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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의 전주
곧고 단단한 용사의 마음으로
전주 군경묘지에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추위를 깨트리는 산새의 지저귐 속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립니다. 이곳에 서니, 강한 도시 전주를 만들겠다는 큰 꿈으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우리 삶터를 지켜낸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며, 후손들이 살아갈 전주를 위해 절대 꺾이지 않는 용사의 마음으로 전주 대변혁, 반드시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2023년 1월 2일, 우범기 전주시장과 간부 공무원들은 군경묘지에서 순국선열에게 참배하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새해를 맞아 전주시민의 안녕을 기원하고, 애국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계승해 시정을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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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더불어
전주에서 일 년 살이 “걷고, 쓰고, 반했습니다”
시인 김사인
지난해부터 전주에서 ‘일 년 살기’를 하고 계시는데요,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하루 중 많은 시간을 전주 시내 여기저기를 걷는 데 쓰고 있어요. 주로 한옥마을과 영화의거리, 객사길 등 원도심 쪽을 다녀요. 바람 쐬는 길도 즐겨 가고, 때로는 삼례와 고산, 덕치까지 가기도 해요. 저한테는 걷는 일이 참배하는 방식이에요. ‘3보 1배’ 하는 기분으로 틈만 나면 걷고 있습니다. 걷기는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움직이는 철학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요. 또, 전주와 전북지역의 역사·종교문화 유적지를 두루두루 답사하기도 했고요. 최근 두 달 동안은 학산숲속시집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며 전주 시민을 만났습니다.전주에 계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엇인가요?한옥마을이 속한 교동과 전동, 그리고 오목대와 전주천에는 전주의 긴 역사적 호흡이 살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상업성을 허용하면서도 전통적인 격조를 잃지 않아 경이롭다고 느낍니다. 이는 전주 시민들의 미적 감각과 품위가 받쳐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전체로 보았을 때도, 굉장히 소중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전주와 사적인 연이 없음에도 굉장한 편안함을 느낄 만큼, 인간적인 속도와 평화로움이 도시 속에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긴 역사 속에서 이룩한 문화의 힘이 느껴집니다. 또, 전주의 도서관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가득 쌓아 놓고 빌려주고 돌려받는 곳이라는, 틀에 박힌 사고를 해방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도서관을 체험한 어린 세대들의 사유와 시야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세대들에게 희망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요?시인을 일러 “시대의 온전치 못함을 ‘잘’ 우는 것으로 본분을 삼는 자”라고 책에 쓰셨는데, ‘잘 운다’라는 건 어떤 뜻일까요?저에게 시 쓰기는 무릇 ‘생명 가진 것을 성심껏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다’는 제가 소중히 여기는 우리말 중 하나입니다. 저는 제 시 쓰기가, 적으나마 세상의 목숨들을 섬기는 한 노릇에 해당하기를 소망합니다. ‘잘 운다’는 첫째로,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의 고통을 대변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잘 울기 위해선 깊이 사무쳐야 해요. 아프지 않고 아픈 시늉만 해선 잘 울 수 없어요. 시를 쓴다는 건, 타자의 아픔과 슬픔, 편치 않음을 내 것으로 사무쳐 치르는 일입니다. 잘 사무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시인 노릇의 중요한 부분이지요.올봄 광화문 글판에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 섰기도 하는 일’이라는 시구가 새겨졌는데요,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가닿기를 원하시나요?라는 시는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나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썼던 시입니다. 누군가는 가고 아이들은 태어나고, 봄이 가고 겨울이 오는 순리를 지켜보며 슬퍼하기도 했다가 그것이 지니는 불가피함을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생을 살아나가면서 누구나 하게 되는 공부가 아닐까 싶어요. 섣부른 이해와 아전인수식 결론으로 손쉬운 희망을 갖자는 뜻은 아니고, 묵묵히 긴 호흡으로 슬픈 날은 슬픔을 깊이 치르고 기쁜 날은 기쁨을 깊이 치르는 것을 공부로 삼는 시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전주에서 일 년 살기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려요.제가 전주에 진심으로 반해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건 시 쓰기나 글쓰기 속에 ‘전주’가 반드시 묻어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주의 아름다움이 북돋워지는 과정에 종이 한 장만큼이라도 보태 보려 애쓰는 것이 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에 오기 전 3년 동안 일해 온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하던 일을 이어,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주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해외 독자들이 한국문학을 누릴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그들로부터 마음을 열고 배우며, 시대에 맞추어 한국문학의 진로를 찾는 작업의 한 축을 거들 생각입니다. 김사인 시인1981년 ‘시와 경제’에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소외되거나 잊혀 가는 존재들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는, 시인의 말에서 ‘시 쓰기’를 “생을 연금(鍊金)하는, 영혼을 단련하는 오래되고 유력한 형식이라고 믿고 있다.”라고 했다. 저서로는 , , 까지 3권의 시집과 , 등의 시 해설서, 그리고 산문집 이 있다.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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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3·1운동 100주년, 전주 그날의 기억
전주 3·1운동의 숨결이 머문 곳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신흥고신흥고는 기전여학교와 함께 전주 지역 학생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1929년 항일학생운동 등 신흥고 학생들은 항일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7년 신사참배 종용에 거부하면서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다. 현재 신흥고등학교 기념관 내에는 전주 3·1운동의 치열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전주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러한 역사를 기리기 위해 신흥고 앞 버스정류장을 3·1운동 테마정류장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정류장에는 지역 작가들이 만든 3·1운동 상징 조형물과 함께 역사 기록 현판이 전시된다.주소 |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전화 | 063-232-7070 전주 3·1운동의 횃불 밝힌 서문교회서문교회는 1893년에 세워진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자 전주 3·13만세운동을 총지휘한 김인전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교회이다. 또한 1921년 부임한 배은희 목사 역시, 항일민족단체였던 신간회의 전주지부장을 맡아 교육과 농촌부흥운동에 힘썼다. 현재 서문교회 내에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탑이 남아 있다. 직경 1m의 커다란 종이 달려 있는 이 종탑은 1908년에 세워져 1944년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되었으나, 해방 후 다시 제작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주소 |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220 전화 | 063-287-3270 독립운동가 김인전 서문교회 목사1876.10.7. ~ 1923.5.12.일제 강점기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按手)를 받았다. 1914년 전주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전주 3·1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한·중 연대 조직인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운동 비용 조달에 주력했다. 1923년 4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으며,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학인당1949년 해방 정국, 백범 김구 선생과 해공 신익희 선생이 전주를 방문해 학인당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임시정부 인사들과 회동했다. 그들이 머물렀던 방은 현재 ‘백범지실’, ‘해공지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임시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귀빈들이 주로 머물렀던 인재 고택 학인당은 일제하에서도 민족 문화 보존에 앞장을 선 상징적인 건물이다. 주소 |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45 전화 | 063-284-9929 꼿꼿한 시인의 기개가 서린 비사벌초사신석정 선생은 친일 시를 한 편도 남기지 않았으며,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시인이다. 노송동에 위치한 비사벌 초사는 시인이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부터 별세한 1974년까지 시인이 직접 가꾸고 살았다. 오직 시를 향한 열정만으로 집을 채웠고 비사벌 초사에서 예순여덟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석정 시인이 떠난 후 이 집을 인수한 부부는 현재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비사벌초사’라는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주소 | 전주시 완산구 관선4길 42-9 전화 | 063-231-3118
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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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따라 걷다
전쟁이 됐든 역병이 됐든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나면 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법이니 역병이 지나가면 세상은 다른 풍경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과연 그때의 세상은 지금보다 나을 것인가 아니면 더 가혹할 것인가. 역병이 창궐하는 지금,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그래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역병 뒤 과연 농민군의 염원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이광재 소설가와 열혈 독자 유정미 씨가 전주와 정읍을 돌며 동학농민혁명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전라감영,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전북도청사가 있었고, 그보다 먼저는 호남을 굽어보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에 전라감영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물론 예전 전라감영의 위용과 규모에는 미치지 못할 터지만 어쨌거나 선화당(宣化堂)이 복원되면 전주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명소가 될 것이다. 아울러 내아를 포함해 부속건물 또한 알뜰하게 들어서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두고 있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내면이다. 번듯하게 지어진 건물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겠지만 그 이면에 어떤 은은함을 배어들게 할 것인가 질문해야 한다. 애꿎은 백성을 잡아다 동헌 마당에 뻗쳐 놓고 매타작을 일삼던 곳이 그 옛날의 관청이었음을 떠올릴 때 그 치장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백성들의 속살은 더 아프게 멍들었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 호남에서 관직을 하게 하는 것’이 옛 양반님네의 꿈이었다 하니 우리가 복원하려는 것이 그러한 양반님네의 꿈은 아닐 것이다.이번에 복원된 선화당 옆에는 오래도록 그곳을 지켜 온 회화나무가 푸른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150살쯤으로 추산되는 이 회화나무가 거기서 내려다본 풍경 가운데 가장 장쾌한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탁주 잔을 앞에 둔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이 전라감영과 각 고을에 대도소(동학의 교세 확장을 위해 설치된 교단 조직)와 집강소(농민군이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기구)를 설치하고 관민상화(官民相和)의 꿈을 이루고자 통 큰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 한 번의 대담으로 호남은 어디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새 세상으로 거듭났으니 전라감영은 전 세계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성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 혼탁한 각자위심(各自爲心, 각자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의 한복판에서 전라감영은 동귀일체(同歸一體,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일)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핵심 동력이자 심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아프지만 아름답게, 전주동학혁명 녹두관우리의 발길이 다시 향한 곳은 완산칠봉 투구봉 정상에 소담하게 자리 잡은 전주동학혁명 녹두관이다. 2019년 6월 1일 개관한 녹두관은 입구에 들어서서 말굽 모양의 회랑을 따라 농학농민혁명을 기록한 전시물을 둘러보도록 설계되어 있다. 바로 그 말굽 모양의 중앙에 무명 동학농민군의 묘가 놓여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진도에서 효수된 농민군의 유골이 인종학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보관되어 왔는데 이를 모셔와 뒤늦게 안장을 한 것이다. 누군들 그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가 누리는 복락이 있다면 이는 마땅히 저들의 한숨과 의분과 장대한 뜻이 빚어낸 환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부도 명예도 다투지 않던 저들의 뜻이 과연 오늘의 천하에 두루 펼쳐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명 동학농민군의 묘를 참배하고 마저 말발굽 모양의 회랑을 돌아 나오다 보면 필자의 소설 의 마지막 글귀를 만나게 된다. 전봉준과 그를 그림자처럼 보필하던 호위무사가 나눈 대화가 그것이다. 호위무사가 이제 재를 다 넘은 것이냐 묻자 아직 재는 남아 있다는 전봉준의 답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전봉준이 대답한다. 그냥 두어도 된다고,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거라고,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이라고…. 밖으로 나서자 역병이 한창이라지만 하얀 철쭉은 완산에 만발하고 미세먼지가 사라진 세상은 부셔서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다. 역병으로 한 세상이 멈추자 새 세상은 이리도 눈부시게 열리는 중이었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역설의 나침반이 되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정읍, 오래된 새것을 들여다보자원평에서 순댓국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차를 달려 황토현에 오르자 풀 냄새가 진동하고 새들이 소란스레 지저귄다. 소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솔바람이 이마에 밴 땀을 씻어 주는데 전승기념탑을 우러러보자 시린 하늘에 다시 눈이 부시다. 그곳 황토현 정상에서 농민군이 진을 쳤다는 시야산을 건너다본다. 황토현과 시야산 사이의 나지막한 구릉이 갑오년의 전쟁터인데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 제정되면서 그곳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바탕의 토목공사 끝에 새것은 창조되지 못하고 장엄한 항쟁의 옛 터전만 사라지는 건 아닐까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비어 있는 공간 속으로 역사적 상상력이 스며드는 건 차라리 차선책인데 군림하듯 무슨 건물이 들어서고 뜻에 맞지도 않는 기념물이 설치된다면 백성의 전설만 영토 밖으로 쫓겨나는 꼴이 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근대화 이후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온 우리의 공연한 기우이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전봉준 장군이 생전에 살았던 고택을 들러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거나 과분한 일을 만났을 때 전봉준 장군 고택을 찾는 건 내게 습관이 된 것 같다. 그곳을 찾아 전봉준 장군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치기만 하면 나는 잃어버린 겸손을 조용히 회복하게 된다. 세상과 한번 맞서게 해 달라고 녹두장군께 간청한다. 고부 관아가 있었다는 고부초등학교와 향교를 둘러본 뒤 이번에는 백산으로 향한다. 동학농민군이 모여 군사를 편재하고 비로소 전봉준을 무리의 지도자로 선출했던 곳이 바로 백산이다. 농민군이 얼마나 모여들었던지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 되었다는 그곳. 미세먼지가 사라져 시야가 트였으리란 예상 그대로 정상에 오르자 발아래 호남평야가 고스란히 펼쳐지고 멀리 전주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 또렷이 드러난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 일갈하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가 작다 했다더니 전라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산이야말로 호남의 태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본래 인간은 광대무변한 우주의 섭리를 받아 안고 살아야 하는 자이니 그게 바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요, 동학농민군이 몸소 행하고자 했던 삶의 방식이며, 오늘날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아닐까. 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은 고단하지만 많은 것을 깨치게 한다.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한 번 걷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될 길이 우리 사는 이곳에 놓여 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오래되어 삭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못한 꿈을 일러 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새 길이 아닌가. 글 이광재│소설가군산에서 태어나 전주에 거주하고 있다. 전봉준 평전 와 장편소설 , 가 있다. 로 2015년 제5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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