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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람
“사회에서 받은 혜택, 고향 사랑으로 갚겠습니다.”
정순우 전미동 은평마을 (전)통장
Q. 은평마을이 특별한 애정과 봉사의 대상이 된 배경이 있나요?스물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송천동으로 이사를 가고, 직장 생활을 마친 예순네 살 때 다시 고향인 은평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개선해야 할 점들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제가 받은 삶의 행복을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주변 마을의 발전부터 시작해 보자는 뜻에서 출발했습니다.Q. 통장 활동 중 이것 하나만큼은 잘했다고 자부하는 일이 있다면?마을의 1/3 정도는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이십니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이신지도 모르고 계시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행정적 도움을 알아봐 드린 것이 힘이 되신다는 말을 듣고 참 보람찼습니다. Q. 통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면?우선 ‘안전’이 떠오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저희 은평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많이 위험했어요. 실제로 사망 사고도 여러 차례 있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행정과 지방의회의 도움을 받아 마을 진입로를 개선한 뒤,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Q. 최근에 펼치고 계신 봉사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후대에 물려줄 환경을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주일에 한번씩 제 손수레를 끌고 전당네거리부터 회포대교, 만경강가의 고내천변로 총 3km 구간의 쓰레기를 줍고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여든 살까지는 계속해서 마을의 정화 활동을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2024.04.24
#정순우
#정순우통장
#은평마을
온·다라, 궁원록(宮院錄)
천년고성(古城)을 도라드니
전주부성
왕조의 기운이 서린 성곽을 따라 전주부성은 조선 시대 전주의 옛 명칭인 ‘전주부(全州府)’를 두르는 성곽을 말한다. 총 3.2km 구간이다. 백성들은 물론 전라감영, 경기전, 조경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까지 지켰으니 그야말로 ‘조선의 역사’를 수호했던 성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주부성은 고려 공양왕 1년(1388년) 전라관찰사 최유경 때 최초로 축조되었다. 야속하게도 일제 침탈 기간인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모든 성벽과 성문이 헐렸고 현재는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부성과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풍패지관. 시민들에겐 ‘객사’란 이름으로 더 친근하다. 이곳에 걸린 편액 ‘풍패지관(豊沛之館)’은 한고조의 고향 ‘풍패’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드러낸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후손의 예를 다하기 위해 조선 왕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에 행차했다고 한다. 그때 이곳 풍패지관에 머물렀을까? 어디선가 태종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거리로 전주부성길을 찬찬히 걷는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펼쳐지는 영화의 거리, 근대 가옥들이 멋을 뽐내는 웨리단길, 한옥마을 주변 남부시장에 위치한 풍남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한옥마을, 시민예술가들이 모이는 동문예술거리까지 역사의 호흡을 느끼며 감상에 빠진다. 전주부성 거리 곳곳은 그 호흡을 타고 미래로 나아가는 중이다. 최근엔 성벽 윤곽이 규명되어 전주부성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지난 2021년부터 ‘객사길’을 비롯해 ‘흔적길’, ‘감성길’ 등 테마별 특화거리도 조성 중이다. 이를 통해 역사·문화·예술이 집약된 전주의 핵심으로 자리를 굳힐 계획이다. 언젠간 전주부성길이 역사와 문화를 거리에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명소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4.02.25
#전주부성
#천년고성(古城)
#왕의궁원
전주 문화유산
전주로 돌아온 보물
전 낙수정 동종 (傳 樂壽亭 銅鍾)
긴 시간 동안 전주시민의 사랑을 받아 온 국립전주박물관에는 역사적 가치를 품고 고아한 미를 뽐내는 많은 유물이 있지만 그중 오랜 시간을 넘어 전주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유물이 있다. 바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범종, ‘전 낙수정 동종’이다. 오래전 전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동종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일까? 범종은 당외(堂外)에 종루를 걸어 놓고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의 일종인데, 전 낙수정 동종은 원래 전주(全州) 개원사(開元寺)라는 절에 걸려 있었다. 세월이 흘러 개원사가 폐사된 후 그 자리에 ‘낙수정(樂壽亭)’이라는 정자가 들어섰는데, 정자의 소유자가 땅속에 묻혀 있던 동종을 발견하였다. 이후 1926년 3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 의해 일본으로 유출된 동종은 1960년대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1999년 다카하라 히미코 씨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동종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하게 되면서 동종은 기나긴 세월을 돌고 돌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요한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동종의 우직한 자태에는 기나긴 세월을 묵묵히 버텨 온 견고함이 서려 있다. 아마 대한민국을 떠나 있던 때에도 그 모습 그대로 인고의 시간을 견뎌 왔을 것이다. 범종의 맑은 소리는 ‘부처의 소리’라고 한다. 부처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결국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동종. 그 깊고 맑은 울림이 오래도록 전주시민과 방문객의 마음속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2023.12.21
#낙수정 동종
#국립전주박물관
전주 성리학의 산실
황강서원
효자동 마전 고분군을 지나 쭉 뻗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홀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황강서원이 보인다. 태극을 품은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밖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황강서원의 강당 팔작지붕은 위용이 넘치는 모습으로 들어오는 이를 환대한다. 현재 전주 이씨 문중 서원으로 관리되고 있는 황강서원은 고려시대에 불교 대신 유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세워 풍습을 고치자는 개혁을 주장한 학자, 황강(黃崗) 이문정을 기리는 곳이다. 황강서원은 이문정 외에도 고려 공양왕, 조선 태조 시절 모두 예조판서를 지낸 이문정의 손자 양후(良厚) 이백유, 그의 종손이자 조선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추탄(楸灘) 이경동을 포함하여 총 7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문정은 말년에 고향인 전주에 세운 문학대에서 제자들을 교육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문학대는 2007년 서부신시가지의 개발과 함께 현 위치인 황강서원의 사당 뒤로 옮겨졌다. 황강서원의 왼편 담을 따라 난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문학대가 있는 언덕배기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면 탁 트인 전경과 함께 황강서원의 고즈넉한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문학대는 중앙에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깐 정자인데, 황강 선생은 이곳에서 그의 주위를 뱅 둘러앉은 학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전주에서 성리학을 가르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한 황강 이문정의 업적과 정신이 황강서원의 역사를 따라 후대에 길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2023.09.22
#효자동
#황강서원
기획 특집
새해 전주를 사랑하는 마음, 고향사랑기부제로 전하세요
Q 고향사랑기부제란 무엇인가요? A 개인이 자신의 현재 주소지를 제외한 본인의 고향이나 지방자치단체(시·도, 시·군·구)에 일정 금액을 기부하면, 기부자에게 세액공제 혜택과 답례품을 제공하는 제도입니다. 즉,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에 거주 중인 분들이, 부모님이 남아 계시고 추억이 가득한 이곳 전주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지요. Q 전주를 사랑하는 마음, 어떻게 전하면 되나요? A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온라인은 고향사랑기부시스템 ‘고향사랑e음’을 이용하면 되는데요, 기부금 납부부터 답례품 선택과 배송, 자동 세액공제 처리까지 원스톱으로 제공되니 아주 편리하답니다. 오프라인은 ‘NH농협 창구 대면접수’를 통해 참여 가능합니다. Q 기부금액은 얼마까지 가능한가요? A 개인별로 연간 500만 원까지 기부할 수 있습니다. 전주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여러 지자체에 복수로 기부할 수도 있답니다. 다만, 한 기부자는 기부 대상이 3곳이든 4곳이든 1년에 500만 원까지만 기부할 수 있다는 점, 꼭 기억하세요. Q 세금 혜택도 받을 수 있나요? A 물론입니다. 기부금 10만 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를 받고, 10만 원이 넘어가면 초과분의 16.5%가 공제됩니다. 고향에 기부도 하고 세액공제도 받을 수 있으니 정말 매력적인 제도이지요. Q 기부하면 답례품도 준다면서요? A 네. 기부액의 30% 내에서 전주시만의 특색을 담은 다채로운 특산품을 답례품으로 드린답니다. 전국에서 맛있기로 유명한 전주 배를 비롯해 대통령의 명절 선물로도 선정된 전통주인 이강주, 전주의 명물 초코파이, 전주의 자랑 한옥마을 숙박권 등 세대를 아우르는 실속 만점 답례품들도 준비돼 있답니다. Q 전주를 위한 기부금은 어떻게 사용되나요? A 전주시에서는 기부금을 법에서 정한 범위 내에서 다양한 사업에 활용할 계획입니다.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청소년의 보호·육성, 지역 주민의 문화예술 및 보건 증진, 지역공동체 활성화 지원, 주민의 복리 증진 등 전주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에 쓰일 거랍니다. 문의 l 전주시 자치행정과(063-281-2158)
2022.12.21
#고향사랑기부제
#고향사랑기부시스템
#고향사랑e음
#기부금
#세약공제
전주 그곳
전주에 길이 있다
전주의 동맥, 충경로
충경공 이정란 장군의 기상을 담다전주를 대표하는 ‘길’ 중의 하나인 ‘충경로’. 이 길은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3가 다가교 사거리에서 병무청 오거리까지 이어지는 도로이다. 전주시는 1980년대 이곳 원도심에 4차선 도로를 개설하며 지금의 충경로를 완성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오랜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그 시작이 되는 것이 바로 길 이름이다. ‘충경로’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경(忠景)공 이정란 장군(1529∼1600)의 시호에서 착안해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 출신의 충경공 이정란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6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청을 설치해 왜적으로부터 전주성을 지킨 인물이다. 훗날 순조는 이정란 장군의 용기와 충정을 높이 여겨 충경(忠景)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의 담대한 기상과 의로운 희생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길은 충경공 이정란 장군의 희생과 공헌을 잊지 않겠다는 전주시민들의 고마운 마음을 담은 길이다.전주 원도심의 동맥으로 자리 잡다전주시민들에게 있어서 ‘충경로’는 수많은 추억과 사연이 서린 길이다. 또, 역사와 문화의 숨결이 살아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곳은 조선 왕조의 본향을 상징하는 풍패지관, 시민들이 애용했던 동부시장, 전주 원도심의 상징인 객사길 등을 품으며 전주의 중심지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왔다. 특히 ‘충경로’는 전주의 동맥이자 중심 도로라 할 수 있다. 이 도로는 개통 후 팔달로와 함께 십자 형태를 이루며 전주시 도로 개발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존 전주 원도심의 중심가는 옛 전라감영 자리부터 이어지는 웨딩의거리와 그 인근이었다. 하지만 충경로 개통 후에는 전주객사 뒤편인 객사길이 명실상부한 원도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또한, ‘충경로’는 전주지역의 도시개발에서도 여러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전주 서부의 폭발적인 확장세에 큰 도움을 줬다. 충경로의 개통으로 원도심과 전주천 서부에는 직통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생겼고, 이에 따라 전주천 서부의 개발이 가속화된 것이다. 이는 중화산동과 효자동 등의 새로운 주거밀집지역 탄생으로 이어졌고, 전주시는 서부지역의 확장과 함께 폭넓은 도시개발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변신을 꾀하다한때 전주를 대표하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충경로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진 못했다. 원도심의 쇠퇴 속에서 충경로도 쇠락의 길을 걸으며 찬란한 빛을 잃어갔다.이에 전주시는 충경로의 재도약을 위해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다. 우선 시는 충경로 구간의 낡은 보도와 차도를 새롭게 정비해 일반 도로와는 다른 도로로 재탄생시키기로 했다. 또한, 이곳을 보행친화거리로 조성해 한옥마을에 국한되었던 관광거점을 확장하겠다는 계획이다. 원도심의 번영과 쇠락 속에서 묵묵히 그 세월을 지나온 충경로. 이 길의 새로운 도약이 전주의 희망찬 미래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전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풍패지관’ 전주객사는 충경로를 상징하는 장소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벼슬아치들을 묵게 한 일종의 관사이다. 전주의 객사는 조선 초기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왕에게 배례를 올리거나 외객을 접대하는 용도로도 사용됐다. 전주객사의 또 다른 이름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다. ‘풍패’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즉, ‘풍패지관’은 조선 태조의 고향인 전주가 곧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국내의 객사 현판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풍패지관 현판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것은 이 현판을 쓴 사람이 바로, 16세기 중국의 3대 문장가였던,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스승이었던 익산의 선비 송영구를 찾아가던 중 이곳에 들렀던 것. 그렇게 풍패지관의 아름다운 현판이 탄생하게 되었다. 풍패지관 | 전주시 완산구 충경로 59
#충경로
#전주객사
#풍패지관
#원도심
#구도심
당신과 더불어
전주완창무대로 돌아온 젊은 소리꾼 유태평양
원조 국악 신동으로 기억하는 시민들이 많습니다. 판소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저희 아버지께서 늦은 나이에 판소리에 빠지셨어요. 제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국악으로 태교를 하셨다고 해요. 유년기에 아버지를 따라서 조통달 선생님 댁에 드나들었는데,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따라 부르고 아쟁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자랐어요.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하다가 네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제가 이어받게 된 것이지요. 어린 시절에는 찬송가도 판소리처럼 불렀을 정도로, 제게 음악이란 곧 국악이었습니다.전주와 인연이 깊은데요, 유태평양 씨에게 전주는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가요?전주는 제 마음속 고향이에요. 다섯 살 무렵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유년기를 전주에서 보냈으니까요. 아직도 초등학교 친구들과 선생님 얼굴이 기억납니다. 대학교도 전주에서 다녔는데, 연습에 지칠 때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며 평범한 대학 시절을 즐겼습니다. 현재도 두 달에 한 번은 전주에 내려가는데, 그때마다 아지트에 온 듯 편안한 느낌이에요. 일찍 소리를 시작해서 수많은 공연을 해 왔는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요? 초등학생 때 미국의 대규모 공연장 무대에 섰던 경험이 떠올라요. 무대 위에 서서 관객석을 바라봤는데, 사람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내려올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요. 그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또, 2015년도쯤 일본 우토로 마을의 작은 회관에서 한인 2, 3세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관객 대부분이 징용을 당해 끌려가신 분들과 그분들의 자손이었는데, 모국의 음악과 예술을 잊지 않고 흥얼흥얼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요.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셨고요. 이렇듯 국경을 넘어 음악이라는 언어로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무대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올해 전주완창무대에서는 어떤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신가요?미산 박초월 선생님께서 정립한 미산제 를 선보일 예정인데요, 동편제 줄기이지만 미산 선생님만의 더늠으로 재창조된 수궁가입니다. 이 곡은 미산 선생님의 아들 조통달 선생님께 전승되었고, 제가 그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수궁가는 널리 알려진 고대소설 을 엮어 부르는 판소리인데, 미산제 는 미산 선생님만의 화려한 기교와 절제미가 특징이에요. 미산 선생님은 최고조의 고음을 구사하는 시시상청(時時上淸)의 높은 음역을 타고나셔서 변화무쌍한 소리로 무대를 사로잡습니다. 이번 무대에선 선생님의 더늠을 간직하면서도, 제 기량을 녹여 낸 새로운 판소리를 선보이려 합니다.관객들에게 어떤 소리꾼으로 기억되길 바라시는지요?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국악을 어렵게 느끼시는 분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끔 대중음악과의 협업을 지속하고,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서양의 민속적 서사를 담아낸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려 해요. 무엇보다 소리꾼으로서 꾸준히 완창 무대를 올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앞으로도 저의 근간인 전통 판소리를 비롯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소리꾼 유태평양 유년 시절 전주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1996년 MBC 에서 다섯 살짜리 판소리 신동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여섯 살에는 판소리 흥부가를 최연소 최장 시간 완창에 성공하는 등 남다른 재능을 뽐냈다. 이후 대한민국 인재대상, 동아국악콩쿠르 금상,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창극단에 소속돼 있으며, 다수의 방송 출연으로 대중 앞에 서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2.10.24
#유태평양
#국악신동
#전주완창무대
전주가 응원하는 뼛속까지 코미디언 곽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황 좀 들려주세요. 공백 기간이 좀 길었는데요, 콤비인 이창호 씨와 함께 앨범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에게 음악으로나, 웃음으로나 만족스러운 콘텐츠를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그 외에도 유튜브 운영을 비롯한 공연 준비, TV, 라디오 등등 정말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금요일 아침 방송 때문에 매주 전주에도 내려오고 있고요. 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특별한 추억들이 있나요? 제가 전주에서 태어나서 삼천초등학교, 해성중·고등학교를 나왔거든요. 대학 진학으로 전주를 떠나기 전까지 전주에서 추억이 많아요. 해성고등학교 때는 ‘시나브로’라는 스쿨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는데, 전북 대표로 록페스티벌에 나가서 상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중리에서 장사를 하셔서 그 동네에 추억의 장소가 많아요. 특히 아중저수지에 자주 갔는데, 지금은 아중호수로 이름도 바뀌고 산책로도 아주 잘 꾸며 놨더라고요. 전주가 점점 살기 좋아지는 것 같아서 저도 괜히 뿌듯합니다. 특별히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을까요? 원래 공부 빼고 다 관심이 많았어요. 음악이 좋아서 밴드를 했고 미술로 입시도 치렀지만, 무엇보다 노는 걸 제일 좋아했죠. 특히, 사람들이 제 말이나 행동에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늘 웃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밴드 공연 중에도, 해성고 축제 MC를 할 때도, 심지어 해병대에서도요. 미술도 음악도 좋지만 제가 제일 즐기는 건 역시 사람들을 웃기는 일이더라고요. 결국은 군대에 가서 코미디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전공을 포기하고 바로 이 길로 뛰어들게 되었죠. 코미디언에서 어떻게 유튜버로 전향하게 되었나요? KBS 공채 코미디언이 되었을 땐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 8년 동안 에 제 모든 것을 걸고 살았으니, 2020년 6월에 프로그램 폐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솔직히 그때는 전주에 다시 내려갈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계속 콤비로 코미디를 하던 이창호 씨와 딱 1년만 유튜브 해 보고 안 되면 귀향하자는 마음으로 을 개설했는데, 열심히 하다 보니 개콘 폐지 1년 뒤부터 신기하게 잘되더라고요. 보이그룹 가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나면서 잡지 화보 촬영에다 음악방송 과 까지 출연하게 됐고요. 예상했던 것보다 대중의 반응이 훨씬 뜨거워서 저도 놀랐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이 글을 보실 때쯤은 친구들의 신곡이 두 곡이나 나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곧 서울에서 기획 공연도 있을 거고요. 특히 전주시민 여러분께는 매주 금요일 아침 으로 인사드리고 있으니 많은 시청 부탁드리고, 구독도 부탁드립니다. 고향인 전주에서 이렇게 저를 찾아 주시고, 응원해 주신다고 생각하니 더욱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전주의 현 시장님과 동문이라 요즘 부쩍 전주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앞으로 더 잘사는 전주가 되리라 기대하고, 저도 늘 응원하겠습니다. 코미디언 곽범 1986년 11월 1일, 전주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극단 활동과 다양한 행사 사회자를 거쳐 2012년, 4년간의 응시 끝에 KBS 공채 27기 코미디언이 되었다. 에 출연하다가 프로그램 폐지 후 코미디언 이창호와 함께 유튜브 채널 을 개설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라는 보이그룹으로 코미디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는 코미디언 곽범과 이창호가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가상으로 설정한 세계적인 2인조 아이돌 그룹으로, 멤버는 탄과 제이호다. 영상 보정 필터 앱을 활용해 16등신 꽃미남 보이그룹으로 변신,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22.09.22
#곽범
#코미디언
#매드몬스터
#빵송국
#까브라더쑈
“경제 대도약의 원년으로 삼겠습니다”
민선 8기 우범기 전주시장 인터뷰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시민들께 인사 한 말씀 해 주세요. 먼저 믿어 주고 성원해 주신 전주 시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전주 발전과 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그만큼 컸던 것으로 알고, 기대에 어긋남이 없도록 준비 철저히 해서 전주 발전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장님의 평소 모습이 궁금합니다.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뜻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른 신발을 신으려면 우선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야 하듯 깊은 포용력과 이해심,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정도를 지키며 사는 것이 저의 신조입니다. 물론 저도 사람인데 단점이 왜 없겠습니까. 작든 크든 일 하나를 맡으면 소신에 따라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집이 세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저의 단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님께서 말씀하신 ‘전주의 큰 꿈’은 무엇인가요? 전주는 전라도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녁 8시면 불이 꺼져 활력을 잃고, 젊은 청년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주시 전 지역에 해당하는 ‘슬로시티’와 많은 규제에 갇혀서 침체한 부분도 많습니다. 천년 전주가 다시 미래 천년을 내다보고 가기 위해서는 규제를 풀고, 젊고 유능한 청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민선 8기 대표 공약 3가지만 소개 부탁드립니다. 전주완주 통합은 필수라고 봅니다. 전주완주 통합을 기반으로 단순한 행정구역 통합을 넘어 100만 도시를 만들어 나간다면 첫째, 완주의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며, 단연코 행정과 지역 경제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될 것입니다. 둘째, 전주역과 호남제일문에 지하차도를 조성하겠습니다. 전주시외버스터미널과 전주고속버스터미널을 한 곳으로 이전하고, 전주역을 명품복합환승센터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전국으로 광역교통망을 연결하는 KTX를 중심으로 전주역에 주요 교통 인프라를 집결시키자는 취지입니다. 장차 이뤄질 전주완주 통합 메가시티의 위상과 교통 수요에 걸맞은 교통체계를 위해서라도 전주역사 공간을 복합적으로 개발해 명실상부한 전주의 교통 허브로 조성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주역 첫마중길에서 장재마을 구간의 ‘첫마중길 지하차도 개발’이 필수입니다. 그러고 나면 2단계로 전주역에서 롯데백화점 사거리까지 지하차도 건설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왕조 왕의 궁원(宮園)’ 프로젝트를 추진하겠습니다. 뿌리 깊은 조선의 문화유적 등을 발굴개발하여 전주에 실존하는 역사문화를 관광자원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 하여금 전주가 문화예술상업 중심지이자 대한민국 대표 체류형 관광거점도시로 거듭나게 하겠습니다. 끝으로 전주시장으로서 포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경제 대도약’을 통해 ‘전주를 다시 전라도의 수도로’ 우뚝 세워야 한다는 엄중한 과제와 무거운 책임감이 앞섭니다. 올해는 66만 전주시민 여러분의 마음을 한데 모아 경제 대도약의 원년으로 삼겠습니다. 민선 8기에는 전주시 공직자는 물론 전주 시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전주 변화를 확실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범기 민선 8기 전주시장은 1963년 부안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91년 제3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기획재정부 등 경제와 예산 부처에서 줄곧 일했고, 2014년 광주광역시 경제부시장, 2019년 전라북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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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여행
동네 마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서, 중인동
아파트에도 텃밭이 자리한 동네 현관문을 나서 신발 끈을 조이고 모악산을 향해 기지개를 켠다. 예전엔 중인리가 완주군이었으나 30년 전에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명칭도 중인동으로 변경이 되었다. 대문을 나서 뒤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옥성골든카운티 아파트 단지 후문에 이른다. 아파트는 중인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한눈에 중인동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 아파트가 건축되면서 상하수도나 오폐수관, 도시가스와 같은 기반시설이 다른 외곽 지역보다 먼저 설치되어 중인동에 사는 주민들의 삶이 일찍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면 한 평 정도 고랑으로 나뉜 대규모 텃밭이 조성되어 있다. 처음 노인복지주택으로 허가가 나 분양을 하면서 세대별로 텃밭도 분양하였는데, 주민들이 가꾸는 채소들은 누런 잎 하나 없이 새파랗고 싱싱하여 전문가 솜씨가 부럽지 않다. 조석으로 매달려 있는 주민들을 보면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먹기가 쉽지 않은 우리 부부는 주민들의 텃밭이 부럽기만 하다. 마을 깊이 들어서서 만나는 풍경 아파트 옹벽을 둘러 산책길을 걷다 보면 벼농사를 위해 물을 댄 논과 과수마다 종이봉투가 매달린 과수원을 마주하게 된다. 농촌 생활은 해만 뜨면 할 일이 끊이지 않다 보니 여기저기 논밭에서 일하는 주민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가족까지는 아니어도 만나면 안부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니 우리도 원주민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원래 이 마을은 배 과수원으로 유명하였다. 중인동의 사계절은 과수원의 변화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봄이 시작되면 겨우내 휴식을 취하던 과수원들이 잠에서 깨어나 배나무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중인동 전체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것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곤 한다. 지금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개발을 하여 많이 줄었으나 여전히 과수원이 많이 남아 있다. 배꽃이 눈비처럼 떨어지고 나면 적과와 봉지 싸기로 5월 한 달은 온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과수원 사이로 좁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중인1길로 건너가는 굴다리가 나온다. 그곳은 외지인이 하나둘 들어와 정착하다 보니 마을 이름도 없고 주택도 각자 개성이 넘치고 예쁘다. 안쪽에 몇 채만 있어 큰길에서 보면 동네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도 어렵다. 한 발 한 발 걸으며 주택 한 채 한 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산책의 소소한 재밋거리이다.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체육공원과 어두제 하봉교를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완산생활체육공원이 새겨진 돌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완산생활체육공원은 중인동을 보금자리로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고, 몇 해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두 달 동안 특훈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여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순례길 300㎞를 걷기로 계획하고 항공권을 예매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걷기 훈련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식사만 하고 곧장 완산생활체육공원으로 달려와 매일 10㎞ 정도를 걸었다. 코로나19가 오기 전만 해도 해가 지면 운동을 하기 위해 완산생활체육공원을 찾는 동호인들로 매일 불야성을 이루었다. 대낮같이 환한 완산생활체육공원에서 땀에 흠뻑 젖어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건강해지는 것 같고 기분도 상쾌하여 우리 부부가 자주 찾는 곳이다. 완산생활체육공원 내에는 ‘어두제’라는 연못이 있다. 연못 한쪽 면에는 다양한 연꽃이 견본으로 심겨 있고, 연못에는 홍색과 백색의 연꽃이 피어난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연못은 지친 시민들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휴식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연꽃이 피면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 자주 찾아 거닐곤 한다. 아버지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새벽 일찍 금산사를 찾아 가장 큰 연등을 사서 누구보다도 먼저 대웅전 마당의 중앙에 걸곤 하셨다.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그리움이 더해 간다. 맛집과 등산객으로 북적이는 시내버스 종점 이쯤 되면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주말이라 아내의 수고로움도 덜어줄 겸 점심은 사 먹기로 한다. 오래된 맛집이 많은 중인동 시내버스 종점으로 향한다. 종점이라 하면 더는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뭔가 아련하기도 하고 고향에 온 것 같은 포근함도 간직하고 있어 좋다. 종점은 출발하는 곳이라 시간만 맞추면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고 항상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 돌아올 때도 정거장을 지나칠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편안하게 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바쁜 경우가 아니고 짐이 없는 날이면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종점에 다다르니 벌써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등산객들로 북적거린다. 중인동이 모악산으로 가는 초입이다 보니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등산객의 왕래가 잦다. 그래서 종점 부근에는 유독 맛집이 많다. 젊은이보다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많이 이용하다 보니 청국장이나 순대, 김치찌개, 닭볶음탕과 같은 토속 음식이 주메뉴이다. 우리도 식당을 정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지금 중인동은 농촌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도시로 탈바꿈해 가고 있다. 8년 전만 해도 저녁 식사를 하고 동네에 나오면 대부분 집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 마을 전체가 절간처럼 고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외지인들이 들어와 각종 편의시설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물론 생활이 편리해져 좋은 점도 있으나 뭔가 아쉽다. 8년 전과 지금은 상전벽해를 실감케 할 정도의 엄청난 변화가 밀려오고 있다. 현재도 동서를 가르는 고속도로 공사와 진입로 4차선 공사가 한창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변화가 중인동에 찾아올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도 아직은 대문 앞에 채소나 과일을 놓고 가시는 이웃의 훈훈한 정이 남아 있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지내는 마을의 모습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이 멋진 중인동에 사는 우리 부부도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글 송재영 에세이스트 2019년부터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을 출간하였으며, 주로 시와 산문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주관하는 생나눔교실 멘토로 참여하여 글쓰기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멘토링 활동을 하고 있다. 완산생활체육공원에 가면 완산생활체육공원은 축구장, 테니스장, 족구장, 농구장, 실내인공암벽장, 골프장, 풋살장 등 다양한 체육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어 많은 체육 동호인이 찾는 곳이다. 체육시설은 종류별로 이용 요금이 다르니 관리사무소(063-239-2566~9)로 문의할 것. 공원 내에는 ‘어두제’라는 연못을 빙 둘러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계절을 느끼며 자전거를 타거나 유모차를 끌거나 애완동물을 데리고 산책하기에도 좋다. 지압 산책길, 야외공연장 등 다양한 연령대가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두루 갖췄고, 연중무휴로 상시 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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