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기사목록(115건)
전주의 꽃심
"기록물은 시간이 준 선물입니다"
이용엽·문정자 부부에게 듣는 전주의 기록물 이야기
아버지의 일기에서 발견한 전주의 역사 이용엽 아버지 일기를 읽기 전까지 제게 아버지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아버지였습니다. 그저 묵묵히 가장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 말이지요. 그런데 공립 전주농업학교 재학 시절의 학습일기 속 아버지는 무척 유쾌하고 재미난 분이셨어요. 학습일기니만큼 주로 학교생활에 대한 기록이긴 한데,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100여 년 전 전주의 모습까지 담겨 있는 가치 있는 기록물이었지요. 일기는 1916년 5월 6일부터 3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첫 일기는 비가 와서 원족, 요즘 말로 소풍을 가지 못해 교실에서 오락 시간을 보낸 내용이에요. 축음기를 켜고 노래를 들으며 유쾌하게 놀았다는 글에서 춤추며 노는 아버지를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더군요. 팔달정(현 팔달로 추정)의 전주좌대성단신파연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감동한 이야기는 그 시절 청년들의 여가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 어느 날은 전주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대회를 구경하셨습니다. 경기를 보며 자전거가 달리는 모습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모습 같다는 감상도 적어 놓으셨어요. 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린 전주군 이동면 검암리 (오늘날의 전주시 금암동)의 간이 자전거경기장은 훗날 덕진운동장 개발의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일기 속에서 전주의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사진 속 추억, 소중한 자료가 되다 문정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있다죠? 제게 기증은 남편이 저에게 미친 선한 영향력입니다. 나누는 것의 기쁨을 배웠다고나 할까요? 아버님의 일기를 기증하는 남편을 보면서 기록물 기증이 단순히 내 것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기록물의 가치와 힘을 전하고 나누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나도 무언가 기증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중·고등학교 시절 입학식과 졸업식 사진이 떠올랐어요. 요즘은 워낙 사진이 흔한 시대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사진은 참 귀했거든요. 그래서 특별한 날이면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찍은 사진을 참 소중히 보관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 사진을 기증한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사진이지만, 기증하면 그 옛날 전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기록물의 가치이용엽 아버지 일기를 기증한 후 더 많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형과 동생과 함께 일기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형이 한자로 된 원본을 번역한 것을 받아 제가 정리를 하고, 여동생이 교정을 봐서 책을 출판한 것이지요. 집 안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에 감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공립 농업학교 재학 시절 아버지가 판서해서 만든 일제강점기 교과서 일부도 기증했는데요, 그렇게 모아 놓은 기록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의미 있는 것들을 기증하다 보니 아내도 모아 놓은 기록물을 꺼내기 시작하더군요. 어쩌면 기록물은 우리 부부가 함께한 시간이 준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래된 것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같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 기록물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거든요. 경험해 보지 못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니까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도 기록물에 대해 소중히 여겼으면 해요.
2020.09.02
#전주의기억
#아버지의일기
#전주옛모습
기획 특집
'우리, 함께'위기를 이겨내는 힘
코로나19 재확산을 막아라. 전국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시행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잇따르고 있다. 전국적으로 교회, 직장, 병원 등 일상 곳곳에서 집단감염이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확진자 수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보이고 있어 어느 때보다 엄중한 상황이다. 전주는 지난 2월 21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비교적 청정 지역에 속했다. 매주 수요일 일제소독의 날 운영, 방역수칙 준수 등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돋보였고, 경제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착한 임대인 운동' 등 전국적으로 모범적인 지역으로 회자되었다. 간간이 확진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해외 발(發)이 아닌 지역감염은 6명에 머물렀다. 그런데 광복절 직후인 8월 16일을 기점으로 확진자 숫자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주로 수도권 확진자를 접촉한 것으로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경로를 알 수 없는 감염의 경우도 있어 시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8월 16일부터 8월 23일 사이에 발생한 전주시 확진자는 19명(국내 18, 해외 1), 밀접접촉자와 자가격리자는 300여 명이 넘는다. 코로나19발 경제 위기를 전례 없는 시책으로 극복해 왔던 전주시는 코로나19 재확산 앞에서 다시 한번 마음의 고삐를 조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8월 19일, 전주시는 긴급히 종교계 4대 종단 간담회를 개최하고 방역 강화 및 집회 자제 등의 협조 요청을 했다. 감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광화문 집회 참여자를 파악하기 위해 인솔자들을 대상으로 집회 참석자 제출 명령을 내렸으며, 명령 불이행자에 대해서는 경찰에 고발하여 신속하게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등 강력히 대처했다. 아울러 코로나 2차 대유행이 현실화될 수 있는 위중한 상황임을 감안하여 8월 18일 선제적으로 보육시설을 제외한 공공 실내시설을 임시 폐쇄 조치하였고, 8월 23일에는 방역을 2단계로 격상했다. 이에 따라 시청과 경찰이 합동으로 '고위험시설 시경합동대책반'을 구성하여 9월 6일까지 행정명령 불이행 시설을 점검한다. 이행시설에 대해서는 휴업지원금을 지급하고 단기일자리를 제공하며, 불이행시설은 계도 및 고발조치를 통해 벌금을 부과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조치에 따라 실내 50인 이상, 실외 100인 이상 행사, 모임, 집회가 금지되고 클럽, 노래방, 뷔페, PC방, 방문판매 등 감염 고위험시설 12종의 영업이 중단된다. 목욕탕, 결혼식장, 종교시설, 영화관 등 다중이용시설은 마스크 착용, QR코드 기반 전자출입명부 시스템 도입 등 강화된 방역수칙을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한다. 종교시설의 경우 비대면 온라인 집회를 강력히 권고하고 '온라인 종교집회 지원단'을 구성하여 비대면 집회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전주시는 8월 21일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을 포함한 실내 공공시설과 축구장 등 실외 공공시설 운영에 대해서도 임시 폐쇄 조치를 내렸다. 시에서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대해서도 전면 중단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하였다. 수도권 등 타지역에서 많은 방문객이 찾는 한옥마을은 특별히 방역 강화 대책을 세웠다. 한옥마을 내 모든 시설에 대한 방역수칙을 준수하도록 지도·점검하고, 한옥마을 주요 진·출입 지점에 단속요원을 배치하여 집중적으로 점검하기로 했다. 또 차량 외 도보로 이동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마스크를 쓸 수 있도록 계도 조치를 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객석이 있는 모든 식당과 카페는 방문자 명부 작성을 하도록 조치하였다. 아울러 광화문 집회 참석자 중 확진자가 다수 발생한 만큼 집회 참석자는 증상 유무와 관계없이 검진받을 것을 행정명령으로 전달하고, 검진에 비협조적일 경우 단호히 고발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시민들의 협조와 발 빠른 대책으로 코로나19 재확산이 멈추기를 기대해 본다.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조치(8. 23. 기준) 실내 50인, 실외 100인 이상집합금지 대상 행사 전시회, 박람회, 설명회, 공청회, 학술대회, 기념식, 수련회, 집회, 축제, 대규모 콘서트, 강연, 각종 시험 등 사적 모임 결혼식, 동창회, 동호회, 야유회, 회갑연, 장례식, 동호회, 돌잔치, 워크숍, 계모임 등 집합금지 대상 고위험시설 클럽․룸살롱 등 유흥주점, 콜라텍, 단란주점, 감성주점, 헌팅포차, 노래연습장, 실내 스탠딩 공연장, 실내 집단운동, 뷔페, PC방, 방문판매 등 직접 판매홍보관, 300인 이상 대형학원 방역수칙 의무화시설학원, 오락실, 150㎡ 이상 일반음식점, 워터파크, 종교시설, 공연장, 실내 결혼식장, 영화관, 목욕탕·사우나, 실내체육시설, 멀티방·DVD방, 장례식장 전주시 공공시설 임시 폐쇄 (8. 18. 기준) 동 주민자치센터 주민자치 프로그램 시설 공․사립 도서관 전주시립도서관 꽃심(12개소), 공립 작은도서관(29개소), 사립 작은도서관(97개소) ※비대면 도서대출 예약서비스 가능 청소년 시설 야호학교(2개소), 평생학습관, 청소년수련시설(5개소),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청소년 성문화센터 사회복지시설 종합사회복지관(5개소), 장애인복지관(1개소), 노인복지관(6개소), 경로당(633개소), 건강가정지원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육아종합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관내 어린이집 공공 실내 체육시설 화산체육관, 게이트볼장, 전주승마장, 실내인라인장, 덕진배드민턴장, 한바탕국민체육센터, 어울림국민체육센터, 실내체육관, 빙상경기장, 완산·덕진수영장 문화시설 전주동물원, 경기전, 어진박물관, 전주역사박물관, 문화의집(5개소),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자연생태관, 전주시민기록관,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 최명희문학관 등 한옥마을 모든 문화시설. 풍우경로당 2층 공유공간, 전주시사회혁신센터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폐쇄 기간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방문 전에 꼭 확인하세요.
2020.08.28
#코로나19
#사회적거리두기
#우리함께
#위기극복
당신과 더불어
민낯 그대로의 완산동을 기록하다
사진작가 소영섭
완산동 일대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1990년대 완산동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육교를 지나 대장간 거리의 모습, 수많은 점집과 완산칠봉, 그때의 완산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느껴지는 장소였죠. 하지만 지금 완산동은 오래된 콘크리트 길, 회색의 슬레이트 지붕, 또 버려진 것들이 옛 모습을 잃은 채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죠. 재개발이 예정된 마을 안에서 만난 공·폐가의 모습을 통해 30년 전 옛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소외와 재개발이 작품 세계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완산동은 무채색의 회색 느낌이 강합니다. 앙상하게 콘크리트 뼈대만 남아 있는 폐건축물들을 보면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은유적으로 녹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된 오브제(사물)를 통해서 과거와 공감하게 되고, 추억을 소환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의 모습,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때 시절의 물건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제 사진 속에 그대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작가 소영섭에게 사진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진은 소멸하는 역사와 개인의 삶을 기록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통해 공동의 기억과 개인의 삶을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고 믿어요. 그래서 사진을 시작했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역사와 개인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주의 숨은 이야기와 전설, 전주가 갖는 지역성을 제 특유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저의 작업을 통해 기억되는 전주, 이야기와 상상력이 담긴 전주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재개발지역을 촬영하면서 주민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이 일대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이 어르신들이신데요. 이분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용머리 여의주마을 현장지원센터 직원들과 주민협의회 위원님들과 의기투합해 ‘용머리 여의주마을 청춘사진관’을 기획했고 ‘장수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을 촬영해 드리게 되었어요. 소영섭 작가가 생각하는 전주 그리고 전주문화는 무엇인가요? 전주는 역사와 전통의 이야기가 풍성한 도시입니다. 동학농민운동, 초록바위 이야기 등 스토리텔링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시인 것이지요. 구도심의 마을 이야기와 콘텐츠가 합쳐진다면 ‘이야기가 있는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고, 도시재생 사업에서도 으뜸이 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도시가 전주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사진작가 소영섭 씨가 걷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현대의 삶의 기록은 먼 훗날 미래 기록의 가치로서 중요한 자료입니다. 완산동을 시작으로 구도심 동네와 동네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하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완산동을 주제로 사진집을 준비해 볼 계획입니다. 전주시의 동네를 계속 카메라에 담고 싶습니다. 소영섭 작가 전주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에서 사진과 영상을 전공했다. 2018년부터 전주국제사진전을 비롯해 동문길예술거리 전시에 참여했으며, 현재 지역 서사를 기반으로 아카이빙과 사진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블로그 │ https://blog.naver.com/youngsupe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oyoungseop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oyoungseop/
#사진
#전주동네
#완산동
"푸른 눈의 '베리 삼촌'은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조기현 씨가 소개하는 '브라이언 배리'의 사진
아직도 생생한 '배리 삼촌'과의 추억 브라이언 배리, 아니 배리 삼촌이 한국에 온 때가 1967년입니다. 제가 1968년생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배리 삼촌은 이미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그 사연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배리 삼촌은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현재 부안군 변산면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으셨는데, 근무 당시 저희 할머니 댁에서 하숙하셨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원래 슬하에 7남매를 두셨어요. 아들 여섯에 딸 하나요. 그런데 여섯째, 제게는 막냇삼촌이죠. 그분이 6·25 때 돌아가셨대요. 배리 삼촌이 1945년생인데 그 삼촌과 비슷한 또래였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마치 막내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며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신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의 인연을 맺게 된 거지요. 삼촌은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부안이 무척 그리웠대요. 좋아했던 막걸리와 홍어 무침 생각도 간절했고요. 그러던 차에 평화봉사단 모집 연락을 받고, 다시 한국에 오셨습니다. 평화봉사단 교관 활동을 마치고, 대우그룹 회장실 소속 해외 홍보부 근무를 하게 되면서 서울로 떠나셨는데요. 명절이면 꼭 부안 할머니 댁에 내려오셨어요. 집안 애경사 참석은 물론이고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고 상주 역할도 하셨습니다.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배리 삼촌은 한국에서 참 많은 활동을 하셨어요.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불교 활동입니다. 평화봉사단으로 처음 한국에 오셨을 당시,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셨대요. 그렇게 불교에 관한 관심이 점점 깊어지던 중에 불교 탱화의 거장 만봉스님을 만나 탱화를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삼촌이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으셨고, 재능도 있으셨대요. 그런데 미국 부모님 반대로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술에 대한 애정이 불교 탱화로 꽃을 피운 셈이지요. 1999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태국 왕실 사원에 한국의 단청을 그렸고, 총 40권을 영어로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2009년 화관문화훈장도 받으셨어요. 배리 삼촌은 재주만큼 흥도 참 많은 양반이셨어요. 아직도 할머니 댁 마당에서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 마시고 장구 치고 노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취미였던 장구를 시작으로 농악을 제대로 배워서 남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정읍농악전수자로 제자들을 양성하신 거예요. 외국인이 한국 사람에게 농악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참 재미나지 않나요?40년 만에 빛을 본 1960년대 전주천 빨래터 사진사진도 참 좋아하셨습니다. 변산을 비롯해 전라북도 곳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셨어요. 이번에 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전주천 빨래터 사진은 삼촌이 전라북도 곳곳을 여행하며 남긴 사진 중 하나입니다.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와서 변산에 가기 전에 전주에 묵으셨는데 바로 그때 찍으신 사진이에요. 그런데 1960년대만 해도 전라북도에는 컬러 사진을 현상하는 곳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삼촌이 미국에 사는 형님에게 필름을 우편으로 보내서 현상을 부탁하셨답니다. 그러고선 두 분 다 사진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계셨대요. 그러다 2010년 배리 삼촌의 친형님께서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창고에서 필름을 발견하고 인화하셨다고 해요. 무려 40년도 더 지나서 세상 빛을 본 거지요. 그 사진을 디지털화해서 메일로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집안 어른들은 삼촌이 부안에서 생활하셨으니 부안에서 찍은 사진일 거라 하셨는데, 딱 보니 전주천이었습니다. 제가 신흥학교를 나왔는데 다가교를 신흥학교 다리라 불렀거든요. 사진에 찍힌 풍경이 그 신흥학교 다리 아래 모습이었습니다. 흰 천이 바람에 날리고 아낙네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빨래를 하는 모습이 삼촌 눈에 참 신기하셨나 봐요. 2016년 배리 삼촌이 돌아가신 후에 유품들을 막내 작은아버지가 보관하셨다가,지금은 제가 관리하고 있어요. 저는 앞으로 배리 삼촌의 활동과 작품들을 알리고 싶어요. 유튜브 등을 이용한 일종의 사이버기념관을 제작하는 거지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삼촌을 보며 많은 분들이 애향심을 가졌으면 해서요. 아마, 하늘에 계신 배리 삼촌도 같은 마음이시지 않을까요? 조기현(1968) 씨는 문화예술공연기획 의 대표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브라이언 배리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은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제8회 전주시기록물수집공모전에 브라이언 배리가 촬영한 1960년대 전주천 빨래터 사진을 기증했다.
#브라이언배리
#부안군
#고향
"현장 기록한 사진 시민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최영철 어르신이 사진으로 추억하는 미원탑과 금암 분수대
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기록물이다. 사라진 과거의 모습도 사진 속에서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전주의 랜드마크였던 미원탑과 금암 분수대 옛 모습도 모두 사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전주의 오래된 풍경이 담긴 사진을 전주시에 기증한 최영철 어르신은 35년간 전북도청 공보실에서 근무하며 전라북도 곳곳을 기록한 사진사이다. 최영철 어르신을 만나 촬영에 얽힌 에피소드와 그 시절 전주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숙부님이 주신 카메라가 사진 인생의 시작 초등학교 시절, 숙부님께서 카메라 한 대를 주셨습니다. 그 카메라가 제 사진 인생의 시작인 셈이죠. 1930년대 독일제 카메라였는데 그 카메라로 참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 원판을 찾으러시내 사진관에 갔습니다. 구 도청 옆 소방서 자리에 ‘부민사진관’이라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원판을 찾아서 집에 가려는데사장님이 자꾸 붙잡으시는 거예요. 초등학생이 카메라가 있다 하니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학교 수업 마치고 와라, 방학하면 또 방학했으니 오라 하며 자꾸 부르시더라고요. 오전반, 오후반 나눠서 수업하던 시절이었는데 오전반 수업이 끝나고 가면 점심까지 챙겨 주시면서 사진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때 사장님께 사진 이론에 대해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공짜로 배우기만 할 수 있나요? 사장님께 사진 이론을 배우면서 사진관 일을 도와드렸지요. 당시 도민증이라는 게 있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이에요. 그 도민증에 들어가는 증명사진을 네 장씩 잘라서 봉투에 넣고 이름을 쓰는 일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배운 사진 이론 덕에 군대에 가서 보직도 바꾸었지요. 원래 시설계에서 건축, 보수 작업을 했는데 인쇄소에서 일하게 된 겁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점차 내 것이 되어 갔습니다.일상에서 찍은 사진이 역사의 한 장면이 되다 제대 후에도 꾸준히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거의 알고 지냈는데 그중에 전라북도청 공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이 공보실에서 함께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혼자 사진 찍으러 다니기 힘에 부친다고 말이지요. 그때부터 전라북도 곳곳을 누비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지역별 여러 행사는 물론, 모를 심고 수확하고, 수확한 쌀을 넣을 가마니 짜는 모습까지, 밤낮없이 사진을 찍으러 다녔지요. 그런데 사진 찍는 게 그저 일이라 생각했으면 그렇게 열심히 찍지 못했을 겁니다.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사진 찍는 일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늘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전주시에 기증한 미원탑 사진이 바로 그렇게 찍은 사진입니다. 미원탑은 1967년도 조미료 미원을 광고하기 위해 그 당시 전주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팔달로 네거리에 세워진 광고탑이에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미원탑은 전주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전주의 관광 명소였습니다. 전북 각지에서 미원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참 많았지요. 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미원탑 사진은 1968년에 찍은 거예요. 도로 정비가 채 되지 않아 차선도 흐릿할 때였어요. 퇴근길에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자전거를 세워 두고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미원탑이 10여 년 후인 1979년 차량 통행 문제 등으로 철거되면서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지요.1980년에 찍은 금암광장 분수대 사진은 운이 참 좋았어요. 당시 업무차 헬기를 타고 다른 지역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마침 분수대에서 분수가 솟구치더라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더군요. 조종사분에게 잠시 멈춰 달라 말하기도 죄송스러워서 급히 셔터를 눌렀지요. 1980년대 금암광장 분수대는 전주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였습니다. 분수대 주변 화단도 참 예쁘게 잘 꾸며 놨거든요. 분수 구경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습니다.그 시절 전주, 사진으로나마 보여 주고파제가 사진을 찍을 때 꼭 지키는 원칙은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들을 찍는 거지요. 전주시에 기증한 미원탑과 금암광장 분수대 사진도 모두 그런 생각으로 찍었습니다. 의미 있는 장소와 공간, 그리고 순간은 시간이 흐르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섰기에 전주시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1970~1980년대 전주를 대표하는 미원탑과 금암 분수대는 이제 전주 사람들에게 추억의 공간으로 남은 곳들입니다.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시절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진을 통해 그 시절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특히 금암광장 사진의 경우, 항공사진이라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시가 금암분수대를 28년 만에 복원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고 있는데요, 옛 금암분수대와 복원되는 금암분수대를 비교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저는, 많은 이들이 사진을 찍었으면 해요.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이 가치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최영철(85) 어르신은 전북도청 공보실에서 35년간 근무하며 전라북도의 다양한 현장과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5월에 열린 제8회 전주기록물수집공모전에 직접 찍은 미원탑과 금암광장 분수대 항공사진을 제출, 최고상을 받았다.
2020.06.30
#미원탑
#전주사람
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따라 걷다
전쟁이 됐든 역병이 됐든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나면 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법이니 역병이 지나가면 세상은 다른 풍경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과연 그때의 세상은 지금보다 나을 것인가 아니면 더 가혹할 것인가. 역병이 창궐하는 지금,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그래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역병 뒤 과연 농민군의 염원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이광재 소설가와 열혈 독자 유정미 씨가 전주와 정읍을 돌며 동학농민혁명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전라감영,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전북도청사가 있었고, 그보다 먼저는 호남을 굽어보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에 전라감영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물론 예전 전라감영의 위용과 규모에는 미치지 못할 터지만 어쨌거나 선화당(宣化堂)이 복원되면 전주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명소가 될 것이다. 아울러 내아를 포함해 부속건물 또한 알뜰하게 들어서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두고 있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내면이다. 번듯하게 지어진 건물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겠지만 그 이면에 어떤 은은함을 배어들게 할 것인가 질문해야 한다. 애꿎은 백성을 잡아다 동헌 마당에 뻗쳐 놓고 매타작을 일삼던 곳이 그 옛날의 관청이었음을 떠올릴 때 그 치장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백성들의 속살은 더 아프게 멍들었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 호남에서 관직을 하게 하는 것’이 옛 양반님네의 꿈이었다 하니 우리가 복원하려는 것이 그러한 양반님네의 꿈은 아닐 것이다.이번에 복원된 선화당 옆에는 오래도록 그곳을 지켜 온 회화나무가 푸른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150살쯤으로 추산되는 이 회화나무가 거기서 내려다본 풍경 가운데 가장 장쾌한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탁주 잔을 앞에 둔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이 전라감영과 각 고을에 대도소(동학의 교세 확장을 위해 설치된 교단 조직)와 집강소(농민군이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기구)를 설치하고 관민상화(官民相和)의 꿈을 이루고자 통 큰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 한 번의 대담으로 호남은 어디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새 세상으로 거듭났으니 전라감영은 전 세계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성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 혼탁한 각자위심(各自爲心, 각자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의 한복판에서 전라감영은 동귀일체(同歸一體,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일)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핵심 동력이자 심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아프지만 아름답게, 전주동학혁명 녹두관우리의 발길이 다시 향한 곳은 완산칠봉 투구봉 정상에 소담하게 자리 잡은 전주동학혁명 녹두관이다. 2019년 6월 1일 개관한 녹두관은 입구에 들어서서 말굽 모양의 회랑을 따라 농학농민혁명을 기록한 전시물을 둘러보도록 설계되어 있다. 바로 그 말굽 모양의 중앙에 무명 동학농민군의 묘가 놓여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진도에서 효수된 농민군의 유골이 인종학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보관되어 왔는데 이를 모셔와 뒤늦게 안장을 한 것이다. 누군들 그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가 누리는 복락이 있다면 이는 마땅히 저들의 한숨과 의분과 장대한 뜻이 빚어낸 환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부도 명예도 다투지 않던 저들의 뜻이 과연 오늘의 천하에 두루 펼쳐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명 동학농민군의 묘를 참배하고 마저 말발굽 모양의 회랑을 돌아 나오다 보면 필자의 소설 의 마지막 글귀를 만나게 된다. 전봉준과 그를 그림자처럼 보필하던 호위무사가 나눈 대화가 그것이다. 호위무사가 이제 재를 다 넘은 것이냐 묻자 아직 재는 남아 있다는 전봉준의 답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전봉준이 대답한다. 그냥 두어도 된다고,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거라고,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이라고…. 밖으로 나서자 역병이 한창이라지만 하얀 철쭉은 완산에 만발하고 미세먼지가 사라진 세상은 부셔서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다. 역병으로 한 세상이 멈추자 새 세상은 이리도 눈부시게 열리는 중이었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역설의 나침반이 되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정읍, 오래된 새것을 들여다보자원평에서 순댓국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차를 달려 황토현에 오르자 풀 냄새가 진동하고 새들이 소란스레 지저귄다. 소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솔바람이 이마에 밴 땀을 씻어 주는데 전승기념탑을 우러러보자 시린 하늘에 다시 눈이 부시다. 그곳 황토현 정상에서 농민군이 진을 쳤다는 시야산을 건너다본다. 황토현과 시야산 사이의 나지막한 구릉이 갑오년의 전쟁터인데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 제정되면서 그곳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바탕의 토목공사 끝에 새것은 창조되지 못하고 장엄한 항쟁의 옛 터전만 사라지는 건 아닐까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비어 있는 공간 속으로 역사적 상상력이 스며드는 건 차라리 차선책인데 군림하듯 무슨 건물이 들어서고 뜻에 맞지도 않는 기념물이 설치된다면 백성의 전설만 영토 밖으로 쫓겨나는 꼴이 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근대화 이후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온 우리의 공연한 기우이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전봉준 장군이 생전에 살았던 고택을 들러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거나 과분한 일을 만났을 때 전봉준 장군 고택을 찾는 건 내게 습관이 된 것 같다. 그곳을 찾아 전봉준 장군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치기만 하면 나는 잃어버린 겸손을 조용히 회복하게 된다. 세상과 한번 맞서게 해 달라고 녹두장군께 간청한다. 고부 관아가 있었다는 고부초등학교와 향교를 둘러본 뒤 이번에는 백산으로 향한다. 동학농민군이 모여 군사를 편재하고 비로소 전봉준을 무리의 지도자로 선출했던 곳이 바로 백산이다. 농민군이 얼마나 모여들었던지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 되었다는 그곳. 미세먼지가 사라져 시야가 트였으리란 예상 그대로 정상에 오르자 발아래 호남평야가 고스란히 펼쳐지고 멀리 전주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 또렷이 드러난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 일갈하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가 작다 했다더니 전라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산이야말로 호남의 태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본래 인간은 광대무변한 우주의 섭리를 받아 안고 살아야 하는 자이니 그게 바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요, 동학농민군이 몸소 행하고자 했던 삶의 방식이며, 오늘날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아닐까. 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은 고단하지만 많은 것을 깨치게 한다.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한 번 걷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될 길이 우리 사는 이곳에 놓여 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오래되어 삭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못한 꿈을 일러 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새 길이 아닌가. 글 이광재│소설가군산에서 태어나 전주에 거주하고 있다. 전봉준 평전 와 장편소설 , 가 있다. 로 2015년 제5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05.28
#전라감영
#전주동학혁명
#녹두관
##전주
#정읍
#전주여행
“전주의 역사(驛舍)에 민족의 역사(歷史)가 살아 숨 쉰다”
박준상 어르신이 추억하는 전주의 역(驛) 이야기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옛날, 기차는 단순한 교통수단 그 이상이었다. 전주역에서부터 멀리 이리역까지, 철도청에서 40년간 근무한 박준상 어르신에게 기차역은 일터를 넘어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장소였다. 박준상 어르신의 추억 가득한 전주 역사(驛舍) 이야기를 들어 보자. 사람들로 북적이던 노송동 시절의 전주역 요즘 사람들에겐 생소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만 해도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대신 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2년간 중학교 과정을 배울 기회가 있었어요. 그렇게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철도청 입사 시험을 봤습니다. 당시 50명을 뽑는데 350명이 몰렸어요. 시험 결과, 1등 그러니까 수석으로 철도청에 입사했습니다. 1945년 4월 1일 자로 철도청에 입사해서 교육을 받고 6월 30일부터 전주역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주역은 기린봉을 등지고 노송천을 바라보고 있는 자리, 즉 현재의 노송동에 있었답니다. 당시 노송천을 가로지르는 노송가교가 있었는데 전주역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다리를 건너 50m쯤 지나면 전주역 광장이 나왔어요. 반세기도 훨씬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 풍경이 생생합니다. 당시 전주역에 하루에 오가는 열차가 임시열차까지 해서 40편가량 됐어요. 1,500명 정도가 오갔으니 그야말로 역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마중 나오고 배웅하는 사람들까지 하면 역을 방문하는 사람들 수는 어마어마했어요. 노송가교까지 사람들이 줄을 섰으니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1981년 현재의 역사로 옮기기 전까지 무려 50여 년간 노송동에 자리한 전주역은 전주는 물론, 전라북도 사람들의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6·25 당시 전주역 풍경 전주역에 발령받았을 때가 해방 직전이었는데요, 당시 일본 군인들이 여수에 상륙해서 북으로 올라갈 때 전주역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객차가 모자라 화물차에 사람도, 말도 함께 실어 날랐다더군요. 소련군이 청진, 나진에 상륙했을 때 남조선을 요새화한다며 쌀을 비롯한 화물을 기차에 엄청나게 실어 날랐다고도 해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입사 후 하도 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합니다. 그러다 직접 목격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해방 후 8월 하순부터 일본, 중국 등지에서 돌아오는 귀환 동포들로 기차 안의 혼잡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1~2시간 지연은 보통 있는 일이었고, 목적지가 없는 귀순 동포들이 광장 언덕과 역사에 거적을 깔고 자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렇게 해방 직후 붐볐던 기차역이 조금 한산해지나 싶었는데 그 후 5년이 채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 직후 기차는 피난민을 수송하는 유일무이한 교통수단이었지요. 피난민들이 보따리를 지고 객차 위까지 올라탔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타서 스프링이 가라앉아 기차가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지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40년 철도청 근무 중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 바로 6·25 직후였습니다. 어쩌면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간직했던 기억에서 모두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내 나이가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아흔셋이에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지요. 아흔이 넘고 나니 내가 죽고 나면 수십 년 전 전주역에 대한 기억을 알릴 길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철도청에서 근무한 자료들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려 했는데 과연 내 바람처럼 잘 간직하고 널리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차에 전주시 기록물 공모전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이겠지만 우리가 살던 시절을 후대에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 말이지요. 사실 40년간의 철도청 근무 중 전주에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익산, 정읍, 신태인, 백양사, 순천, 동산, 삼례, 이리역 등 근교에 안 가본 곳을 손꼽는 게 더 쉬울 정도예요. 그런데 내가 송천역에서 퇴직을 했어요. 그러니까 전주에서 시작해 전주에서 마무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전주에서의 기억이 유독 마음이 남아 있어요. 내가 기증한 자료들로 이런 내 마음이 모두 전달되진 않겠지만 그저 지나온 전주의 역에 대한 역사를 알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2020.05.25
#노송동
#전주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