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에 해당하는 글 27건
전주 그곳
전주에 길이 있다
조선왕조의 시작이자 끝, 조경단로
조선왕조의 시작을 알리다조경단로는 금암광장 사거리에서 전북대학교를 지나 송천동 어귀까지 반원을 그리며 이어진 길이다. 조경단(肇慶壇)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역으로,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경기전, 조경묘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한다.조경단은 건지산 자락의 완만한 경사에 자리해 삼엄한 호위를 받듯 사시사철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으며, 제사 때가 아닌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너른 터에는 의묘와 단소, 비각이 놓여 있으며, 경내를 감싸 안은 담장이 묘소를 지키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운 뒤 건지산을 각별히 지키게 했으며, 그 후 역대 왕들도 이곳을 정성을 다해 보호했다. 영조 때에 조경단 조성이 처음 논의되었으며, 고종 때인 1899년(광무 3년)에 1만여 평의 경내 주변에 돌담을 쌓고 동서남북에 각각 문을 두어 조경단을 조성했다. 고종 황제는 비석을 세우고 친필로 ‘대한 조경단’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는 전주가 대한제국 황실의 시원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관리하는 사람을 배치하고 매년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등 공들여 지켜 왔다.시간을 관통하는 정신을 지키다해마다 봄이면 조경단로를 따라 연분홍빛 벚꽃 터널이 열린다. 때를 같이하여 조경단도 모처럼 문을 열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백 명의 후손들을 맞는다. 매년 4월 10일에 열리는 조경단 대제는 조경단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잊지 않고 시조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지내는 제례 행사다. 전주 이씨 후손들로 이루어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주관으로 진행된다. 이 행사를 통해 조선왕조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깊이 되새기고 긍지와 자부심을 드높이며, 오랜 시간을 통과해 굳건히 이어 온 전통을 대대손손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사색과 휴식의 길을 밟다조경단로는 활짝 펼쳐진 책과도 같다.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읽듯 찬찬히 걷노라면, 오늘날의 전주를 일군 이들의 올곧은 정신이 걸음마다 전해져 온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 국악의 맥을 잇는 전북도립국악원부터 최명희 소설가의 묘역에 조성된 혼불문학공원, 그리고 건지산 숲속작은도서관과 생태숲 놀이터인 임금님숲, 장군봉, 오송제를 아우르는 건지산 둘레길이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와 문학의 정취가 길을 안내하고, 하늘 높이 솟은 편백나무 숲이 자연의 기운을 내뿜는다. 또한, 전라북도 어린이창의체험관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덕진공원, 덕진체련공원, 동물원까지 잔가지처럼 뻗어 있어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자주 찾는다. 이렇듯 조경단로 일대는 전주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조선왕조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와 조경단 조경단과 함께 전주가 조선 왕조의 본향임을 알리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조경묘(肇慶廟)가 있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인 경주 김씨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경기전의 북쪽에 있다. 1771년(영조 47년)에 권위 높은 형태로 건립되었으며, 창건된 이후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학적 가치 또한 큰 건물이다. 조경묘는 그 역사적 의미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조경묘의 중앙에 자리한 정묘 1동은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에 지정되었다.조경묘의 보물 지정에 힘입어 조경단 역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경묘와 조경단이 국가지정문화재로써 조선왕조 발상지 전주의 문화적 역량을 펼치는 데 기여할 내일을 기대해 본다.조경묘 |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2023.01.17
#조선왕조발원지
#조경단
#혼불문학공원
#가족나들이
뜻밖의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남고산성까지
후백제의 숨결 깃든 역사의 땅, 남고산성
산성천 돌담길에서 만나는 충경사와 삼경사잘 정비된 산성천 돌담길에는 산성마을 사람들이 심은 호박이며, 오이, 옥수수가 싱그러운 여름 한낮에 졸고 있고, 가재가 살 것 같은 시냇물은 천상의 화음을 내며 흐른다. 녹음 무성한 나무숲이 우거진 길을 시나브로 걸어서 도착한 충경사는 적적하다."선생님, 여기는 누구를 모신 사당이에요?""객사 앞길 충경로에 명명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이정란 장군을 모신 사당입니다."이정란은 임진왜란 때 전주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남고산성과 만경대 등에 복병을 배치해 고바야가의 침입을 막은 공로로 충경공(忠景公)이라는 시호를 얻은 인물이다. 대동사상을 주창했던 조선 시대 혁명가 정여립과 인척 관계다. 정여립의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만 내몰렸던 그는 오늘날 전주성 수호의 영웅으로 남아있고, 정여립은 신원도 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으니, 역사란 그런 것인가?산성천을 따라 조금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그림처럼 숨어 있는 절인 삼경사에 이른다.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산성인 남고산성(南固山城) 천경대 아래에 자리 잡은 삼경사 들목에는 비녀꽃이라고 불리는 옥잠화가 소담스레 피어 있고, 이 절에는 전북유형문화재 236호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남고산성에서 후백제 견훤을 기리다삼경사를 지나 한참을 걷다 보면 남고산성을 만나게 된다. 남고산성은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는 3,024m로 현재 출입시설인 성 문지와 성안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 있던 자리인 장대지(將臺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다. 남고산성은 견훤산성(甄萱山城) 또는 고덕산성(高德山城)이라고도 불린다.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朴崙壽)가 관찰사로 부임한 뒤 완성한 것이다.남고산성 자락 관성묘 부근에 남고진 관아가 있었고 개울 건너에 화약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관성묘가 있으며, 입구에는 하마비가서 있다. '대소인원을 막론하고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를 지나 돌계단 길을 오른다. 나관중이 지은 의 주인공인 관우를 모신 관성묘(관왕묘)가 이 땅에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며, '싸움터에 관우의 신령(神靈)이 나타나서 신병(神兵)으로 왜적을 쫓아냈다'고 소문을 냈다. 조선 정부에서 곧바로 서울에 남묘, 전라도 전주와 강진, 남원, 그리고 경상도 상주와 경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관왕묘를 세우게 됐다.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산성별장 이신문의 발기로 1895년에 건립된 관성묘를 5대째 대를 이어서 지키는 주인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여타의 절보다 더 많은 신도가 있어서 관성묘가 유지된다고 한다.만경대에 서서 전주의 넓은 품을 보다남고사로 오르는 성문 옆에 남고진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조금 가파른 돌계단 길을 오르면 만경대에 이른다.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우리인 만경대에는 동포루가 있었던 곳으로 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록(北麓)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북쪽으로 억경대, 남쪽으로 천경대가 있고, 그 가운데에 있는 만경대는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곳으로 날이 맑은 날에는 군산 앞바다까지 보인다는 이곳에 고려 말의 대학자인 포은(圃隱) 정몽주의 시 한 편이 남아 있다."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누나. 하늘 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고려 말에 전주가 본관인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雲峰面) 황산에서 왜구들을 크게 물리친 뒤 전주 동쪽에 자리 잡은 오목대(梧木臺)에서 전승의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피력하는 대풍가를 부르자, 종사관으로 함께 참석했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당시 서울인 개경(開京)을 바라보며 지은 시(詩)가 이 시라는 것이다.그러나 이성계가 양광(충청도)·전라·경상 삼도 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무찔렀던 때가 1380년이었는데, 정몽주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성계가 무사했을 리가 있었겠는가? 당시 정몽주의 마음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래라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 아닐까."선생님 저 처음으로 이 남고산성에 올랐어요."염정숙 씨의 말이다. 그럴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네 속담처럼 대부분의 전주 시민들이 이 남고산성을 잘 오르지 않는다."저기 보이는 완산칠봉, 저 산 아래에서 완산주(完山州)에 무혈 입성하여 도읍을 정한 견훤이 크게 외쳤지요."'내가 삼국의 시작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에 혁거세(赫居世)가 흥기한 고로 진한과 변한이 이것을 따라서 일어났다. …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권토(卷土)하여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처럼 비겁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宿憤)을 풀러 온 것뿐이다.'"견훤은 백제의 맥을 잇겠다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지었는데, 후세의 사가들이 전 백제 후백제를 나누기 위해 후백제라고 지었지요. 그때가 900년이었습니다.""아하, 견훤의 혼이 서린 곳이 남고산성이로군요."전주 시민들이 전주의 역사 속에 큰 발자취를 남긴 남고산성을 천천히 걸으며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을 회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 신정일 | 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과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 , 등 여러 책을 집필했다.
2021.08.24
#관성묘
#남고산성
#만경대
#산성천
#삼경사
#충경사
기획 특집
벽화 속에 감춰진 역사의 길
자만마을 옥류 마을
너무 유명해서, 덜 유명한 마을‘자만동(滋滿洞)’이라는 이름은 ‘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이라는 옛 노래에서 나왔다고 전하지만 ‘자만’은 ‘滋滿’ 또는 ‘子滿’으로 ‘자식이 많이 불어나다’의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이토록 풍요로웠으나, 우리에게는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 살게 된 마을로 많이 알려져 있다. 농사지을 땅도 없는 척박한 달동네에서 사람들은 고단하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은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대왕 이안사(李安社)가 나고 자란 곳으로 조선왕실의 성지이며, 이는 마을 한편에 단촐하게 서 있는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자만동금표는 이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나무를 베거나 몰래 묘지 쓰는 것을 금하는 표지석으로 1900년대에 고종이 만든 것이다. 자만마을의 이러한 역사는 ‘피우지 못한 오얏꽃’을 배경으로 한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 공의 초상화가 벽화로 남아 있다. 벽화마을로 유명해진 후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아졌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관광객들에게 자만마을의 벽화 외에도 역사적인 가치를 알려 다시금 마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를 바란다. 시민들에 의해 입혀진 알록달록 그림 옷 자만마을은 입구부터 눈에 띄는 벽화들로 가득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애니메이션 그림부터 다양한 캐릭터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사람들은 벽에 기대서서 기념 촬영을 하고, 골목골목마다 다른 벽화들을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골목마다 약간은 투박한 그림도 보이고, 아쉬운 캐릭터도 보이지만 이 모든 벽화들은 전문가가 아닌 자원봉사로 시민들이 동참하여 그린 것이기에 그 의미가 있다. 또한 투박하게 만들어진 계단, 시멘트를 손수 다져 만든 골목의 언덕들, 어릴 적에 봤던 작은 옥상의 밭 등을 만나보면 자만마을은 그저 예뻐 보이려는 벽화마을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색을 채운 마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권경섭 촌장은 자만마을의 벽화를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입혀졌다’고 표현한다. 이는 모두 2012년 마을 자체의 힘으로 시작한 마을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골목과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들이다. 색색이 화려하게 자리 잡은 벽화들은 어두웠던 골목길을 환하게 만들고, 주민들의 마음까지도 환하게 바꿔 놓았다. 그럼에도 반듯한 길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조금 불편한 길일 수 있고, 여전히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는 주민들에게도 낯선 관광객들의 방문이 때론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만마을은 6년이라는 열정의 시간이 천천히 빚어낸 마을인 만큼 그 안에 내재된 힘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된다. 자만마을에는 지역 대학생들이 만든 단체 ‘나을자만’이 있다. ‘나아질 자만마을’을 뜻하는 이 단체는 지역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꾸려졌으며, 청년들은 이곳에서 전시회,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잊히고 사라져 버릴 뻔한 작은 달동네가 마을 주민들과 청년들의 힘으로 ‘모두가 찾아오는 마을’로 변화한 것에는 벽화와 더불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끌어간 사람 냄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은 아닐까. 우리가 찾았던 그 날에도 마을의 낡은 벽화를 다시 칠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아름다운 청년을 만날 수 있었다. 소나무를 닮은 선비의 마음을 품은 곳, 옥류마을 자만마을을 내려오다 보면 바로 이어지는 곳이 옥류마을인데, 이 곳에도 현재 벽화가 입혀지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옥류마을에는 아직도 1970~1980년대의 나무 전봇대가 남아 있다는 것. 자만마을보다는 덜 번화하여 아직은 조용한 골목길이 인상적이다. 옥류마을의 꼭대기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서당 ‘옥류정사(玉流精舍)’ 지금의 ‘구강재’에 오르면 남천교와 청연루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는 목공예와 한지공예를 하는 주인에 의해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옥류마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학자가 있다. 고종 11년인 1874년 옥류동에서 태어난 금재 최병심 선생이다. 그는 한벽당을 처음 세운 월당 최담의 자손으로 간재 전우에게 수학하였고, 1901년 옥류동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어 ‘옥류정사(玉流精舍)’라 이름 짓고 후학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금재는 오목대에 올라 대성통곡한 후 7일 동안 단식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 옥류동을 벗어나지 않았고, 이후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옥류동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현재 금재 최병심의 묘와 옥동사(玉洞祠)가 아쉽게도 방치되어 있는 상태여서 추후 돌봄이 필요해 보였다. 천천히, 더디 가도 행복하게 한 걸음씩 가난한 달동네인 줄만 알았던 자만마을과 옥류마을이 조선시대 왕실의 기운이 흐르고 선비들의 곧은 기상이 자리한 학문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벽화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역사적 가치를 발굴해 내는 작업이 꼭 필요함을 깨달았다. 떠나는 마을에서 찾아오는 마을을 만들어낸 힘이 이제 벽화와 더불어 ‘역사를 풀어낸 스토리텔링’까지 함께한다면 자만마을과 옥류마을은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본다. 현재, 마을 입구의 표지판에는 마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나 국숫집, 까페 등을 ‘발자국’ 수치로 말해주고 있어서 정겨운 마음으로 골목길 산책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들이 모여 마을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자만마을과 옥류마을을 찾는 발자국들이 더 많아져 희망을 남기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이지선 | ‘잘 익은 언어들’ 책방 대표 전주시 송천동에서 ‘잘 익은 언어들’ 책방을 운영하는 이지선 씨와 자만마을공동체 권경섭 촌장이 함께 자만마을과 옥류마을 길을 걸었다.
2020.12.08
#한옥마을
#자만벽화마을
#자만마을
#옥류마을
#달동네
멋진 하루
바람 쐬는 길
흘러내리는 물길, 올라가는 오붓한 숲길
기억은 시간을 통해 과거를 그려내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 이모님 댁을 찾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1970년대 중반의 여덟아홉 살 무렵이었다. 당시 전주역은 우아동에 위치한 현재의 역사가 아니라 전주시청사가 자리 잡고 있는 옛 전주역이다. 서울을 가거나 여수를 가거나 고속버스보다는 철도가 원거리 여행의 교통수단이었던 기억 속의 전주역이 아직도 생생하다.여수로 향하는 전라선은 드물지 않게 터널을 만난다. 터널은 캄캄한 밤과 겹쳐진다. 여수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거리가 멀고, 그곳으로 향하는 곳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모르는 소년의 아득함처럼, 캄캄한 터널은 아직도 먼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그 옛날 전주 동산동 방면으로는 덕진역이 있었고, 남원 방면으로는 남관역이 있었다. 슬치 넘어 관촌으로 향하는 기차들 중에는 신리역에서는 서지 않아 도 남관역에서는 꼭 서야만 하는 열차도 있었다고 한다. 강원도 태백만큼 험악하지 않지만 증기기관차로 슬치고개를 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운 좋으면 하루에 두 번, 어떨 땐 그 이상 잔뜩 숨을 몰아쉰 채 슬치를 넘어야 하는 기차의 전진기지가 남관역이었다. 전주의 남쪽 관문 남관역의 존재 이유였다.마흔 중반 이하의 젊은 세대에겐 전북대 앞에 철길이 있었고 전주시청이 전주역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한벽루 아래 터널이 기찻길이었다는 사실은 어렴풋하게 들었을 법하지만 사십 년이 채 되지 않는 전주를 그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듯하다. 지금의 전주역을 지나 신리로 새롭게 길이 난 게 1981년 5월이기 때문이다.철길은 그렇게 한벽루 밑을 흐르고 옛 전주역에서 출발하는 전라선은 한옥마을을 오른쪽에 끼고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를 지났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오목대와 이목대가 별개로 떨어진 언덕 위의 정자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승암산 아래 능선에 나란히 존재했다. 전라선이 뚫리면서 철로로 인해 승암산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후일에 기린대로가 뚫리면서 거리가 더 넓어졌다. 확연하게 분리된 공간은 본래 한 몸이었다. 하필이면 한벽루 아래로 철길이 났을까 싶지만 운명은 한벽루 아래에 터널을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주천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 철길이 되었다. 터널을 바로 지나면서 좌측에 자리한 전주 자연생태관은 철로가 있던 시절엔 철길 옆 오막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철길로 인해 고립된 삶을 살던 터전이었다. 이 길가에 전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고조인 목조의 고향을 찾아와 왕업의 다짐을 내보였던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다. 1800년대 초 순교자가 처형당했던 마당이 지금의 전동성당이었다. 순교자가 처형된 자리에 전주성을 지탱하고 있던 돌들로 프랑스 신부에 의해 1900년대 초에 전동성당이 지어졌다. 그리고 처형된 순교자들이 치명자산에 하나둘 안장되면서 치명자산은 세계적인 성소가 되었다. 1970년대 이목대를 지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풍남동 일대의 한옥마을 보존이 이뤄졌다고도 한다. 그것이 오늘의 한옥마을로 이어졌으니 철길이었던 이 공간은 수백 년의 역사를 여러 갈래로 담고 있다. 중세 봉건왕조의 창업과 구한말 왕조의 답답한 마음, 그리고 천주교의 피의 역사와 근대문명에 우왕좌왕하던 전주 유림들의 철로에 대한 완고한 반감과 후회가 담겨 있으며 그것이 지금의 모습과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바람 쐬는 길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지금은 이곳을 ‘바람 쐬는 길’이라 부른다. 한벽루 아래 터널로부터 시작해 색장마을 3.4km가량의 구간이다. 철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길에는 나무 터널이 시원하게 드리워져 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자전거로 느리게 달리기 딱 좋은 곳이다. “전주 사람 중에 이 길을 얼마나 찾아보았을까요?”라는 질문에 김 팀장이 대답한다. “아마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 아니고서는 손에 꼽을 것 같습니다. 이름 그대로 바람 쐬기에 딱 좋은 공간이고 여러 가지 보고 느낄게 참 많은 길인데 말입니다. 색장마을 구간과 은석교 너머 신리로 향하는 자전거 도로가 완성되면 편백나무를 쭉 심어 나무 터널로 만들어도 참 좋겠어요. 이 구간만 올해 완성되어도 빼놓지 않을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라고 덧붙인다. 완주군 상관면 신리와 전주시 색장동 구간 중 이어지지 않은 구간을 전주시와 완주군이 함께 자전거 도로로 만들고 있다. 이 도로가 완성되면 한벽루부터 왕복 13km가량의 전주천을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게 된다. 한옥마을 이목대 아래나 향교 아래 또는 전주자연생태관에서 공영자전거를 빌려 이 코스를 도는데 한 시간 남짓 달릴 수 있는 훌륭한 자전거 코스가 될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어 시간 달려볼 만한 길이다. 좀 더 욕심내 신리를 지나 한일장신대를 지나 왜목재 너머 구이로 돌아오거나 화심 방향으로 돌아오면 출발점으로부터 30km 조금 넘는 훌륭한 라이딩 코스가 된다. 시간을 간직한 옛길, 옛 기억 사이에서 도시가 변하면서 옛길은 무용지물이 되고 방치되기도 한다. 광주에서 경상도로 이어지는 경전선 옛 철길은 ‘푸른길’이라는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북한강변 기찻길은 한강 자전거 도로로 훌륭하게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옛 공간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대한 개념이 약하던 때, 새로운 철길을 내면서 기린대로와 바람 쐬는 길로 이어지는 옛 전라선 철길을 배려해 줄 여유가 그 시절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덕진광장, 전주시청사 주변, 바람 쐬는 길에는 철로로서 기능했던 옛 기억을 담아둘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인다.언뜻언뜻 스치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지만 말고,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되 묵묵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구조물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고민이 이뤄졌으면 싶다. 글 김길중 | 한의사김길중 씨는 한의사이자 전주 생태교통시민행동 공동대표이다. 전주시 자전거 다울마당 위원으로 활동했다.
2020.12.07
#전주역
#한벽루
#자전거 도로
전주-군산 시간여행
근대와 현대 사이 시간 위에 펼쳐진 역사를 만나다
아득한 기억 속의 보물창고“햇살이 아프도록 따가운 날에는… 난 거기에 가지.”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이 걷히고 며칠 만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전주에서 광역투어버스를 타고 군산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단 두 장의 앨범으로 전설이 되어버린 포크듀오 ‘어떤날’의 노래다. 군산은 외갓집이 ‘있었던’ 곳이다. 굳이 과거형을 쓴 이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셔서 이젠 나에겐 외갓집이라는 장소성이 사라진 탓이다. 외갓집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의 맞은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할머니는 조그마한 선술집을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내항에 배가 들어왔고, 배가 들 때마다 밀물처럼 선원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그들에게 할머니는 막걸리와 음식을 파셨다. 외갓집은 나에게, 선원이 주고 간 바나나와 미군PX에서 흘러나온 온갖 초콜릿과 사탕을 맛볼 수 있었던, 일종의 보물창고였다. 아픈 식민지의 기억, 군산근대역사문화거리아득한 기억을 더듬다보니 금세 군산 경암동이다. 철길이 동네를 가로지르고 있어서 유명해진 경암동은 사실 묘한 경관을 지닌 곳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드물고 살림집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도 많고 가게가 많이 들어섰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는 곳은 지번으로 ‘장미동’이다. 어렸을 때 나는 단순히 외갓집의 동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쌓을 장(藏)에 쌀 미(米) 자를 쓴 이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수탈되던 쌀이 항상 쌓여 있었던 곳이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그래서 군산 구도심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은행과 나가사키18은행, 군산세관과 미즈상사 등 식민지 수탈의 거점으로 쓰였던 건물들뿐 아니라 일본인이 거주하던 집들도 많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곳이 히로쓰 가옥과 동국사다. 히로쓰 가옥은 전형적인 일본 무사의 집 형태를 지녔다는 점에서, 동국사는 현재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일본식 사찰 중 하나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최근 군산시는 이 건물들을 식민지시대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재조성하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가 다르게 거리가 변하고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일본식 전통 가옥, 군산 히로쓰 가옥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유산, 군산 신흥동에 위치한 히로쓰 가옥은 일제강점기 포목점과 농장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목조 주택이다. 근대 역사를 한옥으로 새긴 공간, 전주한옥마을 좀 걸었다고 피곤해졌는지 전주까지, 송재학의 시를 빌자면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어” 순식간에 왔다. 관광지로 개발된 후부터는 전주한옥마을을 자주 가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고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들이 하나씩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주한옥마을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주를 처음 방문하는 손님이 오면 나는 그들이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에 서서 풍남문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는 조선 왕의 초상을 모신 경기전과 천주교인이 최초로 순교한 곳인 전동성당이 바로 코앞에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도 기막힌데, 일제에 의해 전주성곽이 허물어질 때 나온 돌로 전동성당을 지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막히다는 설명을 해준다. 한옥마을이 현재의 모양을 갖추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이다. 웨딩거리라 불리는 중앙동 일대가 중심 상가로 조성되고 풍남동에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면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교동 인근에 터를 잡아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중앙동과 풍남동, 교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한옥부터 해방 이후에 지은 생활 한옥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공간이다. 가히 근대 100년의 역사를 한옥으로 새긴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선비촌이기도 하다. ‘정승 열 명이 왕비 한 사람만 못하고, 왕비 열 명이 산촌의 선비 한 사람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 선비는 각별한 대우를 받은 존재였다. 성리학적 이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라고 볼 수 있는 선비가 집단으로 모여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한옥마을은 달랐다. 금재 최병심, 고재 이병은, 강암 송성용, 성당 박인규 등 근현대 호남유학의 대를 잇는 큰 학자들이 모여 살았고, 그분들이 생활했던 집과 후학을 양성했던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전주향교가 위험해지자 전북 각지에 살던 유학자들이 하나둘씩 향교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기린대로를 중심으로 이목대 쪽에는 금재가 후학을 양성했던 옥류정사와 성당이 살았던 구강재가 있다. 그리고 오목대 쪽에는 고재가 학문을 닦았던 남안재와 강암의 묵향이 담긴 아석재가 있다. 그러나 보통 관광객이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다니기는 쉽지 않다. 일단 정보가 부족하고 정보가 있더라도 골목골목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향교 옆에 있는 남안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지나쳤다. 고재의 아들이자 향교전의를 지낸 이남안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2000년대 초, 처음 한옥마을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어 가끔 인사도 드리고 막걸리도 한잔씩 하곤 그랬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서야 들었다. 참 쓸쓸하다. 나에겐 또 하나의 장소가 사라졌다. 어떤 의미에서 전주한옥마을은 우리 역사의 ‘실루엣’일지도 모른다. 조선과 근대의 기억이 비극적으로, 때로는 혁명적으로 시작되던 그 어떤 순간을 저장한 세계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처럼 ‘햇살이 아프도록 따가운 날’이 또 오면 다시 ‘거기’에 가고 싶을 것 같다. 태조 어진을 모신 사당, 경기전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당이다. 경기전 어진은 현존하는 태조의 유일한 초상화로 전주에서는 해마다 태조 어진 봉안 의례를 행하고 있다. 글 이경진 | 문화기획자이경진 씨는 한때 시를 썼던 시인이지만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화기획자나 중간지원조직활동가로 더 알려져 있다. 현재는 완주문화특화지역조성사업 단에서 마을조사 총괄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2020.11.27
#광역투어버스
#근대역사문화거리
#전주한옥마을
#선비촌
#향교
행치마을에서 금상동까지
잿빛 빌딩숲에서 만난 생경한 세계
청정한 공기와 푸릇한 기운, 행치마을뜻하지 않게 나선 행치마을 나들이는 어김없이 뿌연 먼지 재앙이 동행했다. 이래서야 과연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기대는 잿빛 도심처럼 낮게 가라앉았다.지금은 레일바이크를 타고, 휴식과 커피를 즐기는 문화레저공간으로 탈바꿈한 아중역에서 뜻하지 않은 여정이 시작된다. 아중역을 무시로 지나치면서도 이제야 보게 된 ‘행치마을’ 표지석. 아중역 왼편으로 깊숙이 들어가 우회전을 하자마자 생경하고도 갑작스러운 풍경을 마주한다. 마치 오래전 보았던 일본의 애니메이션 처럼 급작스러운 세계다.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잘 정돈된 멋진 커피숍을 지나, 곧바로 마을이 시작된다. 겨울이 한창이라 화려하진 않아도 제법 울창한 뒷산을 끼고 마을길이 놓여 있다. 이곳이 아중역 바로 뒤편에 자리한 행치마을, 행정구역상 우아3동이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중역에서 전주가 끝나는 줄 알고 살았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다. ‘행치’라는 이름은 마을 뒤 고개에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 고개’라는 의미에서 행치(行峙)’라 불렸다고 한다. 행치마을은 조상 대대로 온돌 주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구들장을 채취하고 가공하던 마을이었다. 지금은 구들장으로 썼던 판석을 우물이나 담장, 축대 등에 사용하고 있는데, 여염집 아담한 담장에서 그 흔적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오래전 마을의 역사와 흔적을 오늘 가꾸고 남겨야 할 ‘유산’이라고 한다면, 행치마을은 이 구들장을 마을 문화의 표상으로 앞세워도 좋지 않을까. 고덕산 자락을 따라 행치봉에 오르자니 제법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행치마을의 또 다른 자랑인 편백나무숲이 산등선 초입에 빽빽이 조성되어 있다. 이 호환 마마의 습격에도 마을에 들어서자 청정한 공기가 폐부에 와 닿더니, 그래, 너희들 덕분이었구나. 등산로는 잘 닦인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정겹고 고맙다. 해발 270m 행치봉 정상에서 마주한 금상동과 전주 도심이 아스라하다. 금상동은 콩나물이나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같은 작물을 친환경 농법으로 생산하는 농업인들이 꽤 많다고 한다. 전주에서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나 하겠지만, 금상동과 같은 전주 외곽 지역 주민들이 전주 시민들의 먹을거리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을 만큼 꽤 많은 농가가 존재한다. 이제부터라도 ‘소비도시 전주’라는 섣부른 오해는 접어 두어야 할 것 같다. 행치마을에서 만난 어느 여성 농군의 비닐하우스에 잠깐 들르니, 마을에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마다하지 않고 푸르고 파란 것들의 반가운 인사가 아우성친다. 이 엄동설한에 봄동, 파, 쑥갓, 치커리 등등이 다품종 소량 생산되어 전주 사람들의 식탁에, 아이들의 급식에 오르고 있다. 한 소쿠리 가득 캐내 곧바로 샐러드나 겉절이를 해 먹고 싶은 생각에 하마터면 주인 허락도 없이 손을 댈 뻔했다. 재단법인 전주푸드통합지원센터가 이 마을 주민들에게 ‘기획 생산’을 의뢰하고, 서로 여러 협의를 거쳐 전주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내놓고 있단다. 전주푸드는 이곳을 생태교육장 삼아 수확철이면 심심찮게 아이들을 모아 행치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음식과 생태, 자연과 도시, 역사와 사람 이야기가 있는 가까운 도심 속 행치마을은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여 주고 교육하는 장으로 손색이 없겠다. 주말이면 막상 아이 손잡고 갈 곳이 없어 우물대다 하루를 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오늘 만난 행치마을은 보석 같은 발견이다. 전주 도심과는 1°C 차이가 난다는데, 이 청정한 공기와 푸릇한 기운이 그것을 웅변한다. 거짓말처럼 생경한 새로운 세계, 행치마을에 서 있자니, 저 건너 빌딩숲의 잿빛 풍경이 안쓰럽게 일렁인다. 전주푸드 농가전주시에는 3만여 명의 농업인들이 있다. 행치마을과 금상동은 전주의 대표적인 친환경 농업 지역으로 전주푸드 농가들이 많다. 또한,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농장 등 시설 재배 농가들이 많으며, 전주콩나물영농조합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농가들은 기획 생산을 통해 전주학교급식센터에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하고 있다. 패자의 역사, 그래서 더 서글픈 회안대군 묘행치마을을 돌아 소양 방면 국도에 접어들자 금상동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행치마을 뒤편, 낮은 분지처럼 조성된 논밭을 끼고 금상동이 있다. 이곳에는 친환경 농법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들이 터를 잡고 있다. 이곳에 전주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회안대군 묘가 있다. 회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조선조 개국공신이었다. 그러나 훗날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다섯째 아들 이방원, 그러니까 훗날의 태종과 세력 다툼에서 패하고 유배를 전전하다 결국 이곳에 묻혔다. 목숨을 건 정쟁을 치렀으나, 피를 나눈 형제의 마지막 도리였을까. 회안대군 묘에는 제법 웅장한 사당과 비각,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태종이 지관을 보내 음택(묘지) 명당으로 이곳 금상동을 택해 그와 그의 부인을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그 시대의 정세와 민심을 정확히 알 길이 없으니, 역사적 의미와 고증은 접어 두자. 다만 조선조 전주 이씨의 발원지로 역사, 문화적 의미와 사료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데 회안대군 묘 역시 중요한 모티브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와 권력에서 밀려난 자의 마지막 자리는 쓸쓸하다. 왕족인 만큼, 무덤의 위용이 예상보다 대단해서 더 그러했으리라.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미래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행치마을과 금상동은 지금의 사람들이 이곳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자면 오래 두고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시선과 필요가 이 마을의 미래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걱정했던 ‘멋진 하루’의 여정은 하루 동안의 단출한 나들이로만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 나와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과 부족함을 들여다보는 기회였고, 그것은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이어졌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이야기가 속살거리는 곳, 내가 사는 전주는 빌딩숲 사이에서 수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임을 깨닫는다. 잿빛 재앙이 몰아닥치는 날 휴식 같은 이곳을 다시 찾겠노라 생각하며… 회안대군 묘회안대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이다. 왕자의 난에서 패배한 회안대군은 스스로 본관인 전주에 내려와 20년간 거주했으며, 태종의 권고로 상경하던 중 사망해 금상동에 안장되었다. 회안대군 묘는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글 김회경 | 전주세계소리축제 홍보팀장김회경 씨는 월간 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문화판의 일꾼으로 청년기의 8할을 보냈다. 지금은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며 장년기의 8할 +α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2020.11.04
#행치마을
#레일바이크
#구들장
#농업
#회안대군
전주, 도시는 살아 있다
전국 양산 1호 친환경 수소 시내버스를 타다
AM 10:00처음으로 수소 시내버스를 타는 날 기사로 수소 시내버스를 처음 접했을 때, ‘일반 버스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줄어들자 기사로만 접했던 수소 시내버스를 직접 타 보기 위해 버스 정보를 찾아봤다. 제1호 수소 시내버스의 노선번호는 103번이고, 아중리 양묘장에서 송천동 농수산물시장 근처 종점까지 25.3km를 운행한다. 103번 버스는 2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그중에서도 수소 시내버스인 호남고속 1783번을 타기 위해 전주시내버스 앱을 이용해 운행 시간을 확인하고, 농수산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M 10:25보기에도 시원한 파란 버스 한참을 기다리니, 저 멀리 버스가 보인다. 파란색 외관에 현대자동차의 수소 시내버스 이름인 ‘ELEC CITY(일렉시티)’라는 하얀색 글자가 눈에 띄고, 이성계·한옥마을·전동성당·풍남문 등 전주의 주요 상징물을 활용한 외관 디자인이 눈을 사로잡는다. 버스가 도착하고, 올라타는 첫걸음에서부터 저상형 특유의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국에서 처음 시작한 시내버스 정기권으로 결제를 하고,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평소 일반 시내버스가 출발할 때 액셀을 밟으면 느껴지는 몸의 휘청임을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언제 출발했는지도 모르게 무진동, 저소음을 자랑하는 수소 시내버스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AM 10:40더 높고 넓은 버스를 즐겨요 수소 시내버스의 차량 내부는 다른 버스들과 달랐다. 현대자동차에서 일렉시티 이전에 만들었던 슈퍼에어로시티의 CNG(압축천연가스) 저상형 모델과 흡사했다. CNG 저상형 모델이 압축천연가스 탱크를 버스 천장 위에 탑재했던 방식을 인용해 수소 시내버스도 압축 수소탱크 다섯 개를 천장 위에 탑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슈퍼에어로시티 CNG 저상형 모델보다 천장이 60cm 가량 높아 내부는 훨씬 넓게 느껴졌다. AM 11:05진동과 소음이 사라진 편안함 수소 시내버스의 가장 큰 특징은 디젤 엔진 대신 연료전지 두 개가 탑재된다. 주행거리가 긴 상용차에 적합하도록 내구성을 높인 것이다. 특히, 이 차량은 전기를 동력원으로 하는 만큼 다른 버스와 다르게 진동이나 소음이 적었다. 브레이크와 액셀을 밟을 때는 승객이 서 있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부드러운 출발과 정차가 반복되었다. 자리를 옮겨 맨 뒷좌석으로 가 보았다. 엔진이 없으니 따로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 다리를 편하게 뻗을 수 있었다. 뒷좌석 역시 소음과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하고 진동이 없는 버스에서 광합성을 하듯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따스한 햇볕을 쬐다 보니 스르륵 잠이 올 뻔했는데 마침 양묘장 종점에 다다랐다. AM 11:55달리는 공기청정기, 수소 시내버스 버스에 하차한 뒤 103번 버스 기사 유상수 씨에게 전국 양산 1호 차 수소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소감에 관해 물었다.“전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진동이나 소음이 전혀 없고, 유해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공기 정화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좋다.”며 “전주에 하나뿐인 수소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보람되고 자랑스럽다”라고 덧붙였다. 오늘도 열심히 달리며 미세먼지, 오염물질을 정화해 주는 움직이는 공기청정기 수소 시내버스. 앞으로 더 많은 수소 시내버스들이 시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길 바란다.
2020.09.23
#수소시내버스
#달리는공기청정기
천년의 이야기를 품은 숲, 같이 걸을까요?
전주 마실길
천년의 시간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을 출발해 좁은목약수터 방향으로 걷다 보면 처음 마주하게 되는 길이 억경대에서 만경대 구간이다. 해발 630m 고덕산 초입에서 숲을 오르다 보면 낯선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여름의 숲, 우거진 녹음에 감춰진 흙빛 돌 산성이 이질적이면서도 정겹다. 숲길을 벗어나 남고산성을 걷는다. 돌을 이고 지고,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간절한 무게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붙잡는다.남고산성은 가팔랐으나 단아했고 산세와 어우러져 고즈넉했다. 남고산성은 삼국 통일 이후 남북국시대에 지어진 석축 산성으로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도읍이던 전주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견훤이 쌓았다 한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 부윤을 지낸 이정란이 왜군 방어를 위해 보수한 산성이다. 지키고자 하는 생의 간절함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이 숨겨 놓은 이야기가 장엄하다.천년전주 마실길은 남고산성을 지나 억경대와 만경대로 발걸음을 이끈다. 억경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가빴던 숨을 돌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전주 풍경에 가슴이 벅차다. 고층 빌딩에서 바라본 전주와는 천양지차. 그 풍경에 넋을 잃을 무렵, 문득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바람을 머리에 인 숲이 무겁게 일렁인다. 천길 바위 머리 돌길을 돌고 돌아,나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구월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 만경대를 지나 충경사를 향하면서 만경대 암각서에 새겨진 시구를 읊조린다. 새로운 나라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 포은 정몽주와 태조 이성계 그들에게 길은 우국과 충정이었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였다. 어디 그뿐일까? 관직에서 물러난 64세의 노부인 이정란이 다시 칼을 잡고 적진으로 뛰어든 길 역시 우국과 충정이었고 백성에 대한 애민이었다. 남고산성 숲에는 우국과 충정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천년전주 마실길, 그 숲 곳곳에 역사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싸전다리를 지나 초록바위에서 완산칠봉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마실길이라는 이름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마실길’이란 이웃에 놀러 가는 길을 뜻한다. 사부작사부작 걷는 걸음마다 삼나무 잎사귀나 편백나무 향이 밟힌다. 여름에는 매미 소리와 청량한 숲 내음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겨울에는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로 가득하다. 완산칠봉 오르는 길은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뿐일까? 장군봉 팔각정을 만나고 금송아지 바위의 전설을 듣고, 크고 작은 돌탑과 가람시비를 만난다.천년전주 마실길을 두른 숲은 천년의 삶과 문화와 역사를 안고 있다. 그 숲속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고목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 같다.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억경대-만경대-남고산성-충경사-매화봉-장군봉-완산공원-금송아지바위-용두봉-용머리고개-다가공원-완산교-매곡교-초록바위-남천교-국립무형유산원 기억을 재생하는 숲, 모악산 마실길과 삼천마실길전주 모악산 마실길은 모악산이 품은 길이다. 길은 마을에서 시작해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바람과 나무와 숲을 잇는다. 추동마을 입구에서 시작해서 고개 너머 독배마을까지 이어지는 12.3km의 구간 동안 위뜸에 살았다는 강릉 함씨와 비선골에 살았다는 김해 김씨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굿을 해 주는 무녀 쟁인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험한 산이 아닌 고즈넉한 평야의 숲길이 마을과 마을이 지닌 이야기를 품고, 뒤 숲이 지닌 이야기와 앞 숲이 품은 이야기로 마을 지도를 만든다. 천년전주 마실길의 숲이 삶과 역사를 품은 숲이라면 모악산 마실길의 숲은 옛 풍경과 잊힌 기억을 재생하는 숲이다.가래나뭇골(추동마을)을 지나고 원당마을을 지나 시앙골을 넘고 학이 날아든다는 학전마을을 지나 만나게 되는 노송 군락지는 곧게 뻗은 노송들이 푸른 하늘을 이고 우뚝 서 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숲이 아니라 하늘 향해 곧게 뻗은 노송들이 장엄한 분위기를 내뿜는 숲이다. 마치 마을과 마을을 지키고 사람과 사람을 지키는 장승처럼 우람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삼천 마실길은 마을과 역사를 잇는 길이다. 옛 전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 길이라고 할 수 있다.탐진 안씨의 집성촌인 능안마을에서는 탐진 안씨들이 대대로 마을을 지켜 온 흔적을 엿볼 수 있고, 능안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찾을 수 있다. 소란소란 걷다 만나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에도 한번 들러 보자. 탐진 안씨가 지킨 마을 이야기와 더불어 전주의 옛이야기에 빠져보는 즐거운 기회가 될 것이다. 모악산 마실길추동마을-원당마을-학전마을-완산생활체육공원-노송 군락지-신금마을-화정마을-봉암마을-독배마을-독배고갯마루
2020.09.11
#마실
#모악산
#정몽주
숲에서 체험하고, 놀며 배운다
전주 야호 아이숲
편백 향 가득한 숲속 놀이터, 임금님숲계절에 상관없이 숲속의 모든 자연물을 장난감 삼아 자연 속에서 놀며 배우는 숲속 놀이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시조인 이한 공의 묘소, 조경단 인근에 위치한 임금님숲이다. 전주 ‘야호 아이숲’ 1호로 조성된 임금님숲은 잡관목 등 장애물이 없어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기 최적의 장소. 나무 그네, 나무 실로폰 등 자연 친화적인 놀이기구로 마음껏 뛰놀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아이들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만든다. 더욱이 이곳은 자연 항균에 탁월한 편백나무로 대부분 숲이 구성되어 우리 아이들 아토피 완화에도 효과 만점이다.주소│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640-8(조경단 주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떼구르르 솔방울숲녹색 풀 속에 노란 들꽃 꽃내음이 향기롭게 펼쳐지는 떼구르르 솔방울숲. 숲속 놀이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길쭉하고 둥그런 솔방울이 긴 끈에 매달려 반갑게 방문객들을 맞이해 준다. 이곳에는 아담한 생태연못도 있어 작은 생명들의 소중함을 아이들이 현장에서 직접 배울 수 있다. 더불어 오두막과 나무 의자가 휴게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어 지친 아이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 주기 딱 좋다. 단, 여름철에는 모기가 많으니 진입로에 구비된 해충 기피제 자동분사기는 잊지 말고 꼭 뿌리자.주소│전주시 완산구 천잠로 3038 모든 날이 좋았다, 신기방기 도깨비숲전주 완산칠봉 삼나무 도깨비숲에 아기자기한 눈, 코, 입이 달린 나무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존에 있던 운동기구들이 통나무 흔들다리와 그네 미끄럼틀로 멋지게 탈바꿈해 숲속 놀이터를 찾는 아이들을 반갑게 맞고 있다. 양은 냄비를 뒤집어 만든 띵까띵까 악기와 자연물을 이용해 만든 근사한 악기도 만날 수 있다. 또, 지치지 않고 산 중턱쯤 가다 보면 마치 커다란 보물을 발견한 듯 정말 큰 바둑판을 만난다. 커다란 바둑판 위에 검은 돌멩이와 흰 돌멩이로 오목을 두며 온 가족의 행복이 충전되는 기쁨을 누려보자.주소│전주시 완산구 완산3길 31-13 다람쥐를 만나러 가자, 꼬불꼬불 도토리숲푸드득, 하는 날갯짓과 새들의 지저귐이 즐거운 전주 서곡지구 도토리숲. 이곳은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의 싱그러움을 더욱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꼬불꼬불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타나는 제법 큰 외나무다리, 통나무로 만든 징검다리는 아이들에게 도전의식을 갖게 만드는 놀이터다.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톡톡’ 도토리를 굴리는 다람쥐도 행운처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숲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배운다. 이번 주말엔 사랑 넘치는 숲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는 건 어떨까?주소│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1578 베짱이처럼 놀아 보자, 띵까띵까 베짱이숲울창한 활엽수림이 쭉쭉 뻗은 하늘 아래,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건 단연코 여름 숲 사이 바람을 가르는 짚라인이다. 짚라인을 타는 아이들의 우렁찬 ‘야~호’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린다. 체련공원 화장실 위쪽으로 50m만 가면 한눈에 들어오는 띵가띵가 베짱이숲은 과도한 시설물 설치는 지양하고, 최대한 자연물을 활용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또한, 놀이터 말고도 가까이에 전주동물원이 있으며, 전주에서 유일한 숲속 작은도서관도 만날 수 있다. 맑은 공기 속에서 뛰놀고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된다.주소│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640-8(동물원 주차장옆) 딱정벌레와 여름 나기, 딱정벌레숲도심에서 보지 못한 신기하고 재밌는 곤충을 만날 수 있는 숲. 동서학동 남고사 부근에 자리한 자연놀이터 딱정벌레숲은 봄부터 가을까지 아이들에게 최고의 자연학습장이다. 딱정벌레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인 딱정벌레숲에서는 참나무, 키가 큰 리기다 소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아이들은 숲에서 흙을 밟고 자유롭게 뛰어놀거나 자연물을 모으고 관찰하면서 창의력이 발달한다. 딱정벌레숲 체험 장소까지 진입로가 오르막길이라 떠나기 전 얼음물은 필수!주소│전주시 완산구 남고산성1길 33-31(남고사 입구) 오늘은 내가 숲의 주인공, 야호인후공원 유아숲체험원인후공원 시사제 일원에 자리 잡은 전주시 최초 ‘유아숲체험원’. 참나무 군락지에 수목과 자연 재료를 활용한 고래터널, 통나무 건너기 등 40종 81점의 숲 놀이 시설을 설치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으로 가꿔 가고 있다. 유아숲체험원은 오전과 오후로 시간을 나눠 하루 최대 2개 기관만 이용할 수 있다. 또, 유아숲 체험 시설 전문가인 ‘유아숲지도사’가 더 즐겁고 알차게 숲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유아숲지도사의 도움으로 아이들은 숲에서 허클베리 핀이나 톰 소여, 타잔이나 로빈훗이 되어 멋진 상상의 나래를 편다. 올여름, 아이들 데리고 유아숲체험원을 방문해 숲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마음껏 뛰놀게 하면서 오감을 발달시켜 주자. 주소│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1가 산4-6
#야호
#놀이숲
#놀이터
#편백
#솔방울
달하, 전주에서 정읍까지 비취오시라!
조선왕조실록과 정읍 선비‘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이름 붙은 객사와 경기전이 없었다면, 전주는 돈냥이나 좀 있는 그저 그런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좌우익 양 날개를 거느린 객사는 우람하고 부성의 맨 오른쪽에 자리한 경기전은 섬세하다. ‘전주 이씨’ 나랏님의 국성(國姓)이 태어난, 경사스러운 터이기에 경기전(慶基殿)이라 했다. 성전이나 궁전 등, 하느님이나 임금이 계신 곳에만 ‘전’을 붙인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 즉 임금의 초상화는 임금이니, ‘전’이다. 거기에다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자리한다. 조선왕조실록 말씀이다.임진년에 왜병이 쳐들어온다. 높은 양반들 먼저 피난하신다. 경기전을 지키던 9급 참봉 오희길과 유신은 실록과 어진을 지킨다. 공무원의 롤모델이다. 재난 대비 매뉴얼에 따라 태인의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게 토스한다. 두 분 다 정읍의 선비들이다. 폭서와 장마가 있었지만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정읍 내장산에서 1년 하고도 18일을 지켜 내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어지게 하니 그 아니 특별한가. 수레는 몇 대였을까? 과연 정읍으로 가는 길에 원평과 태인을 거쳤을까? 아니면 저쪽 구이를 돌아 산외 길을 택하였을까? 정읍의 두 선비는 자비로 말과 양식을 대며 보물을 지켜 냈다. 내장산의 용굴 은봉암이나 비래암에 몰래 모셨는데 첩자가 정보를 팔아먹지는 않았을까? 이 이야기는 왜 아직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였을까? 동학농민혁명과 경기전400년 후,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을 깬다. 올해 처음 제정된 국가기념일 5월 11일이 바로 그날이다. 장성 황룡강전투마저 승리한 농민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전봉준은 풍남문에 올라 전주부성을 조망한 뒤, 관찰사 집무실 선화당을 집강소로 사용한다. 열 받은 초토사가 관군을 이끌고 용머리고개에서 부성 안쪽으로 대포를 날린다. 정읍 가는 직행버스 간이 정류장에서 보이는 위쪽 언덕에서 말이다. 이런 이런, 경기전 경내까지 포탄이 날아든다. 전북 사람이면 이렇게 못 한다. 경기전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자 전봉준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편지를 쓴다.“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공북문을 열고 동학군이 부성을 빠져나간 후 120년, 지금 전라감영 복원이 한창이다. 새로 짓는 선화당은 시민들이 직접 활용하는 공간이면 좋겠다. 게서 전주대사습이 열려도 좋겠다. 정읍과 전주, 제대로 즐기기전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오셨다면, 일단 한옥마을이다.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이성계가 풍년가를 읊은 오목대에 서면 한옥마을의 기와지붕이 주욱 늘어섬을 볼 수 있다. 어두울 것 같은데 오묘한 밝음이 있다. 경기전에서 푸른 곤룡포 입으신 이태조를 알현한 다음에는 서쪽에 있는 최명희문학관에 들르시라. 전주의 얼인 ‘꽃심’을 써 내려간 혼불의 한 자락을 붙들 수 있을 터. 경기전과 전동성당의 고딕양식과의 대조에 홀딱 반한 이분들 모시고 내처 향교로 간다. 은행나무 시즌이면 더 좋다. 향교 가는 길에 영화 에 등장한 한옥 학인당을 들르는 것은 필수. 한옥에서 한잠 주무신 후에는 정읍으로 길을 잡는다.‘새 시상’이 오길 바라던 드라마 의 촬영지 ‘정읍 김씨집’을 찾아가는 길은 산외 방면 길이 좋다. 세트 아닌 진땡이다. 여기서 이참에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무성서원’까지 자동차로 15분이면 족하다. 서원의 태극 문양은 사진발을 잘 받게 만든다.내장산 가는 길 전봉준공원에 서면 18.94m의 동학100주년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내장산은 사람 사는 동네에 이렇게 가까운 국립공원은 세계에 드물다. 설악의 단풍보다 보름은 늦게 찾아온다. 해서 정읍의 가을은 길고 아름답다.한겨울 눈이 올 때 내장산을 찾는 사람은 고수다. 깎아지른 듯한 은적암 가는 길을 ‘실록길’이라 한다. 그냥 차 타고 왔던 길로 훅 돌아가면 바보다. 정읍경찰서 앞에서 쌍화탕을 마셔야 한다. 중스푼으로 쌍화차 안에 든 밤을 건져먹는 맛을 정읍 바깥에서는 흉내도 못 낸다. 한 끼 자신 듯 든든하다.이제 포털에 접근하면 왕조실록은 누구나 키워드별로 검색이 가능하다. 정읍 선비가 없었다면 조선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사라졌을 것이다. 달님이 노피곰 도다샤 전주와 정읍을 서로 비추인다. 그 손길이 앞으로 남원에서 고창에서도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글 신귀백 | 영화평론가신귀백 씨는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이다. 장편다큐 감독으로, 전북독립영화제・무주산골영화제・전북비평포럼에서 활동했다. 저서로 , 가 있다.
2020.09.10
#객사
#경기전
#서원
#내장산
#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