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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꽃심
“전주 기록물은 전주에 있어야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김세신 어르신이 발로 뛰며 수집한 전주 기록물
한자 공부에서 시작된 기록물 수집 스무 살 무렵,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기 위해 2년간 천자문을 쓰고 익혔어요. 아마도 못다 한 공부의 한을 그렇게 풀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익힌 한자는 후에 기록물 수집을 업으로 삼는 결정적 계기가 됐지요. 한창 돈벌이를 찾던 와중에 눈에 띈 게 고미술품, 고문서를 판매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동서학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당시 서학동, 교동, 완산동 일대에 고문서, 고미술품 가게들이 참 많았거든요. 자연스럽게 다양한 고문서, 고미술품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래된 문서의 가치를 잘 모르니 무게를 재서 그 값을 매기던 시대였어요. 한자 공부를 한 덕에 낡은 문서가 지닌 가치가 보이더군요. 10여 년 전 했던 한자 공부가 큰 자산이 된 셈이죠. 그렇게 오래된 문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강점을 토대로 고미술품도 함께 수집, 판매하는 가게를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항아리, 가구들도 함께 모았는데 모으고, 보관하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고문서와 고미술품 위주로 수집해 왔습니다. 1968년 궁도대회 채점표, 전주시에 기증수집 일을 시작하고 7~8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정보를 알아볼 수도 없던 시대니 무작정 발로 뛰면서 기록물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발로 뛴 덕에 일은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쪽 업계에서 제법 인정도 받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괜찮은 수집물이 있다고 먼저 연락을 주는 이들도 생겼지요. 얼마 전 전주시에 기증한 1968년 전주 청양정에서 열린 궁도대회 채점표인 획기지도 그렇게 얻게 된 것입니다. 17년 전쯤 광주에 사는 지인이 궁도대회 경기 결과를 기록한 획기지가 있는데 전주에서 열린 대회 같다면서 연락이 왔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획기지에는 매회마다 적중된 화살 수와 참가자 전원의 성적이 빠짐없이 기재돼 있었고, 당시로선 찾아보기 힘든 여성 선수에 대한 기록까지 있더군요. 하지만 당시엔 오랜 시간이 지난 기록물이 아니었기에 큰 가치가 있진 않았어요. 그래도 전주에서 열린 대회 기록물이니 그 가치를 떠나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지난해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 소식을 듣고 천양정 궁도대회 획기지를 기증했어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기에 전주시에 기증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히 기증할 기록물인데 상까지 받게 되니 그저 뿌듯할 따름입니다. 평생의 꿈, 내 고장 기록물 연구소오래된 기록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지역입니다. 역사적 사건의 기록물이 아닌 이상 본고장에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지요. 전주의 기록물은 전주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이번에 진옥 주장 술통을 비롯해 1968년 전북대 전주성심외국어학원 학생 모집 요강 전단지, 전주 최씨 족보 등도 모두 전주의 기록물이기에 전주에 있어야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기록물을 모으는 일을 하다 보니, 전주에 관련된 기록물을 참 많이도 모았습니다. 전주 시내 학교 졸업 앨범, 족보, 다양한 책자들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기록물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이에요. 그 바람을 현실화하는 계획도 세웠답니다. 바로 내 고장 기록물 연구소를 여는 겁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후쯤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껏 해온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의미 있는 내 고장 기록물 수집에 정진할 계획입니다. 김세신(71) 어르신은 전주시 완산동 용머리고개에서 ‘국보고미술원’을 4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문서, 고미술품 등 근대 유물을 수집, 판매하고 있다.
2020.10.28
#역사
#기록
#궁도
#기록물
#기증
기획 특집
특별기획
사람 중심 세상으로 전주, 동학농민혁명 정신 잇는다
125년,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며,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은 갑오개혁과 3·1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4·19혁명과 5·18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25년이 되는 올해 전주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복원하며, 가치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한눈에, ‘녹두관’ 문 연다새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역사가 시작된 1894년 동학농민혁명. 1년간에 걸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역사상 처음 일어난 민족운동이자 반봉건·반외세 혁명운동이다. 특히, 전주는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의 최대 성과 지역으로, 동학농민군은 1894년 5월 31일 유혈 사태 없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해 자치행정 업무를 시행했다. 이는 우리나라 민주적 지방자치제의 효시가 되었으며, 특히 사람 중심의 도시를 지향하는 전주정신으로 이어졌다.전주시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완산공원과 완산도서관을 포함한 동완산동 일원에 ‘전주동학농민혁명 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고 있다. 그 사업의 첫 번째로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추모 공간인 ‘녹두관’이 6월 1일 완공되어 문을 연다.전시실과 추모실, 옥상 전망대, 하늘통로로 구성된 ‘녹두관’은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역사를 면면히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안장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녹두관’은 125년 전 선조들이 간절히 바라던 꿈을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전시실은 전주의 동학혁명 자료 및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또, 동학농민혁명 관련 전시와 영상물을 통해 19세기 말 탄압의 시대상부터 봉기 전개 과정 등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연대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녹두관’에 이어 2021년까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알리는 홍보 교육관인 ‘파랑새관’, ‘민(民)의 광장’ 등을 조성한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완산칠봉에 안장된다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게 목이 잘린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승리의 땅 전주에 잠든다. 이 유골은 지난 1996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봉환되었지만, 그동안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전주시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유족회의 긴 노력 끝에 유골은 동학농민혁명 추모 공간인 ‘녹두관’에 안치될 계획이다. 전주시는 현재 유일하게 실존하는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해 영구 안치를 통해 넋을 기리고, 늦게나마 추모를 통해 후손의 도리를 다하고자 오는 5월 31일과 6월 1일, 안장 의식을 연다.‘백년의 귀향, 고이 잠드소서! 세기(世紀)를 밝힌 넋이여 꽃넋이여’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기념식 및 국제학술대회와 발인 및 노제, 안장식과 진혼 행사로 전개된다. 행사의 첫날은 전주완산도서관 강당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탈과 민족민주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유골 봉환에 기여한 이노우에 가츠오 명예교수는 이날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서 ‘일제국주의 침탈의 현재적 의미’라는 주제로 기조발제에 나선다. 이어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125주년 기념식과 문화공연이 열린다.이튿날인 6월 1일에는 전주역사박물관에서 발인 의식을 올린 뒤, 박물관에서 출발해 안장지인 ‘녹두관’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며 노제를 지낸다. 영정을 운구하는 차량의 뒤를 거리공연 행렬이 따른다. 농민군이 풍남문에 들이치는 대목을 구성한 판소리와 꽃상여가 행진의 대열을 이룬다. ‘녹두관’에 도착하면 안장식과 진혼 행사를 진행한다.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일본에서 봉환되어 전주역사박물관을 거쳐 ‘녹두관’에 안장되기까지의 과정을 전주 시나위로 형상화하고, 혼을 달래기 위한 굿과 김용택 시인의 추모시 낭송, 전통춤, 합창, 유골 안장, 분향과 헌화 등이 이어진다.
2020.10.12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역사문화벨트
“낡은 사진 한 장에서 그 시절 전주를 만납니다”
진상훈 어르신의 추억 가득한 성심여자중학교 사진들
학생들과 행복했던 시절을 기록하다오직 교사의 사명감으로 보낸 37년이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가르치는 일에 대한 열정,학교에 대한 애정이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1980년대 해성중학교에서 근무한 6년을 제외하곤 1973년 성심여자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학교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20대부터 60대까지 제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곳이니 그 애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했던 순간, 학교의 모습 등을 사진으로 남기고,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요. 단순히 머릿속으로 ‘그때 참 즐거웠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사진을 보면 당시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거든요. 사진 한 장이 지닌 힘이 그렇게 큽니다. 당시엔 체육대회를 종합경기장에서 열었는데 학교에서 종합경기장까지 행진을 하며 걸어갔어요. 시민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들고 말이에요. ‘엄마, 아빠 왜 싸워?’라는문구가 담긴 피켓을 든 거리 행진 사진을 보면 아직도 웃음이 납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이 떠올라서 말이죠.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겠지요. 사진을 통해 전주의 옛 모습을 만나다사진의 힘을 느낀 후 본격적으로 여러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앨범은 굳이 꺼내지 않으면 잘 보지 않을 것 같아 액자로 제작해서 집 안 곳곳에 두었습니다. 그렇게 둔 액자들이 서른 개가 넘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하신 은사님들 사진은 물론, 고등학교 친구들 사진, 제자들 사진을 보며 당시를 추억하곤 합니다. 그 사진들에는 그저 인물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한벽루, 오목대, 이목대, 풍남문, 종합경기장, 덕진공원, 전주역 등 전주의 옛 모습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제가 전주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당시 졸업사진을 풍남문 앞에서 찍었어요. 1964년 즈음 찍은 졸업사진을 보며 옛 친구들은 물론 그 당시 풍남문 모습까지 볼 수 있는 거예요. 1973년경 한벽루로 떠난 성심여자중학교 소풍 사진에는 숨겨진 재미가 있어요. 징검다리에 서서 손잡고 있는 아이들 뒤로 빨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당시 한벽루 아래 전주천에는 빨래터가 있었거든요. 1980년대 소년체전이 열린 종합경기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스게임을 하는 학생들과 관중들 모습을 보면 당시 열기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렇게 사진 한 장에는 소중한 사람들은 물론 옛 전주의 모습, 그리고 추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주의 풍광은 많이 변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기억은 항상 변함없이 제 마음에는 그대로입니다. 예술로 말하면, 성악이나 같을까요? 사람의 몸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저에게 성심여중과 전주는 항상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주는 울림이지요. 사진으로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퇴직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자들과 만나 학교에 있었을 때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당시 학생들이 저를 ‘베토벤 선생님’이라 불렀어요. 음악도 워낙 좋아하고 헤어스타일이 마치 베토벤 같았거든요. 학생들과 만나면 그때 그 시절 베토벤 선생님으로 돌아가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줬고, 여전히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는 학교와 학생들에게 언젠가는 보답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성심사진전’입니다. 그동안 모은 학교 관련 사진들을 전시하는 거죠. 그날을 위해 앞으로도 학교와 관련된 사진들을 차곡차곡 모을 계획입니다. 추억을 함께 나누는 일만큼 행복한 일이또 있을까요? 전주시에 사진을 기증한 이유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 ‘성심사진전’에서 많은 분들과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진상훈(72) 어르신은 37년간 전주성심여자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학생들과 학교에 대한 애정으로 모은 사진들로 사진전을 열고 싶은 꿈이 있다.
2020.09.22
#성심여자중학교
#전주종합경기장
#체육
#성심사진전
#사진
멋진 하루
달하, 전주에서 정읍까지 비취오시라!
조선왕조실록과 정읍 선비‘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이름 붙은 객사와 경기전이 없었다면, 전주는 돈냥이나 좀 있는 그저 그런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좌우익 양 날개를 거느린 객사는 우람하고 부성의 맨 오른쪽에 자리한 경기전은 섬세하다. ‘전주 이씨’ 나랏님의 국성(國姓)이 태어난, 경사스러운 터이기에 경기전(慶基殿)이라 했다. 성전이나 궁전 등, 하느님이나 임금이 계신 곳에만 ‘전’을 붙인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 즉 임금의 초상화는 임금이니, ‘전’이다. 거기에다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자리한다. 조선왕조실록 말씀이다.임진년에 왜병이 쳐들어온다. 높은 양반들 먼저 피난하신다. 경기전을 지키던 9급 참봉 오희길과 유신은 실록과 어진을 지킨다. 공무원의 롤모델이다. 재난 대비 매뉴얼에 따라 태인의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게 토스한다. 두 분 다 정읍의 선비들이다. 폭서와 장마가 있었지만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정읍 내장산에서 1년 하고도 18일을 지켜 내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어지게 하니 그 아니 특별한가. 수레는 몇 대였을까? 과연 정읍으로 가는 길에 원평과 태인을 거쳤을까? 아니면 저쪽 구이를 돌아 산외 길을 택하였을까? 정읍의 두 선비는 자비로 말과 양식을 대며 보물을 지켜 냈다. 내장산의 용굴 은봉암이나 비래암에 몰래 모셨는데 첩자가 정보를 팔아먹지는 않았을까? 이 이야기는 왜 아직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였을까? 동학농민혁명과 경기전400년 후,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을 깬다. 올해 처음 제정된 국가기념일 5월 11일이 바로 그날이다. 장성 황룡강전투마저 승리한 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전봉준은 풍남문에 올라 전주부성을 조망한 뒤, 관찰사 집무실 선화당을 집강소로 사용한다. 열 받은 초토사가 관군을 이끌고 용머리고개에서 부성 안쪽으로 대포를 날린다. 정읍 가는 직행버스 간이 정류장에서 보이는 위쪽 언덕에서 말이다. 이런 이런, 경기전 경내까지 포탄이 날아든다. 전북 사람이면 이렇게 못 한다. 경기전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자 전봉준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편지를 쓴다.“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공북문을 열고 동학군이 부성을 빠져나간 후 120년, 지금 전라감영 복원이 한창이다. 새로 짓는 선화당은 시민들이 직접 활용하는 공간이면 좋겠다. 게서 전주대사습이 열려도 좋겠다. 정읍과 전주, 제대로 즐기기전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오셨다면, 일단 한옥마을이다.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이성계가 풍년가를 읊은 오목대에 서면 한옥마을의 기와지붕이 주욱 늘어섬을 볼 수 있다. 어두울 것 같은데 오묘한 밝음이 있다. 경기전에서 푸른 곤룡포 입으신 이태조를 알현한 다음에는 서쪽에 있는 최명희문학관에 들르시라. 전주의 얼인 ‘꽃심’을 써 내려간 혼불의 한 자락을 붙들 수 있을 터. 경기전과 전동성당의 고딕양식과의 대조에 홀딱 반한 이분들 모시고 내처 향교로 간다. 은행나무 시즌이면 더 좋다. 향교 가는 길에 영화 에 등장한 한옥 학인당을 들르는 것은 필수. 한옥에서 한잠 주무신 후에는 정읍으로 길을 잡는다.‘새 시상’이 오길 바라던 드라마 의 촬영지 ‘정읍 김씨집’을 찾아가는 길은 산외 방면 길이 좋다. 세트 아닌 진땡이다. 여기서 이참에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무성서원’까지 자동차로 15분이면 족하다. 서원의 태극 문양은 사진발을 잘 받게 만든다.내장산 가는 길 전봉준공원에 서면 18.94m의 동학100주년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내장산은 사람 사는 동네에 이렇게 가까운 국립공원은 세계에 드물다. 설악의 단풍보다 보름은 늦게 찾아온다. 해서 정읍의 가을은 길고 아름답다.한겨울 눈이 올 때 내장산을 찾는 사람은 고수다. 깎아지른 듯한 은적암 가는 길을 ‘실록길’이라 한다. 그냥 차 타고 왔던 길로 훅 돌아가면 바보다. 정읍경찰서 앞에서 쌍화탕을 마셔야 한다. 중스푼으로 쌍화차 안에 든 밤을 건져먹는 맛을 정읍 바깥에서는 흉내도 못 낸다. 한 끼 자신 듯 든든하다.이제 포털에 접근하면 왕조실록은 누구나 키워드별로 검색이 가능하다. 정읍 선비가 없었다면 조선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을 것이다. 달님이 노피곰 도다샤 전주와 정읍을 서로 비추인다. 그 손길이 앞으로 남원에서 고창에서도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글 신귀백 | 영화평론가신귀백 씨는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이다. 장편다큐 감독으로, 전북독립영화제・무주산골영화제・전북비평포럼에서 활동했다. 저서로 , 가 있다.
20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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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서원
#내장산
#동학
전주 기린봉
묵묵히 거기 있어 더욱 빛나는 산
시리도록 아픈 기린봉의 추억기린봉 이야기를 하자면 30여 년 전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작고 아담한 시골 마을. 산으로 가로막힌 버스 종점이 있었고, 종점 뒤편에 허름한 한옥이 있었다. 그 뒤채에 자리한 2만 5천 원짜리 사글셋방이 참으로 가당찮지만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여러 번 답사 끝에 얻은 안전 가옥, 나의 자취방이었다. 그곳이 바로 기린봉 아래였고, 주인집 할머니와 나와의 동거는 거의 1년을 넘겼던 것 같다.시절은 하 수상하였다. 기린봉 산 그림자에 복학생 운동권의 삶도 녹록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주신 등록금은 분실로 위장하고 선거를 준비하는 후배의 등록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나는 휴학을 했다. 멀리 대륙에선 이념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자고 나면 대학생들의 죽음이 연일 지면을 달구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열사 정국이었다. 참으로 시리도록 아픈 기린봉 시절이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그곳을 떠났고, 가슴이 답답할 때 하릴없이 올라 지친 심신을 달랬던, 내 청춘이 잠시 머물렀던 기린봉은 오랜 세월 기억 저편 아득한 곳에 구겨 넣고 잊고 살았다. 이두황 단죄비를 세우다20여 년 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을 맡으면서 기린봉과 다시 만났다. 한때 시대에 울분한 한 청춘의 호흡을 고르게 해주던 기린봉이 아닌, 다소 불편한 기린봉으로…. 기린봉 초입 양지바른 언덕에 누워 있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의 무덤 때문이었다.이두황은 동학 농민군 진압부대의 우선봉장으로, 명성황후 살해의 일본군 길잡이로, 정미 호남의병에 대한 ‘대토벌’ 작전의 혁혁한 공로자로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다. 어이없게도 기린봉이 품은 성정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기린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성을 내려다보며 죄인 이두황의 행각을 묵묵히 지켜본 기린봉인데 말이다. 기린봉은 그들에게도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좋은 안식처로 보였던 모양이다. 결국 이두황 사후 100년이 되던 해인 2016년에 이두황 단죄비를 기린봉 사거리에 세웠고, 구천을 중음신으로 떠돌던 농민군과 의병들의 혼백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열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비로소 기린봉이 온전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기린봉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무념 무상 비로자나불의 모습으로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인간들에게 늘 곁을 내어주었다. 샐쭉하게 토라진 가시내의 모습도, 속세의 들뜬 허영과도 애당초 인연이 없이, 없는 듯 있는 듯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鎭山)이 아니면 어떻고 주산(主山)이 아니면 어떠리. 기린토월(麒麟吐月), 우백호(右白虎)의 거추장스러운 장삼도 부담스럽게 느끼며 벗어 버리고 싶은 것이 기린봉의 진면목 아니었던가. 일상의 삶조차 보듬어 주는 기린봉민족문제연구소와 전북민언련에서 같이 활동하는 정혜인 선배와 오랜만에 기린봉에 올랐다. 속살 드러내 놓고 솔향, 흙향, 풀향을 그윽하게 객들에게 풀어놓는 기린봉. 하찮은 미물조차도 함부로 내치지 않는 배려가 미덥다. 속세에 찌든 일상의 삶들에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다정하게 안아주는 산이 얼마나 있을까. 정상에 오르니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밟고 서서 저 넓은 세상을 보라 한다. 어떠한 금기도 없이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껴안으며 역사를 품어 왔던 순교자의 모습이다. 전주천 물기를 머금은 동고사 풍경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고, 저 멀리 모악산에서는 미륵이 걸어 나온다. 완산칠봉 등성마다 일자진을 친 갑오년 동학 농민의 함성도 들려오고, 변복을 하고 전주성 동문을 빠져나가는 전라감사 김문현의 줄행랑도 보인다. 남부시장 아낙의 흥정 소리도, 멀리 비비정 만경강 기슭을 거슬러 오는 만선의 황포돛배도 품 안에 들어온다.우리는 가까이 있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 같다. 기린봉이 딱 그렇다. 칭얼거리지 않고 묵묵히 거기 있음으로 더욱 빛나는 게 기린봉이다. 드러내지 않음이 드러냄이다. 마주 보면 서로 닮아 간다 했던가? 일망무제 호남평야의 넓은 들을 바라보다 스스로 넓어진 것이 기린봉이 아닌가 싶다.지짐지짐 가랑비가 내린다. 내려갈 채비를 서두른다. 맑은 가을날, 기린봉이 아중저수지의 물로 목욕하고 색색의 옷으로 꽃단장하는 날 다시 와야겠다. 글 김재호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김재호 씨는 2011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을 맡아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서고 있다. 사람과 역사를 위해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늘 분주히 살고 있다.
2020.09.09
#전주성
#기린봉
#이두황단죄비
코로나19로 달라진 삶의 풍경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지금, 여러분은 안녕하신가요?
집콕, 언택트(비대면), 온라인 학교, 무관중 공연….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풍경들로 가득하다. 시민들은 모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행동수칙을 따르며, 각자의 자리에서 불편한 일상을 감내하고 있다. 꽃과 식물을 키우며 마음의 면역력을 챙기고, 나만의 특기로 이웃들에게 사랑과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며, 길고 지루한 터널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다. 마스크 쓰고 아이들과 전주천 산책집에만 있어 답답해하는 아이들과 함께 전주천으로 산책을 나온 수진 씨 가족. 사람이 밀집된 도심은 조금 꺼려져 마스크를 쓰고 집 근처 가까운 산책로로 나왔지만 한 달 만의 외출이 그저 반갑다. 콧바람을 쐬며 자연 풍경을 감상하니 잠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흩어져야 산다, 조용한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점심시간도 색다른 모습이다. 마주 보고 식사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대신 한 줄로 앉아서 먹는 ‘조용한 일렬 식사’가 새로운 풍경 중 하나다. 전주시 공무원들 역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일렬 식사’를 실천하고 있다.지친 마음 치유해 주는 창밖 음악회 병원 공터를 향해 창밖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희망의 멜로디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지친 마음을 연주로 치유해 주는 전주시의 찾아가는 음악회가 그 주인공. 들려오는 선율에 맞춰 손뼉도 치고, “힘내세요!”라는 응원 메시지를 통해 서로를 격려했다. 집마다 배달되는 친환경 농산물 꾸러미 전주 지역 9만 명의 학생 가정에 친환경 농산물 꾸러미를 전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전주푸드통합지원센터와 자원봉사자들. 이들은 미등교 학생들에게 신선한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5월 초부터 매일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콩나물 기르며 마음 치유하는 어르신 “사람이나 콩나물이나 정드는 건 똑같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킬 무언가 필요했던 어르신은 콩나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금암노인복지관에서 준 콩나물 콩에 정성껏 물을 주니 그 정성에 보답하듯 콩나물이 쑥쑥 자라난다.K-리그 사상 첫 무관중 개막 오랜 기다림 끝에 전주성에 선수들이 들어섰다. 경기를 이끌어 가는 모습에서 무엇인가 허전함이 느껴진다. 전북현대모터스의 12번째 선수인 관객이 없는 탓이었을까. 덕분에 챌린지 세리머니로 화제가 된 이동국 선수, “힘든 시국에 의료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진정돼 팬들 앞에 서고 싶다”라고 희망했다.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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