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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라, 궁원록(宮院錄)
천년고성(古城)을 도라드니
전주부성
왕조의 기운이 서린 성곽을 따라 전주부성은 조선 시대 전주의 옛 명칭인 ‘전주부(全州府)’를 두르는 성곽을 말한다. 총 3.2km 구간이다. 백성들은 물론 전라감영, 경기전, 조경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까지 지켰으니 그야말로 ‘조선의 역사’를 수호했던 성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주부성은 고려 공양왕 1년(1388년) 전라관찰사 최유경 때 최초로 축조되었다. 야속하게도 일제 침탈 기간인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모든 성벽과 성문이 헐렸고 현재는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부성과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풍패지관. 시민들에겐 ‘객사’란 이름으로 더 친근하다. 이곳에 걸린 편액 ‘풍패지관(豊沛之館)’은 한고조의 고향 ‘풍패’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드러낸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후손의 예를 다하기 위해 조선 왕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주에 행차했다고 한다. 그때 이곳 풍패지관에 머물렀을까? 어디선가 태종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거리로 전주부성길을 찬찬히 걷는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펼쳐지는 영화의 거리, 근대 가옥들이 멋을 뽐내는 웨리단길, 한옥마을 주변 남부시장에 위치한 풍남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한옥마을, 시민예술가들이 모이는 동문예술거리까지 역사의 호흡을 느끼며 감상에 빠진다. 전주부성 거리 곳곳은 그 호흡을 타고 미래로 나아가는 중이다. 최근엔 성벽 윤곽이 규명되어 전주부성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지난 2021년부터 ‘객사길’을 비롯해 ‘흔적길’, ‘감성길’ 등 테마별 특화거리도 조성 중이다. 이를 통해 역사·문화·예술이 집약된 전주의 핵심으로 자리를 굳힐 계획이다. 언젠간 전주부성길이 역사와 문화를 거리에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명소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4.02.25
#전주부성
#천년고성(古城)
#왕의궁원
전주 문화유산
왕가 아이의 태를 보관한
예종대왕 태실 및 비 (睿宗大王 胎室 및 碑)
아이가 태어나 탯줄이 잘리면 그제야 비로소 엄마의 배속에 안녕을 고하고 세상에 하나의 생명체로서 오롯해진다. 이때 잘린 탯줄은 세상에 난 지 약 8일 정도가 되면 똑 떨어지는데 부모는 이때 떨어진 탯줄을 탯줄 도장, 탯줄 인형 보관함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보관하며 간직하곤 한다. 우리가 아기의 탯줄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문화는 어디서 이어져 온 걸까? 탯줄 보관 문화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조선의 태실 문화에 다다르게 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이 부여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탯줄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신분에 따라 보관 방법도 달랐는데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 하여 아이의 태를 석실에 보관하고 이를 태실이라 부르며 소중히 여겼다. 태실은 전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는 전주 경기전에 그 주인공이 있다. 경기전에 있는 조선 8대 임금 예종의 태(胎)를 보관하는 ‘예종대왕 태실 및 비’는 1578년 선조 때 완주 구이면 원덕리의 태실마을 뒷산에 자리 잡았다. 1928년 일제는 전국에 있는 태항아리를 서울로 모으기 시작하였고 예종대왕 태실 및 비는 그 환란을 피하지 못하고 훼손되고 만다. 이후 정세가 안정되고 나서 구이초등학교 북편으로 옮겨졌던 예종대왕 태실 및 비는 관리를 위해 지금의 경기전에 1970년 자리하게 된다.태실비는 거북이가 팔과 다리를 한껏 모아 가만히 웅크린 형태로 조각된 돌 위에 세워졌으며 윗부분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어 이 비의 주인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비의 뒤쪽, 사각의 두툼한 하대석 위에 항아리 몸돌이 얹어져 있는 태실의 모양은 마치 조선 초기 고승들의 부도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알고 보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새해에 경기전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예종대왕 태실 및 비를 먼저 찾아보는 건 어떨까.
2024.01.22
#태실
#태항아리
#예종대왕
전주사람, 전주 10미(味)
천하일미라 불리는 탱글함
전주 황포묵
청포묵에 노란 물을 들인 천하제일의 맛 황포묵의 주재료가 녹두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녹두는 연둣빛을 띄는 콩이고, 황포묵은 계란 노른자만큼이나 선명한 황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청포묵만 해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일 터인데, 굳이 치자로 노란 물을 들인 까닭이 궁금해질 것이다. 황포묵이 노란빛을 가지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먼저 문화적 이유를 살펴보면 예로부터 노란색은 가장 중요한 것을 상징해 왔다. 전통적인 오방색에서 황색이 중앙을 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황포묵이 묵 중에 왕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양학적으로 봐도 뚜렷한 이유가 있다. 동의보감에서 치자는 차가운 것을 다스리고 신진대사를 좋게 한다고 적혀있다. 녹두와 궁합이 아주 좋은 식재료라는 것이다.좋은 묵을 만드는 좋은 물황포묵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길고 지루하다. 먼저 녹두를 물에 담가 껍질을 벗겨낸다. 속살만 남은 녹두는 대여섯 시간 동안 물을 흠뻑 먹도록 불려야 한다. 예전 같으면 맷돌로 그 작은 콩알을 다 갈아낸 뒤, 다시 물에 담가 전분 앙금만 모아 낸다. 치자를 끓여 우려낸 색물을 섞어 빛깔을 내면 비로소 묵을 쑬 준비가 된 것이다. 녹두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식재료가 있으니 바로 물이다. 한옥마을 옆 자만동의 지명 중 ‘묵샘골’의 유래가 여기서 왔다. 조선 건국의 태조 이성계가 묵샘골의 쌍샘 우물 맛을 보고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청량감이 좋은 귀한 물이다. 물맛이 묵맛을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깨끗한 수질에 미네랄이 적절히 섞인 묵샘골의 쌍샘이야말로 황포묵의 주재료라 봐야 하지 않을까? 전주 황포묵이 천하일미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황포묵이 없는 비빔밥은 없다전주시내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비빔밥집들은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말한다. “전주 황포묵이 들어가지 않으면 비빔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비빔밥 중앙에 올라가는 노른자는 집집마다 특색에 따라 빠지기도 하지만 황포묵만큼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한 증언이다. 1950년대 비빔밥이 식당의 메뉴로 팔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약 70년의 시간 동안 자만동 묵샘골의 황포묵은 빠지지 않고 비빔밥의 고명으로 올라갔다. 전주 황포묵의 탱글 쫄깃한 식감은 다른 재료와 섞지 않아도 맛이 좋다. 가볍게 간장과 참기름만을 더해 무침으로 만들어 먹으면 입안에서 감칠맛이 터져나온다. 겨울밤이 길다면 찹쌀떡과 메밀묵 대신 황포묵으로 입의 심심함을 달래 보는 것은 어떨까.
2023.11.24
#천하일미
#황포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