청도’ 동인의 시화가 전시됐다. 대학생들의 최초 시화전이다. △1950·1960년대 자리는 2층 전시실과 3층 공연장인 이었다. 큰 행사를 많이 했고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많았다. 10년 동안 비어 있다가 극장 건물의 천장을 성당처럼 아치로 쌓아서 음식점을 열었다. △전주 최초의 신호등은 도로 광고탑인 미원탑 아래 있었다. △1970년에 전주 최초의 백화점인 풍남백화점이 들어섰다. △1970년대 초반에는 귀금속을 파는 금은방이 스무 곳도 넘었다. △1970년대 은 화가들의 전시회를 많이 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많은 사람이 이 길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80년대는 손목시계와 벽시계 선물이 많았다. 시계를 사러 오고, 고치러 오고, 시계 약도 바꾸러 왔다. △전주여고, 전주여상, 기전여고 등 여학교가 가까워서 여학생이 특히 많았다…. 이 길에 얹힌 이야기 모두가 전주의 귀한 유산이다. 길에 스민 속엣것들을 찾아불과 십수 년 전까지 행인이 차고 넘쳤던 길이었기에 1919년 3월 13일과 14일 ‘전주3·1운동’에 참가한 선인들의 걸음걸음도 이곳에 남아 있다. 용머리고개와 매곡교·서천교를 지나온 시위대는 전주우편국(현 경원동 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그 무리에는 서문교회·천도교 교인들과 신흥학교·기전학교 학생들뿐 아니라 꼬리잡기 놀이를 하듯 이거두리의 뒤를 따르며 만세를 부르던 걸인과 나무꾼, 기생과 소리꾼들도 있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끝까지 평화 시위를 고집한 이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는 건 백성이며, 나라는 죽어도 기어이 살아남은 것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치며 “나라를 빼앗겼는데 어찌 분노하지 않는가? 한 가족, 한 이웃, 한 민족이 모욕을 당했는데 어찌 앉아만 있는가?”라고 시위에 동참할 것을 목이 메게 외쳤을 것이다. 그 절절한 외침으로 전주는 바르게 성장했다. 길의 끝은 팔달로 옛 전주시청(현 기업은행) 앞. 1960~1970년대 시민들의 약속과 만남의 장소였던 ‘미원탑 터’(전주미래유산) 안내판과 그 곁에 서 있는 돌기둥 ― 도로의 기준점인 ‘전라북도 도로원표’다. 돌기둥 옆에 쓰여 있는 ‘서울 272㎞ 평양 525㎞’처럼 전라북도는 여기서부터 모든 길의 거리를 잰다. 이곳에서 길에 담긴 부침의 역사를 느끼며 자기 존재의 기준과 근원이 되는 구심점을 생각하고 더 찬란하게 빛날 생의 지도를 떠올려 볼 일이다. 평범하지만 뚜렷한 빛깔을 지닌 ‘전주, 빛나는 길’. 새로운 것은 곧 낡은 것이 되지만, 오래된 것이 새로울 때 그 가치는 영원하다. 이 길에 자연스레 스민 속엣것들이 그렇다. ‘전주, 빛나는 길’ 함께 걷기 행사 지난 12월 4일(토)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전북예술회관에서 서문교회까지 ‘전주, 빛나는 길’ 함께 걷기 행사가 열렸다. 일제강점기의 이거두리(이제학 분)와 꽃거지(조민지 분), 60·70년대 중국인소학교 교사 이얼싼(이종화 분)과 중국음식점 사장 꿔바로우(이우송 분), 1970·1980년대 시계 수리공인 고장난벽시계(정준모 분)와 양장점 종업원인 양복남(최욱로 분)으로 분한 배우들은 거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달고 야물게 들려줬고, 30여 명의 시민과 관광객은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걸으며 길의 사연들에 물들었다. 글 최기우 | 극작가·최명희문학관 관장 전라북도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희곡집 , , , , 어린이희곡 , 인문서 , , 등을 냈다.
2021.12.22
#전라감영
#서문교회
#차이나거리
#도로원표
기획 특집
2021 전주시정 운영 방향
더 전주다운 상상력으로, 세계여행도시
여행자광장에서 조선팝을 부르자세계여행도시2020년, 국가 대표 관광거점도시로 선정된 전주는, 전주의 운명을 바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먼저, 가장 전주다운 문화를 기반으로 세계여행도시를 준비한다. 조선의 힙합으로 세계를 매료시킨 ‘이날치’처럼 소리의 고장 전주가 가진 인적·물적 자원에 조선팝을 결합해 새로운 콘텐츠로 세계를 사로잡을 계획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팝 성지 프로젝트’다. 한국 문화 콘텐츠에 열광하는 해외 팬들의 관심이 잠재 관광 수요로 나타나는 만큼 지속적이고 다양한 조선팝 공연과 온라인 콘서트 공개를 통해 ‘조선팝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선점하고, 글로벌 공연 콘텐츠로 육성할 계획이다. 이러한 각오 아래 지난 11월 전라감영 조선팝 콘서트를 시작으로 조선팝 뮤지션과 함께하는 다양한 공연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다.조선팝 프로젝트가 전주에 새로운 타이틀을 안겨줄 사업이라면, 한옥마을 리브랜딩과 외연 확대는 세계여행도시 전주의 명성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 줄 사업이다. 가장 먼저, 전주는 국제 수준의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관광 외연을 확대할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진행한다. 한옥마을 인근 싸전다리에서 매곡교 사이 뚝방길 노점상을 정비해 볼거리 넘치는 ‘여행자광장’을 조성한다. 뚝방길 노점상을 시장 내 빈 점포로 이동시키고, 그 자리에 시민과 여행자들이 모여 전주의 문화와 생태를 즐길 수 있는 광장으로 바꿔 갈 계획이다. 또, 서학동 예술마을 초입에 ‘예술 거리’를 꾸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 계획이다. 외국인 특화 관광 허브도 조성된다. 한옥마을과 전주 도심 관광의 허브 역할을 하는 종합관광안내소인 ‘글로벌 웰컴센터’가 건립된다. 전통 한옥 형태로 건립될 이 센터는 관광객 휴게 공간, 스마트관광 VR(가상현실)체험 공간, 홍보 공간, 야외 전망대로 구성된다.독립영화 특화도시 조성을 위한 ‘독립영화의 집’이 구도심 한복판인 옥토주차장에 세워진다. 이곳에서는 영화제뿐 아니라 영화산업 시설들도 함께 들어온다. 또, 충무시설 방공호인 완산칠봉 벙커에는 미디어 아트 등 실험적인 문화예술 콘텐츠를 도입해 전주의 새로운 문화·관광 거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또, 국내 최초 관광 트램 도입을 본격 준비한다. 트램은 관광거점도시 전주의 상징적인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주시는 이처럼 다양한 변화를 바탕으로 체류형 세계여행도시로 도약하려 한다. 여행객이 잠깐 왔다 가는 곳이 아닌, 오래도록 머물며 곳곳을 여행하는 도시로 말이다. 고정관념을 깬 도서관에서 놀자 책 중심 도시 전주에서 도서관은 단지 책을 읽고 빌리는 공간이 아니다. 틀을 깨는 시도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시민 삶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다. 가장 먼저, 새해 전주는 특별한 도서관으로 시민의 삶을 바꾸는 책 중심 도시를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중이다.새해 책 중심도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지난해 개관한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그리고 평화동 야호 책 놀이터, 전주시청 책기둥도서관을 통해 도서관이 얼마나 시민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전주시는 새해에도 시민의 삶을 인문으로 떠받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특별한 책 놀이터를 전주 곳곳에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시립도서관, 평화도서관, 삼천도서관에 이어 아이들을 위한 책 놀이터가 시립도서관 전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지역별 특색에 맞춘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도서관도 들어선다. 아중호수 주변에는 전주를 대표하는 정원과 함께 아중호수도서관, 평화동 학산 숲속에는 시집도서관, 서학동 예술마을에는 예술전문도서관, 완산도서관은 리모델링을 통해 시민과 작가가 함께 쓰고 읽고 만드는 ‘책 쓰는 도서관, 책 만드는 도서관’으로 재탄생한다. 이곳은 책으로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서, 시민들을 위한 창작 콘텐츠 플랫폼이자 지식 생산소 역할을 하게 된다. 전주시자원봉사센터에는 나눔과 공유, 상생을 기본 주제로 자원봉사센터 특화 도서관을 조성한다. 고정관념을 깬 다양한 도서관은 방문객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이 될 것이다. 시민들은 이렇듯 창의적이고 특화된 도서관들을 자양분 삼아 책과 함께 성장하게 된다.그리고 새해 전주는 전주 관광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꾸는 ‘도서관 여행 도시’를 만들어 여행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헌책방 마을로 유명한 영국의 ‘책 마을 헤이온와이’처럼 말이다.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도서관 투어를 하는 등 인문의 힘과 관광을 연결해 전주만의 핵심사업으로 추진해 갈 계획이다. 책 중심 도시 전주가 시민과 여행자들이 모두 즐거운 ‘도서관 여행도시, 전주’로 거듭날 날을 기대해 본다.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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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꽃심
“사라져 버린 곳들도 사진 속에는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영무 어르신이 추억하는 1970년대 전주의 풍경들
20대 시절, 걸으면서 만난 1970년대의 전주 제 나이 스물다섯 살에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전주신학원에 입학했어요. 제가 1946년생이니 1970년도였지요. 그 당시 전주신학원이 신흥고등학교 정문 맞은편 언덕에 있었습니다. 왼쪽에 신일아파트가, 오른쪽에 예수병원이 있었고, 지금의 엠마오사랑병원 자리에 예수병원이 있었지요. 제가 남원 출신이에요. 그래서 전주신학원에 다닐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전주를 참 많이 걸어 다녔지요. 그때 본 전주 풍경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가장 즐겨 찾던 곳이 다가공원이에요. 신학원 바로 건너편에 있어서 틈날 때마다 산책하러 갔었지요. 다가공원은 지금도 가끔 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일요일이면 신흥학교를 지나서 천변을 따라 대성리에 있는 교회까지 걸어갔어요. 전주천변은 참 많이도 바뀌었지요. 그 시절에 비해 산책로로 정리가 많이 된 느낌입니다. 사라진 풍경들도 생각이 나는데요. 싸전다리 건너편 오른쪽 산의 초록바위 순교 터도 길을 넓히면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요. 지금은 조형물만이 그곳이 순교 성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지요. 한옥마을 모습도 참 많이 바뀌었어요. 제 기억에 오목대에 샘터가 있었거든요. ‘쌍샘길’로 불리던 그 길이 세월이 흐르고, 골목길을 넓히면서 샘터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쌍샘이 복원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라져서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복원된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완산동 집에서 기린로나 모래내까지 걸어 다니는데 신학원 다니던 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달라진 전주의 모습도 떠오르고요. 사진으로 다시 만나는 전라북도박물관 옛 모습 1971년, 신학원 2학년 때, 전라북도박물관에 갔어요. 사실 정확히 언제, 왜 갔는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당시 신학원 친구들과 함께 갔던 기억만 납니다. 두 친구와 함께 갔는데 한 친구는 김제 출신이고, 다른 한 친구는 진안 출신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셋 다 전주 사람이 아니어서 시내 구경 한번 가 보자 하고 갔던 모양입니다. 매화꽃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아마도 2~3월경이었나 봅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친구들이 시내 구경을 나가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기념사진도 찍겠다고 카메라까지 챙겨 갔지요. 박물관 안을 구경하고 나와서 정원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시 태조비가 박물관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사진 보고 알았어요. 제가 태조비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아, 그때 그 태조비가 경기전 앞으로 옮겨 왔구나’ 하고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사진을 보니 50년 전 박물관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어요. 지금 성심여고 네거리에 있는 구둣방이 바로 박물관 정문 자리였어요. 그런데 박물관이 경기전 자리에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믿지를 않더라고요.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찍은 거라며 사진을 보여주면 그제야 믿더군요.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사진 한 번 보여 주는 게 더 빨랐던 셈이죠. 전주신학원 사진도 찍어 뒀는데요. 제가 나오고 난 뒤, 4~5년 후에 전주신학원이 없어졌다고 해요. 사라진 건물이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신기해요? 자리를 옮긴 곳도, 사라져 버린 곳도 모두 사진 속에는 그대로 살아 있으니 말이에요. 사진은 역사적 자료이자 자랑스러운 기록물제가 사진을 기증한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비록 사라져 버렸지만, 사진 속에 남아 있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옛 모습을 떠올리고 믿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으로 1971년 찍은 전라북도박물관 사진을 기증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보거나 겪어 보지 않았지만, 사진으로나마 그 시절에 대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옛것에 관심이 참 많아요. 옛것에는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옛 물건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제 사진을 보고 ‘전라북도박물관이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구나’하고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진을 보고 난 뒤, 경기전에 가면 ‘이곳에 전라북도박물관이 있었구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옛날 박물관이 있던 자리구나’ 하고 한 번 더 생각했으면 해요. 전주는 그 어느 곳보다 우리 문화가 많이 남아 있고, 계승하고 있는 곳이잖아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옛날 전주의 모습과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과 애착을 보였으면 해요. 아끼고 보호하면 더더욱 좋겠지요.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사진으로 남겨 두세요. 사진은 증명인 동시에, 자랑할 수 있는 자료거든요. ‘나 이것 봤다, 여기 가 봤다’ 하는 자랑 말이지요. 그러니 관심을 쏟고, 보고, 기록하길 바랍니다. 이영무(74) 어르신은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40여 년간 목회 생활을 했다. 지난해 전주에서 출간한 종교 간행물 을 전주시에 기증한 데 이어 올해 1971년에 찍은 전라북도박물관 사진을 기증했다.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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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이야기를 품은 숲, 같이 걸을까요?
전주 마실길
천년의 시간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을 출발해 좁은목약수터 방향으로 걷다 보면 처음 마주하게 되는 길이 억경대에서 만경대 구간이다. 해발 630m 고덕산 초입에서 숲을 오르다 보면 낯선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여름의 숲, 우거진 녹음에 감춰진 흙빛 돌 산성이 이질적이면서도 정겹다. 숲길을 벗어나 남고산성을 걷는다. 돌을 이고 지고,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간절한 무게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붙잡는다.남고산성은 가팔랐으나 단아했고 산세와 어우러져 고즈넉했다. 남고산성은 삼국 통일 이후 남북국시대에 지어진 석축 산성으로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도읍이던 전주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견훤이 쌓았다 한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 부윤을 지낸 이정란이 왜군 방어를 위해 보수한 산성이다. 지키고자 하는 생의 간절함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이 숨겨 놓은 이야기가 장엄하다.천년전주 마실길은 남고산성을 지나 억경대와 만경대로 발걸음을 이끈다. 억경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가빴던 숨을 돌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전주 풍경에 가슴이 벅차다. 고층 빌딩에서 바라본 전주와는 천양지차. 그 풍경에 넋을 잃을 무렵, 문득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바람을 머리에 인 숲이 무겁게 일렁인다. 천길 바위 머리 돌길을 돌고 돌아,나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구월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 만경대를 지나 충경사를 향하면서 만경대 암각서에 새겨진 시구를 읊조린다. 새로운 나라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 포은 정몽주와 태조 이성계 그들에게 길은 우국과 충정이었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였다. 어디 그뿐일까? 관직에서 물러난 64세의 노부인 이정란이 다시 칼을 잡고 적진으로 뛰어든 길 역시 우국과 충정이었고 백성에 대한 애민이었다. 남고산성 숲에는 우국과 충정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천년전주 마실길, 그 숲 곳곳에 역사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싸전다리를 지나 초록바위에서 완산칠봉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마실길이라는 이름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마실길’이란 이웃에 놀러 가는 길을 뜻한다. 사부작사부작 걷는 걸음마다 삼나무 잎사귀나 편백나무 향이 밟힌다. 여름에는 매미 소리와 청량한 숲 내음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겨울에는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로 가득하다. 완산칠봉 오르는 길은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뿐일까? 장군봉 팔각정을 만나고 금송아지 바위의 전설을 듣고, 크고 작은 돌탑과 가람시비를 만난다.천년전주 마실길을 두른 숲은 천년의 삶과 문화와 역사를 안고 있다. 그 숲속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고목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 같다.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억경대-만경대-남고산성-충경사-매화봉-장군봉-완산공원-금송아지바위-용두봉-용머리고개-다가공원-완산교-매곡교-초록바위-남천교-국립무형유산원 기억을 재생하는 숲, 모악산 마실길과 삼천마실길전주 모악산 마실길은 모악산이 품은 길이다. 길은 마을에서 시작해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바람과 나무와 숲을 잇는다. 추동마을 입구에서 시작해서 고개 너머 독배마을까지 이어지는 12.3km의 구간 동안 위뜸에 살았다는 강릉 함씨와 비선골에 살았다는 김해 김씨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굿을 해 주는 무녀 쟁인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험한 산이 아닌 고즈넉한 평야의 숲길이 마을과 마을이 지닌 이야기를 품고, 뒤 숲이 지닌 이야기와 앞 숲이 품은 이야기로 마을 지도를 만든다. 천년전주 마실길의 숲이 삶과 역사를 품은 숲이라면 모악산 마실길의 숲은 옛 풍경과 잊힌 기억을 재생하는 숲이다.가래나뭇골(추동마을)을 지나고 원당마을을 지나 시앙골을 넘고 학이 날아든다는 학전마을을 지나 만나게 되는 노송 군락지는 곧게 뻗은 노송들이 푸른 하늘을 이고 우뚝 서 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숲이 아니라 하늘 향해 곧게 뻗은 노송들이 장엄한 분위기를 내뿜는 숲이다. 마치 마을과 마을을 지키고 사람과 사람을 지키는 장승처럼 우람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삼천 마실길은 마을과 역사를 잇는 길이다. 옛 전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 길이라고 할 수 있다.탐진 안씨의 집성촌인 능안마을에서는 탐진 안씨들이 대대로 마을을 지켜 온 흔적을 엿볼 수 있고, 능안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찾을 수 있다. 소란소란 걷다 만나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에도 한번 들러 보자. 탐진 안씨가 지킨 마을 이야기와 더불어 전주의 옛이야기에 빠져보는 즐거운 기회가 될 것이다. 모악산 마실길추동마을-원당마을-학전마을-완산생활체육공원-노송 군락지-신금마을-화정마을-봉암마을-독배마을-독배고갯마루
20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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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리 두 기 여 름 나 기 - 떠나봐요
‘꽃싱이’ 타고 씽씽, 자전거길 달려요
외출이 꺼려지는 요즘, 집 밖의 초록 풍경을 마주하며 휴가를 보내고 싶다면 자전거로 전주를 달려 보자.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페달을 굴리다 보면 어느새 땀방울은 식어 가고, 기분 좋은 상쾌함만 남게 될 것이다. 특히, 자전거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길 따라 숨어 있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자전거가 없어도 괜찮다. 전주시 공영자전거 ‘꽃싱이’가 여러분의 발이 되어줄 것이다. 전주 대표 자전거길 1. 문화와 역사를 만나요, 박물관길 홍산교-전북도청-용호근린공원-전라북도교육청-국립전주박물관(4.9km) 2. 산길과 마을을 달려요, 건지산길 가련교-한국소리문화의전당-동물원-전주북초-호성네거리-전주역(6.5km) 3. 첫마중길에서 평화동까지, 백제대로길 전주역-첫마중길-종합경기장-백제교-효자광장교차로-꽃밭정이사거리(9.1km) 4. 한옥마을로 떠나요, 기린대로길 한국도로공사수목원-호남제일문-종합경기장-전주시청-전주향교(12.1km) 5. 아름다운 꽃길 감상해요, 혁신도시길 한국농수산대학-엽순근린공원-전주월드컵경기장-한국도로공사수목원(11.4km) 6. 초록 공간을 달려요, 에코시티길 송천자전거대여소-송천역네거리-백석제-전당저수지-세병공원(6.9km) 7. 천변도로를 안전하게, 삼천자전거길 서곡교-홍산교-마전교-이동교-우림교-백로공원-모악산자락길(13.5km) 8. 영화 같은 풍경을 만나요, 만경강길 만경강-추천대교-가련교-백제교-싸전다리-국립무형유산원-월암교(18.8km) 전주 공영자전거 ‘꽃싱이’ 대 여 료│1회 1,000원 이용 시간│9:00~19:00(월요일·공휴일 휴무) 대여 방법│ 스마트폰으로 본인 인증 뒤 1,000원을 내면 자유롭게 이용 가능(안전모도 무료로 대여 가능) 대 여 소 치명자산 대여소- 완산구 대성동 350-2 부근 자연생태관 대여소 - 완산구 교동 951-1 부근 한옥마을 오목대 대여소 - 완산구 풍남동 3가 7-9 부근 전주향교 대여소- 완산구 교동 21-2 부근 전주천(생태 자전거 놀이터) 대여소- 덕진구 진북동 774-8 덕진공원 대여소- 덕진구 덕진동 1가 1320-2 삼천동 대여소- 완산구 삼천동 1가 314-2 송천동 대여소- 덕진구 송천동 1가 318-12 아중리 대여소- 덕진구 우아동 2가 968
202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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