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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
덕진교에서 조경단까지
알고 걸으면 더 잘 보이는 조선 역사를 만나는 길
덕을 지어 얻은 다리, 덕진교 옛날에 못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원님이 저승에 갔다 ‘덕(德)진이의 창고’에서 얻은 노잣돈 덕에 이승에 무사히 돌아오게 됐다. 그 후 노잣돈을 갚기 위해 방방곡곡 ‘덕진이’를 찾아 헤매다 한 주막에서 일하며 내(川)를 건너는 이들의 젖은 옷이나 버선 빨래를 해 주던 덕진이를 찾았다. 그간의 사정을 말하며 빚을 갚게 해 달라는 원님의 부탁을 한사코 거절하던 덕진이는 정 그러면 사람들이 옷을 적시지 않고 내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하나 놓아 달라고 했다. 그렇게 생긴 다리가 덕진교(德津橋)였다고 한다. 못된 원님이 선한 마음을 갖게 하고, 그 덕에 찾아온 복마저 남을 위해 베푼 덕진이의 착한 마음씨 덕에 생긴 다리라 하니 왠지 건너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내딛는 발걸음에 덕 한 걸음, 복 한 걸음 지으며 걸어야 할 것만 같다. 넉넉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걷기 좋은 이 길은 사실 몇 해 전만 해도 차와 사람이 함께 다니는 다소 좁고 위험한 길이었다. 전주시가 차량을 통제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으며 지금의 산책길이 완성됐다. ‘천년사랑둑길’이라는 이름처럼 걸으면 사랑이 퐁퐁 샘솟을지도 모를 일이니 혼자가 아닌 함께 걷는 것도 좋겠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와 함께 걷다 보면, 쓸쓸한 이 가을날이 햇살 눈부신 봄날처럼 따스하게 느껴질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바람이 콧잔등 간질이는 봄바람처럼 느껴질지 말이다. 덕진이의 설화를 들으며 산책하듯 걷는 덕진교를 지나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건지산 아래 자리한 덕암마을은 끝날 듯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 인상적인 마을이다. 겨우 사람 한두 명이 어깨를 마주하고 걸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은 마을을 촘촘히 이어 주고 있다.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만나는, 황극단덕암마을을 빠져나와 조금 걷다 만나게 되는 황극단. 이곳은 부러 찾으려 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아 마치 보물찾기 하는 기분마저 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황극단은 일제강점기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다. 한가운데 고종 황제 비를 중심으로 김구 선생 비, 순국 5열사 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비, 이석용 의병장 비가 자리하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 보면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황극단은 임실 출신 이석용 의병장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이 만들었다. 저승에 가서라도 일본을 꼭 망하게 하겠다는 굳은 다짐, 그리고 살아서 황제를 모시지 못했으니 황극단을 세워 선황제를 모시게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해방 후 8년간 행상을 하며 모은 돈과 논밭을 판 돈으로 건립한 것이다. 황극단이 건립된 사연을 알고 보니, 죽어서라도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이석용 의병장의 마음, 그리고 살아생전 나라를 위해 험난한 길도 기꺼이 걸어갔던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아쉬운 큰 의미가 있는 곳이 보물찾기 하듯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다소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황극단 계단을 내려왔다. 자부심을 안고 걷는 길, 조경단 조경단까지 가는 길은 하늘과 함께 걷는 것이 좋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걷는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저 멀리 하늘을 보며 걷다 보면 조경단을 미리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경단까지는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하지만 언덕에 자리한 까닭에 발길이 닿기 전에 눈길이 먼저 가닿는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서 조경단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비로소 조경단 초입에 들어선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길게 이어진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오르니 또다시 문이 나온다. 문 위에는 뾰족한 창살, 홍살이 촘촘히 세워져 있다. 악귀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제단을 가운데 두고 총 네 개의 문이 있는데 조선시대 그 신분에 따라 들어가는 문이 달랐다 한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로 경기전, 조경묘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고종은 1899년 건지산에 시조 묘역을 조성했으며, 이 시조 묘역을 조경단이라 명명하고 친필로 대한 조경단이라 써서 비를 세웠다. 이는 전주가 대한제국 황실의 시원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에 아쉽게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실제로 들어가 볼 기회가 적기에 아쉬움이 남지만 그렇기에 더욱 걷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라. 현재 전주시에서는 이곳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추진 중이니 말이다. 이러한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조경단이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자리매김하기를, 그리고 그럼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전주가 대한제국 황실의 시원지라는 자부심을 갖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러니 행여 조경단까지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섭섭한 마음은 잠시 잊고 그보다 커다란 자부심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보는 건 어떨까. 글 최수진 | 자유기고가최수진 씨는 잡지 기자를 거쳐 사보 기획자로 다양한 매체를 만들고 글을 써 왔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 전방위적인 글을 쓰고 있다.
2020.11.30
#천년사랑둑길
#덕암마을
#황극단
#조경단
전주의 꽃심
“당시 명륜학원 입학은 장원급제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김정순 어르신이 소개하는 선친의 명륜학원 졸업 사진
오로지 책과 학문밖에 모르던 아버지 선친께서는 명예나 물욕보다는 오로지 공부밖에 모르던 분이셨죠. 제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고서로 둘러싸여 있는 방 안에서 늘 책을 읽으셨어요. 종이도 귀한 때여서 벼루에 먹을 갈지도 않고, 밥상에 물을 묻혀 글씨를 쓰고 지우고 또 쓰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시조창에 능하셨고, 가야금도 잘 타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학문에 풍류에 두루 능한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듣기로는 선친께서 일곱 살 때부터 공부에 매진하셨다고 해요. 열 살 이후에는 고창 문수사와 선운사에서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도 한적한에서 책을 읽는 걸 즐기셨대요. 그러다 서른이 다 되어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성균관에 설치했던 유교 교육기관, 지금의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학원에 입학하셨습니다. 당시 각 도에서 국비로 한 명씩만 뽑는 유생에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대표로 뽑히신 거예요. 그렇게 명륜학원에서 3년간 수학하신 후 고향에 내려오셔서 고창군에서 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직보다는 그저 초야에 묻혀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더 좋아하셨대요. 광복 후에 전주북중학교에 재직하셨고, 6·25 전쟁 후에는 고향인 고창으로 내려가셔서 고창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셨습니다. 이리여자고등학교에서 퇴직하신 후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학을 강의하기도 하셨습니다. 일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수불석권(手不釋卷)’의 모습을 몸소 보여 주신 분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명륜학원 시절 기록들 당시 명륜학원은 각 도에서 유생들을 뽑았는데, 졸업 사진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한반도 지도 위에 졸업생들의 사진을 출신 지역에 맞게 배치했는데, 선친 사진은 전라도 부근에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도 밖으로 한자로 제6회 졸업 기념 2489년 3월 23일이라고 적혀 있어요. 2489년은 공자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는 공기예요. 그 공기를 서기로 바꿔 보면 1938년이 됩니다. 날짜 옆으로 있는 분들이 지금으로 치면 교수님이에요. 한복 차림은 우리나라, 양복 차림은 일본 교수들입니다. 아버지께 일본에서 명륜학원을 뺏어 가려 해서 학생들이 투쟁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화개사 대웅전 앞에서 찍은 화개사 소풍 기념사진에서도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교수들은 한복과 양복을 입고 있어요. 사진 한 장으로 당시 시대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구룡폭포 앞에서 찍은 금강산 탐승 기념사진에는 사연이 있어요. 당시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넜는데 아버지는 배를 타지 않으셨대요. 선친께서 3대 독자셨거든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머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실까 싶어서 차마 배를 탈 수 없으셨다 합니다. 선친께서는 책도 많이 남기셨는데요. 와 , 등은 전주시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는 전라도의 예술가와 기인 등 3,500여 명의 방대한 자료가 수록된 책입니다. 선친께서 쓰신 책들은 모두 무슨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기록하고 남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집필하셨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시기, 힘을 북돋울 자료가 되기를제가 3남 3녀 중 막내예요. 선친께서 마흔여섯에 늦둥이로 저를 보셔서, 유난히 예뻐해 주셨어요. 무릎에 앉히고 가야금을 타시던 선친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살아생전 선친을 참 좋아했고, 존경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늘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1978년에 돌아가셨으니 4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한순간도 선친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힘들었던 일제 강점기 시절 고창에서 한양까지 유학을 떠났고, 돌아와서도 평생을 학문 연구에 몸 바치신 분을 많이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고 속상했어요. 당시 명륜학원 입학은 조선 시대로 치면 장원급제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런 분이 더 날개를 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더라고요. 그리고 선친께서 처음 교편을 잡으신 곳이 전주북중학교여서인지 전주를 참 사랑하셨어요. 항상 전주를 생각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전주 시민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 선친의 유품들을 전주시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요즘 시기가 참 힘들잖아요. 저희 선친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열심히 살던 분들을 생각하며, 이 시기를 잘 극복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친의 졸업 사진 한 장이 큰 힘이 될 순 없겠지만, 그 시절 선조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으면 합니다. 그러면 광복이 온 것처럼, 더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김정순(69) 어르신은 오랜 세월 전주에서 활동해 온 국악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이수자다. 전주시 기록물수집공모전에 선친인 한학자 고 김봉문 선생의 명륜학원 졸업 사진을 기증, 최우수 기록물로 선정됐다.
2020.11.23
#기록물
#공모전
#명륜학원
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진안까지
세상의 모든 예술은 ‘수작’으로 어우러진다
아름다운 수작, 전주공예품전시관과 목우헌등잔 밑이 어두울 때가 있다. 지척에 두고도 그 매력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이 속담은 유효하다. 전주공예품전시관이 위치한 태조로를 거닐며 뜻하지 않게 늦가을의 햇살을 선물로 받는다. 길게 늘어선 회화나무와 간간 알맞게 서 있는 단풍나무 그리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방짜 유기 같은 그림자를 도량에 맞게 펼쳐낸다. 그 순간 나무의 그림자를 통해 제 존재를 드러내는 늦가을의 마지막 햇살이 마치 판소리의 한 대목처럼 반갑기만 하다. 전주공예품전시관 오목대 전통 정원 앞 작은 연못에 잠시 발길을 묶는다. 마침 연못에는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 단풍잎 몇 장이 수면 위 가을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옛날 전주 땅에 이름 붙이고 살았을 이름 모를 장인의 거친 손처럼 단풍잎이 유독 붉다. 작은 연못에서 단풍잎에 깃든 손 하나를 주워 든다. 붉은 단풍잎 하나를 주워 들고 옛사람이 새긴 무늬를 요모조모 상상하고 있을 즈음, 전주공예품전시관의 육중한 나무 대문이 빗장을 연다. 전주공예품전시관은 ‘손의 도시’ 전주의 수공예품 문화를 다각적으로 느끼게 하고 체험하고 판매하는 ‘수공예 종합 플랫폼’이다.여섯 채의 한옥 중 명품관과 판매관 사이 앞마당이 유독 눈에 환하다. 한옥에 산다면 이런 마당 하나쯤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이 불현듯 솟구친다. 명품관 옆에 전시된 까치호랑이 목공예품도 그 욕심에 한몫 더한다. 한옥 처마를 비집고들어서는 공짜 햇살을 오래 밟고 서 있다가 판매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판매관은 전국 수공예품 740여 종을 전시·판매하는 공간답게 눈요깃거리가 가득하다. 종류도 매우 다양하여 마치 수공예가들의 재미있는 수다를 한자리에서 듣는 기분이다. 어떤 수공예품은 굳이 그 쓰임을 모르더라도, 오묘한 기품을 선물하기도 한다.그런 뜻밖의 감정을 더 오래 간직하고 만끽하고 싶다면 곧장 명품관으로 향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명품관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가장 전주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만약 마음에 드는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오리무중 갈피를 잃는다면,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에게 설명을 청해보는 것도 좋은 수공예 감상법 중 하나이다. 나머지 명인명장관과 전시1관은 판매보다는 전시를 주목적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마침 명인명장관에 발길을 더 했을 때는 특별기획전 전시가 한창이다. 과거 조선의 사내들이 전장(戰場) 혹은 의례나 심신 단련을 위해 사용했을 활과 화살 앞에서 오목대 전통 정원 앞 작은 연못에서 만났던 동심원이 오랜 호흡을 붙든다.순간 명인명장관에서 쏘아 올린 화살이 전주공예품전시관과 지척에 있는 목우헌에 날아가 꽂힌다. 목우헌은 전주한옥마을 목공예 공방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장소다. 명인명장관에서 본 화살촉은 어쩌면 목우헌의 주인장인 김종연 명장의 손때 묻은 조각도가 되어 전통 목침과 다식, 약과 틀, 서각 등의 장식품을 그동안 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목우헌 공방에 놓인 한 쌍의 까치호랑이를 다시 보면서 전주공예품전시관과 목우헌은 어쩌면 처음부터 서로에게 아름다운 수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고 아득한 수작, 진안 손내옹기와 도통리 청자 요지전주가 등잔 밑이 어두웠다면, 진안은 멀고 아득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진안 백운면 평장리에 있는 손내옹기를 찾아가는 길에서 스치는 마령 뜰은 잘 빚은 옹기를 닮았다. 태초에 그 뜰에서 흙을 떠다 옹기를 구웠을 옹기장이들의 손은 과연 어떤 모양이었을까. 끝내 불을 이기고 돌아온 옹기를 마주하며 미소 지었을 그 표정은 홀연 어떤 빗살무늬토기를 닮아 있었을까.손내옹기의 주인장인 이현배 진안고원형 옹기장을 만난다. 그의 손끝에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라는 시간이 모두 한 옹기의 빛깔에 담긴다. 이현배 옹기장은 1993년부터 진안 백운면 평장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독자적으로 손내옹기를 빚어오면서 다양한 전시 활동을 기획하고 추진하기에 이른다. 특히 2018 평창올림픽에서는 ‘평화의 밥상’이라는 주제로 남과 북의 화합을 기원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단다. 요즘에는 아이들과 노인을 위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도 마음 한 조각을 내주면서 진안 전통 옹기에 스며 있는 옛 무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현배 옹기장과 몇 마디 대화를 섞다 보면 어느샌가 둘의 대화는 잔잔한 섬진강의 물줄기를 타고 흐른다. 어느 지점에서는 의미의 물살이 빠르고, 어느 지점에서는 대화의 물살이 한없이 느리다. 또 어느 지점에서는 징검돌을 놓을 수 있을 만큼 옹기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잔잔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그 대화는 마치 옹기를 굽는 전통 가마처럼 아늑하고 웅숭깊다. 물레를 왼발로 수없이 당기며 수시로 흙과 물과 침묵을 섞어 손내옹기의 넓은 어깨를 다듬어 나갈 때도, 그는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로 시간을 건넌다. “이 장독에 두른 띠를 눈썹이라고 불러요.” 그 말과 동시에 이현배 옹기장은 장독의 눈썹에 일곱 개의 점무늬를 연이어 찍어 낸다.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느냐고 묻는 물음에 그는 소리 없는 웃음만 빚어내며 특별한 의미는 없다면서 물레를 멈춘다.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말의 의미가 마치 1,000도가 넘는 불길을 견디고 나온 잘생긴 손내옹기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는 옹기를 굽는 가마 앞에서도 불을 넣을 때는 뜸을 들이듯 지긋이 지펴야 함을 재차 강조한다. 그래야 흙이 불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들릴 듯 말 듯 곁들인다. 마지막 인사 끝에는 진안역사박물관의 매사냥 특별전에 전시한 새 모양 토기에 관한 이야기를 곁두리로 전한다. 문득 생각한다. 흙이 한 마리의 새로 빚어져 비화하기까지는 얼마나 뜨거운 시간을 견뎌 내야 하는 걸까. 그 시간을 돌이키며 다시 텅 빈 가마 안을 들여다보니, 모든 옹기가 멀고 아득하게만 보인다.손내옹기를 빠져나와 성수면 중평마을에 있는 도통리 청자 요지를 찾는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은 도통리 청자 요지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함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득 이현배 옹기장의 ‘특별한 의미가 없다’라는 말이 순간 떠올라 한참을 혼자 웃는다. 어쩌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가마터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켜켜이 쌓아 온 ‘산산조각의 힘’일지도 모른다. 도통리 청자 요지 작은 느티나무 아래 무더기로 쌓여 있는 그 옛날의 청자 조각들을 보면서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라고 말하던 한 시인의 문장이 전주와 진안의 여행길을 이으며 오랜 수작을 걸어 온다. 글 김정배 | 글마음조각가, 원광대 교수진안 달구름 마을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살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글을 쓰고, 왼손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가장 무명한 예술가. 시평집 와 포토 포엠 를 펴냈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융합교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주공예품전시관
#목우헌
#손내옹기
기획 특집
장하고 귀한 손의 도시, 전주
수공예로 만나는 ‘일상+문화+예술’, 전주공예품전시관
전주 대표 수공예품 ‘온 브랜드’가 모인 명품관공예품전시관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 안내관부터 들러 보자. 안내관은 기존의 로비 개념이 아닌 편안한 사랑방으로 구성됐다. 은은한 조명 아래 마루 위 오방색 방석에 앉아 달라진 공예품전시관의 이모저모를 미리 만나 볼 수 있다. 안마당의 첫 번째 공간은 명품관이다. 이곳엔 전통과 현대, 기술과 예술이 만나 빚어진 명품 공예품들이 자리한다. 바로 전주를 대표하는 수공예 브랜드 ‘온 브랜드’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다. 온 브랜드 작품들은 우리의 전통과 의례 속에서 가깝게 쓰여 온 공예품들로,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공예품들이다. 대한민국 우수 수공예품이 한자리에, 판매관 전주공예품전시관 판매관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역 공예 작가들의 작품과 대한민국 우수 수공예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이곳은 전시와 함께 판매를 하는 곳으로 입점 심사를 거친 1,000여 종의 다양한 공예 상품이 진열돼 있다. 공예 상품들을 쭉 따라가다 보면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전통 소재를 활용한 일상 소품 하나쯤 소장한다면, 삶의 품격도 달라질 것 같다. 단아한 옻칠 머그잔, 현대 문양으로 변신한 청백자, 자유로운 굴곡의 유기(鍮器), 천연 염색을 한 멋스러운 침구, 한 땀 한 땀 손바느질한 덕에 더 튼튼한 패션 소품들은 주머니 속 지갑에 자꾸 손이 가게 한다. 명장의 솜씨를 만나는 전시관겨울 햇살이 아담한 마당을 건너 쪽문을 나서면 전시관과 체험관 한옥 동으로 이어진다. 공예작품 전문 전시 공간인 2개의 전시관은 전시 공간이 부족했던 지역 공예 작가들을 위한 곳이다. 공예 작가들의 작품 및 상품 전시, 전주공예품전시관의 특별한 기획전들이 펼쳐질 예정이다.전시관에서는 2월 18일까지 재개관 기획전으로 가 진행 중이다. 전주에서 활동하는 전통공예 무형문화재 최온순 침선장, 최동식 악기장, 유배근 한지발장, 김혜미자 색지장 등 명장 5인의 손길이 담긴 대표작들을 만날 수 있다. 최온순 침선장이 꼼꼼한 자수와 손바느질로 만든 왕의 옷, 울림통의 전통과 기술을 이어온 최동식 악기장의 거문고, 한지 탄생의 요람 전주에서 유일한 한지발 명인인 유배근 장인의 한지발, 한지 빛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통 가구에 들인 김혜미자 색지장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번 특별전은 긴 세월과 함께 축적된 전주 공예품의 아름다움과 공예품에 담긴 전주 장인들의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무료 수공예 체험해 봐요, 체험관체험관에서는 일반 시민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누구나 손쉽게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재개관을 기념해 무료로 진행되는 체험으로 ‘전통각자 인출체험’과 ‘신년소원트리 꾸미기’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전통각자 인출체험은 이맹호(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 장인의 목환봉에 잉크를 묻혀 한지로 인쇄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가정의 부귀를 빌고, 잡신의 접근을 막아 주는 것으로, 새해 복을 기원하는 체험이다. 무지갯빛 지우산으로 장식된 안마당전주공예품전시관 안마당에는 윤규상 장인의 지우산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주공예품전시관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손의 도시’ 전주를 알리는 작품 이다. ‘손은 제2의 언어로서 감정을 표현한다’는 작품 해설처럼 공예품전시관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손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작품 너머에는 정성어린 손, 창의적인 손, 인내하는 손이 숨어 있다. 모두 전주의 귀한 손들이다. 그 손에 감동하게 되는 공간, 공예품전시관은 방문객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전주공예품전시관 운영 시간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월요일 휴관), 전시관 운영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전주공예품전시관(063-282-8886~7)으로 문의하면 된다.
20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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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치마을에서 금상동까지
잿빛 빌딩숲에서 만난 생경한 세계
청정한 공기와 푸릇한 기운, 행치마을뜻하지 않게 나선 행치마을 나들이는 어김없이 뿌연 먼지 재앙이 동행했다. 이래서야 과연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기대는 잿빛 도심처럼 낮게 가라앉았다.지금은 레일바이크를 타고, 휴식과 커피를 즐기는 문화레저공간으로 탈바꿈한 아중역에서 뜻하지 않은 여정이 시작된다. 아중역을 무시로 지나치면서도 이제야 보게 된 ‘행치마을’ 표지석. 아중역 왼편으로 깊숙이 들어가 우회전을 하자마자 생경하고도 갑작스러운 풍경을 마주한다. 마치 오래전 보았던 일본의 애니메이션 처럼 급작스러운 세계다.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잘 정돈된 멋진 커피숍을 지나, 곧바로 마을이 시작된다. 겨울이 한창이라 화려하진 않아도 제법 울창한 뒷산을 끼고 마을길이 놓여 있다. 이곳이 아중역 바로 뒤편에 자리한 행치마을, 행정구역상 우아3동이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중역에서 전주가 끝나는 줄 알고 살았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다. ‘행치’라는 이름은 마을 뒤 고개에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 고개’라는 의미에서 행치(行峙)’라 불렸다고 한다. 행치마을은 조상 대대로 온돌 주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구들장을 채취하고 가공하던 마을이었다. 지금은 구들장으로 썼던 판석을 우물이나 담장, 축대 등에 사용하고 있는데, 여염집 아담한 담장에서 그 흔적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오래전 마을의 역사와 흔적을 오늘 가꾸고 남겨야 할 ‘유산’이라고 한다면, 행치마을은 이 구들장을 마을 문화의 표상으로 앞세워도 좋지 않을까. 고덕산 자락을 따라 행치봉에 오르자니 제법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행치마을의 또 다른 자랑인 편백나무숲이 산등선 초입에 빽빽이 조성되어 있다. 이 호환 마마의 습격에도 마을에 들어서자 청정한 공기가 폐부에 와 닿더니, 그래, 너희들 덕분이었구나. 등산로는 잘 닦인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정겹고 고맙다. 해발 270m 행치봉 정상에서 마주한 금상동과 전주 도심이 아스라하다. 금상동은 콩나물이나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같은 작물을 친환경 농법으로 생산하는 농업인들이 꽤 많다고 한다. 전주에서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나 하겠지만, 금상동과 같은 전주 외곽 지역 주민들이 전주 시민들의 먹을거리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을 만큼 꽤 많은 농가가 존재한다. 이제부터라도 ‘소비도시 전주’라는 섣부른 오해는 접어 두어야 할 것 같다. 행치마을에서 만난 어느 여성 농군의 비닐하우스에 잠깐 들르니, 마을에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마다하지 않고 푸르고 파란 것들의 반가운 인사가 아우성친다. 이 엄동설한에 봄동, 파, 쑥갓, 치커리 등등이 다품종 소량 생산되어 전주 사람들의 식탁에, 아이들의 급식에 오르고 있다. 한 소쿠리 가득 캐내 곧바로 샐러드나 겉절이를 해 먹고 싶은 생각에 하마터면 주인 허락도 없이 손을 댈 뻔했다. 재단법인 전주푸드통합지원센터가 이 마을 주민들에게 ‘기획 생산’을 의뢰하고, 서로 여러 협의를 거쳐 전주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내놓고 있단다. 전주푸드는 이곳을 생태교육장 삼아 수확철이면 심심찮게 아이들을 모아 행치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음식과 생태, 자연과 도시, 역사와 사람 이야기가 있는 가까운 도심 속 행치마을은 아이들에게 자연을 보여 주고 교육하는 장으로 손색이 없겠다. 주말이면 막상 아이 손잡고 갈 곳이 없어 우물대다 하루를 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오늘 만난 행치마을은 보석 같은 발견이다. 전주 도심과는 1°C 차이가 난다는데, 이 청정한 공기와 푸릇한 기운이 그것을 웅변한다. 거짓말처럼 생경한 새로운 세계, 행치마을에 서 있자니, 저 건너 빌딩숲의 잿빛 풍경이 안쓰럽게 일렁인다. 전주푸드 농가전주시에는 3만여 명의 농업인들이 있다. 행치마을과 금상동은 전주의 대표적인 친환경 농업 지역으로 전주푸드 농가들이 많다. 또한,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농장 등 시설 재배 농가들이 많으며, 전주콩나물영농조합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농가들은 기획 생산을 통해 전주학교급식센터에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하고 있다. 패자의 역사, 그래서 더 서글픈 회안대군 묘행치마을을 돌아 소양 방면 국도에 접어들자 금상동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행치마을 뒤편, 낮은 분지처럼 조성된 논밭을 끼고 금상동이 있다. 이곳에는 친환경 농법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들이 터를 잡고 있다. 이곳에 전주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회안대군 묘가 있다. 회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조선조 개국공신이었다. 그러나 훗날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다섯째 아들 이방원, 그러니까 훗날의 태종과 세력 다툼에서 패하고 유배를 전전하다 결국 이곳에 묻혔다. 목숨을 건 정쟁을 치렀으나, 피를 나눈 형제의 마지막 도리였을까. 회안대군 묘에는 제법 웅장한 사당과 비각,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태종이 지관을 보내 음택(묘지) 명당으로 이곳 금상동을 택해 그와 그의 부인을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그 시대의 정세와 민심을 정확히 알 길이 없으니, 역사적 의미와 고증은 접어 두자. 다만 조선조 전주 이씨의 발원지로 역사, 문화적 의미와 사료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데 회안대군 묘 역시 중요한 모티브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와 권력에서 밀려난 자의 마지막 자리는 쓸쓸하다. 왕족인 만큼, 무덤의 위용이 예상보다 대단해서 더 그러했으리라.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미래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행치마을과 금상동은 지금의 사람들이 이곳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자면 오래 두고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시선과 필요가 이 마을의 미래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걱정했던 ‘멋진 하루’의 여정은 하루 동안의 단출한 나들이로만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 나와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과 부족함을 들여다보는 기회였고, 그것은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이어졌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이야기가 속살거리는 곳, 내가 사는 전주는 빌딩숲 사이에서 수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임을 깨닫는다. 잿빛 재앙이 몰아닥치는 날 휴식 같은 이곳을 다시 찾겠노라 생각하며… 회안대군 묘회안대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이다. 왕자의 난에서 패배한 회안대군은 스스로 본관인 전주에 내려와 20년간 거주했으며, 태종의 권고로 상경하던 중 사망해 금상동에 안장되었다. 회안대군 묘는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글 김회경 | 전주세계소리축제 홍보팀장김회경 씨는 월간 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문화판의 일꾼으로 청년기의 8할을 보냈다. 지금은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며 장년기의 8할 +α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20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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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바이크
#구들장
#농업
#회안대군
전주 음식
왕의 술, 이강주
나라를 대표한 술 이강주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재료들로 술을 빚었겠지만 그나마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에 귀하디귀하던 울금, 전주 배, 봉동 생강 정도는 우리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왕이 마시던 바로 그 술, 이강주 이야기다. 이강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배(이)와 생강(강)이 들어가는 소주다. 누룩과 멥쌀로 빚은 약주를 증류해 소주로 만든 후 배, 생강, 울금, 계피, 꿀을 넣어 침출시켜 만든다. 배는 청량감이 좋아 술을 부드럽게 만들고 생강과 계피가 이강주 특유의 톡 쏘면서도 은은한 향을 완성시킨다. 거기에 울금과 꿀이 더해져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우아하게 감칠맛이 나는 이강주가 완성된다. 울금은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할 정도로 귀한 약재로 경기전이 자리한 전주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다. 이강주가 전주에서 빚어질 수 있던 이유다. 게다가 전주 배와 봉동 생강은 진상품이었다. 이렇듯 최고급 재료로 만든 이강주는 조선 3대 명주로 손꼽혀 사대부와 부유층의 가양주로 뿌리내렸다. 조선시대 상류사회 최고의 술이었던 이강주는 1882년 한미통상조약 체결 때는 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만찬에 올라 고종의 건배주로 쓰였다. 오늘 밤, 이강주 마시는 법이강주는 은은한 노란빛을 띠는데 생강의 은은한 향과 어우러져 마시기 전부터 입맛을 돋운다. 25도로 알코올 도수가 높은 편인데도 울금 덕분에 뒤가 맑다. 숙취도 없고 빛깔과 향기, 부드러운 맛까지, 술에 기품이 넘친다. 이런 까닭으로 ‘여름밤 초승달 같은 술’로 불렸다. 오래 묵힐수록 향이 깊어지며 시원하게 먹으면 더욱 좋다. 상큼하면서도 고소하고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이강주는 고소한 전 요리에 어울린다. 기름기 있는 부침개나 전을 먹을 때 배와 계피, 생강의 시원하고도 알싸한 맛이 느끼함을 잡아준다. 때문에 한국식 밥상의 반주로도 좋지만 기름진 서양 음식에도 잘 어울린다. 왕의 도시 전주를 구석구석 돌아본 여행자라면 오늘 밤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을 때 맥주 대신 이강주를 마셔 보자. 전통주에 익숙지 않은 여행자라면 한 번 먹어보고는 싶은데 병도 으리으리하고 술맛도 잘 몰라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이에게는 이강주 칵테일을 추천한다. 전통주 칵테일바 진주도가에 가면 잔술로도, 칵테일로도 즐길 수 있다. 직접 만든 생강 시럽과 계피 시럽, 편강과 민트 등을 넣어 만든 이강주 칵테일은 이강주 특유의 맛과 향을 잘 살려냈다. 이강주는 전주전통술박물관에서 구입할 수 있다. 알코올 25%를 기본으로 19%와 38%의 별도 제품이 있고 50㎖ 미니어처에서 3,000㎖까지 다양한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400㎖ 18,000원, 750㎖ 25,000원(백자). 이강주를 살 수 있는 곳전주이강주 전주시 덕진구 매암길 28, 063-212-5765전주전통술박물관 전주시 완산구 한지길 74, 063-287-6305진주도가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길 3길 13-5, 063-287-3392 조정형 이강주 명인이강주는 일제강점기 가양주 말살 정책으로 맥이 끊어질 뻔했다가 조정형(75) 명인의 노력으로 다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이강주는 그의 가문에서 6대째 내려오는 가양주다. 그는 이강주를 살려보겠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회사를 세웠다. 그게 벌써 25년 전이니 직장 생활까지 해서 마침 올해가 술 인생 50주년이다. 그가 무형문화재(1987년, 6호)가 되고 대한민국 식품명인(1996년, 9호)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는 회사 경영에서 한 발 물러선 요즘도 매일같이 연구실로 출근해 ‘가루술’을 연구하고 있다. 가루술은 이강주의 세계화, 현대화를 위한 도전이다. 술 장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여전히 청춘이다.
#막걸리
#모주
#배
#생각
#약주
낡고 오래된 마을에 꽃이 피다
전주 도시재생
도시재생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부터 전주는 한옥마을을 지키고 가꾸어 왔다. 그 결과 전주한옥마을은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옥마을 도시재생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2010년 이후 구도심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민선 6~7기, 전주시는 천편일률적인 ‘개발’ 대신 ‘재생’을 통해 ‘사람 중심 전주의 고른 발전’을 만들겠다는 도시재생 계획을 발표, 현재 크고 작은 도시재생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완산구는 구도심 아시아문화심장터 100만 평 플랜을 중심으로, 덕진구는 덕진뮤지엄밸리 사업을 중심으로 도시재생 사업을 펼쳐가고 있으며 새로운 변화의 싹이 하나둘 돋아나고 있다.전주의 보물인 구도심 아시아문화심장터 100만 평은 올해 사업들이 본궤도에 올라 전라감영 1단계 복원이 완료되고, 서노송 예술촌 문화재생 등이 가시적 성과를 낼 전망이다. 덕진구의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법원, 검찰청 부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원형 콘텐츠 체험・전시관과 법조삼현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 또, 60년 된 팔복공단은 예술공단과 청년공단으로 재구성하여 전주의 성장을 이끌 것이다. 전주 역세권은 전주역을 신축하고, 청년 창업자 공간을 조성하는 등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될 것이다. 전주형 도시재생은 전주만의 ‘자기다움’을 간직하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적절히 결합한 맞춤형 도시재생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계획부터 실행에 이르는 전 과정에 주민이 참여하고,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를 통한 주민 간 상시 소통으로 오래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20.10.28
#한옥마을
#재생
#사람중심
오월, 전주는 청춘이다
전주의 오월은 영화처럼 온다. 축제처럼 오월이 열린다. 색색의 꽃보다 생생하고, 초록 잎사귀보다 선명한 무늬로 남을 다채로운 축제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봄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오월에 당도한 당신을 기다린다. 아카이빙 특별전 ‘스타워즈 시리즈’ 등 2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특별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시민들이 기꺼이 즐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영화제를 앞두고 그 열기가 뜨겁다. 올해로 23회를 맞는 ‘전주한지문화축제’에 더불어 2019 공예주간 체험행사들도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전통을 사랑하는 전주이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제13회 ‘전주비보이그랑프리’도 놓칠 수 없다. 마음을 열정으로 채울 뜨거움이 필요하다면, 전주의 오월을 제대로 즐겨야 한다. 또한, 전주의 오월은 낭만의 봄밤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어둠이 내린 봄밤, 보석처럼 빛나는 전주의 문화재들을 만나 보는 ‘전주문화재야행’과 흥겨움으로 들썩일 마당창극 역시 오월의 전주에서 만나볼 수 있다. 봄은 짧다. 그러나 추억은 힘이 세다. 해마다 봄이면 새로운 추억이 만들어지는 전주는 그래서 언제나 청춘이다. 이것이 바로 전주의 오월이 찬란한 이유!
2020.10.26
#영화
#축제
#봄
전주에서 고창까지
책 집을 짓는 사람들이 산다
쨍그랑 소리다. 푸른 하늘빛에 눈길이 닿는 순간, 빛 사이로 만져지는 소리다. 가을이 깊을 대로 깊은 시절이다. 오직 눈의 감각만으로도, 소리며 내음이며 만져짐이며 맛의 감각이 더불어 작동한다. 기나긴 장마에 몇 차례 태풍, 그 비와 바람에 혼곤히 젖은 몸이 저절로 제 감각을 회복하는 중이다. 지난여름 청년출판대학에 참가한 청년 백선영, 그를 ‘책마을해리’에서 다시 만났다. 길고 긴 팬데믹(pandemic, 감염병 세계적 유행) 터널을 지나며 다시 여름, 그 여름 기색조차 산산 흩어진 가을 복판에서다. “작년 여름 여기서 보낸 며칠이 참 아득해요. 여러 친구와 그렇게 스스럼없이 민얼굴을 마주하고 실컷 읽고 이야기하고 바다까지 온몸으로 걸었던 그 며칠 말이에요.”그의 인사말에 ‘옴짝달싹’ 못한 올여름 아쉬운 마음이 휘감겨 온다. 청년기까지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책을 출판할까, 고민하고 토론하고 기획 구성으로 모아 보는 일, 그 구성을 놓고 사람을 만나고 공간을 만나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와 만나는 일, 그 만난 순간순간을 잘 개켜 글과 이미지로 드러내 보이는 일, 그 과정을 복기해 보자는 만남이니, 그 지난 기억이 하나하나 고스란히 소환되는 시간이기도 하다.고창 책마을해리의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책마을해리는 그 사이 뭐가 바뀌고 어떤 이야기가 스몄을까나?’ 그가 낯익은 책마을 풍경 가운데 낯이 설은 공간을 다시 눈에 담는다. 책마을 전체로 통하는 입구 ‘책방해리’는 1년 2개월 만에 스무 종이 넘는 출판 결과물을 더해 풍성해졌다. 눈 밝은 책방지기 버들눈도서관장의 큐레이션으로 그림책으로부터 인문 교양·고전까지, 풍성한 가을걷이만큼이나 복되었다.그림책으로 역사며 평화 감수성을 키우자는 ‘나무위도서관(트리하우스)’으로 가는 발걸음에 신명이 매달린다. 나무위도서관은, 그가 책마을을 다녀간 며칠 뒤 배우 공유가 화보를 찍으러 찾은 공간이다. 명색이 도서관, 그 사이 책 몇 권이 바뀌었을 뿐 그대로 그 자리 같은 공간인데, ‘누군가 다녀갔다’라는 한마디에 새로운 의미가 담겨 버린다. “이 책 말이에요.” 그가 책마을해리에서 찾은 이번 책은 . 생태 이야기를 담은, 그러므로 우리 관계를 사람 사이에서 사람 바깥, 우리를 둘러싼 것들과 맺는 관계로 넓혀 주는 책이다. 동네 책방에서 산다, 동네 책방이 산다우리는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내 ‘시민의 서랑’을 마주 걷는다. 전주시민의 기증으로 만들어진 책의 거대한 벽이다. 붉은 융단 의자가, 책 한 권 들고 앉기를 청한다. 책을 품고 그 품에 안기기를 청한다. 그가 동네 책방 추천서가 찾아낸 책을 펴 나직하게 소리 내 읽는다.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삶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 얼마 전에 비혼모를 만났다. 만남이 거듭되자 그는 ‘책 낸 사람 처음 봐요’ 내게 말했고 ‘이렇게 글 잘 쓰는 비혼모 처음 봐요’ 나도 고백하고 깔깔댔다. 처음 보면 한 사람이 비혼모로 보이지만 자꾸 보면 결혼제도 외부에 있는 상태의 설명일 뿐임이 드러나고 …… 처음 보고 계속 보는 게 관건이다. 영화처럼 서로 삶이 스밀 때까지.” 길게 읽고 숨을 몰아쉰 그가 든 책은, 글쓰기 에세이스트 은유의 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것, 꼭 결혼을 전제해야 하나요?” 이십 대의 그가 묻는다. 제도로서 결혼, 관계로서 결혼에 대해 말을 건넨다. 그가 살아갈 시대는 아무래도 관계로서 결혼의 시대일 테니.언제나 끼어 있는 세대, 우주로1216우리 걸음은 어느새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내 종합자료실, 탁 트여 널찍한 카페 분위기를 누리는 이용자들 사이를 지난다. 공간 깊숙이 자리한 문학의 숲, 아치형으로 짜인 서가를 지나 초록 풍경의 창과 맞닥뜨린다. 책을 여는 순간 낯선 세계로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것 같은, 그 찰나에 다가오는 것들. 누군가의 말이 글이 되고, 다시 읽혀 말로 되뇌어지는 말과 글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틈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오르는 3층 ‘우주로1216’에 이른다. 열두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낀 세대 청소년을 위한 책 공간이다. 곰곰, 슥슥, 쿵쿵, 톡톡존으로 구획된 책과 생각, 이야기 사이사이 손의 감각이 작용하는 ‘메이킹’ 공간이다. 청소년들 취향이 제대로 빛나게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끼어 있는 세대 아닌가요?” 그가 웃는다.여기는 책 문화도시 전주옥상으로 책의 길이 이어진다. 책 정원이다. 석양을 배경으로 커다란 달 조형물이 눈에 들어오는 북적북적 텃밭, 표기대로 적으면 Book적Book적이다. 걷고 앉기 좋게 놓인 목조 데크 사이 토란이며 수크령, 동물 조형물들이 가을 기우는 빛으로 그윽하다. 책마을해리에서 시작한 책의 점이 전주시청 책기둥도서관을 거쳐 전주시립도서관 ‘꽃심’에서 점과 점으로 만났다. 그가 하나의 점이면 나도 하나의 점일 테다. 소란 소란 쉴 새 없이 이야기가 빚어지는 여기 전주에, 한 점인 그는 남고 나는 간다. 책기둥도서관,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내가 돌아가는 책마을해리까지 이 세 개 책의 점을 이으면 비로소 면이 된다. 활자며 이미지들이 소리 옷을 입고 넘실거리는 세상이다. 그와 내가 옷깃을 여민다. 그 단단한 터전 위에 이야기의 기둥을 세우고 책 집을 짓는 사람들이 산다. 여기는 책 문화도시 전주다. 글 이대건│책마을해리 대표올해로 27년째 출판기획편집자로 살고 있다. 고창 바닷가 마을에 귀향해 선대에 세운 학교 터전을 책 문화공간 ‘책마을해리’로 일구고 있다. ‘아쇼카펠로우’이며 도서출판 기역, 나무늘보출판사, 그림책 브랜드 를 운영한다. 세대를 넘어 로컬 기록자를 양성하는 책 학교 해리를 열고 있으며, 전주시 완산도서관 문화재생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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