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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꽃심
“아중리 외가까지 나무꾼이 다니던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지요”
이상교 어르신의 추억 가득한 옛 사진들
하숙생 형들 보며 공부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세 살 되던 해에 완주군 금상면에서 전주시 중노송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때가 해방 직후였는데, 그때부터 서울로 대학 가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중노송동 물왕멀에서 살았어요. 예전 전주역 바로 뒤에 집이 있었습니다. 그 전주역을 둘러싼 철조망 바깥으로 논두렁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썰매를 타러 나온 동네 아이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7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풍경이 생생합니다. 제가 풍남초등학교,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나왔는데요. 집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학교 진학에 어머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님께서 당시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학생들 하숙을 치셨거든요. 특히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어머님께서 절 위해 환경을 만들어 주신 셈이지요. 어머님의 바람대로 하숙생 형들이 밤새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서너 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던 그 시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운 추억도 많습니다. 당시 전주공설운동장이 풍남초등학교 근처에 있었어요. 전주시의 행사들은 모두 그곳에서 치렀지요. 국경일 기념식도 하고, 체육대회도 열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대표 선수들이 체육대회에 출전하면 다 함께 응원하러 갔는데요, 열심히 응원하다 보면 절로 애교심이 커졌습니다. 졸업 앨범 사진을 찍을 때도 참 즐거웠어요. 저는 전동성당과 한벽루 등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친구들과 학교를 벗어나 전주 명소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었지요.유년 시절 정서적 고향, 아중리 외가의 추억 제 유년 시절 추억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아중리 외가예요. 당시 중노송동 집에서 3~4km 떨어진 아중리 외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풍남초등학교에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외갓집이 있었어요. 전주공설운동장을 지나 남중학교를 거쳐 걷다 보면 인봉리, 마당재, 가재미 마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재미를 지나면 팥죽배미가 있었는데, 그 마을을 지나면 나오는 은행다리 마을에 바로 외가가 있었습니다. 100호 정도의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시골 마을이었지요. 마을까지 가는 제대로 된 진입로도 없어서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을 따라갔습니다. 1955년 아중저수지 둑을 쌓으면서 비로소 소달구지가 지나갈 정도의 길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라는 동요를 참 좋아하는데요, 저희 외가가 그 동요 속 가사처럼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로 울긋불긋한 꽃 대궐을 이뤘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풍경이 선해요. 마당에는 복사꽃이 피어 있고, 집 뒤로는 살구나무, 대밭, 감나무가 가득했어요. 오뉴월에는 모 심으려고 해놓은 논에서 우렁이를 잡아다 외갓집 화로에 구워 먹고, 한여름에는 평상에 누워 은하수를 보다가 타닥타닥 모깃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기도 하고, 가을에는 메뚜기 잡고 놀고, 그야말로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제 정서적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1961년 6월에 돌아가셨는데, 전주시에 기증한 사진은 당시 상여 나가던 모습을 찍은 거예요. 사진에 논에 모심기한 모습이며, 마을 풍경이며, 아중저수지 모습 등 당시 아중리 풍경들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진에서 그 시절 전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사진으로나마 전주의 근현대사를 보여 주고파 제가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에요. 근현대사를 몸소 겪은 세대지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고, 6·25 전쟁을 겪고, 전쟁 후 지독한 보릿고개를 넘어 전주가 점점 발전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6·25 때 전주 시내가 폭격으로 환하게 불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6·25 직후 먹을 게 없어서 찔레꽃이며 진달래 뜯어 먹던 시절은 또 어떻고요? 그런 시절을 지나 지금의 발전한 전주를 보면,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때 감히 전주가 지금처럼 발전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 시절의 전주가 생생한 사람으로서 요즘 사람들에게 그때의 전주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꾸준히 전주시에 제가 소장한 전주시 관련 기록물들을 기증해 왔습니다. 집에 두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고, 저만의 기록물로 남겠지만, 시에 기증하면 전주 시민과 함께 나눌 수 있으니까요. 제가 요즘도 가끔 외가가 있던 아중호수를 찾는데요, 농업용수를 대던 저수지가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비록 그 옛날 사진 속 풍경은 사라졌지만, 발전한 모습이 자랑스럽거든요. 그러니 사진으로나마 많은 이들이 보고 전주의 변화를 확인하고, 내 고장 전주를 자랑스러워했으면 해요. 이상교(79) 어르신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와 전주와 전라북도 중·고등학교에서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제8회 전주 기록물공모전에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기증하여 최우수 기록물로 선정됐다.
2021.01.22
#전주공설운동장
#중노소동
#아중리
#기록
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익산까지
만경강 따라 흐르는 문학의 숨결
가래여울에 어린 풍패지향의 글 읽는 소리전주천은 만경강과 만나 이름을 지운다. 자식에게 자신을 주고 사라지는 어머니처럼. 전주천은 자신의 분신인 만경강으로 몸을 바꾸어 호남평야를 골고루 적시며 서해로 흐른다. ‘만 개의 고랑이 입을 대고 곡식을 키워서 만경’이라 했던가. 만경강 여행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홀쭉해진 어머니의 지극함을 배우는 여행이다. 한벽루에서 흘러온 전주천은 추천대 앞에서 삼천과 만나면서 만경강이 될 준비를 한다. 이곳을 ‘두물머리’라 하지 않고 ‘가래여울’이라 한 것은 그만큼 물살이 세기 때문이다. 가래여울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어 물고기 서식지로 그만이다. 전주에서 만경강을 가려면 추천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 전주시 팔복동에 자리한 추천대는 조선 시대 선비 추탄 이경동을 기리는 정자다. 정자 앞을 흐르는 강을 ‘추천(가래여울)’ 또는 ‘가르네’, ‘가리네’라 불렀다. 냇물이 갈라진다는 뜻이다. ‘용산다리’를 ‘추천대교’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 추천의 ‘추(楸)’는 호두나무의 일종인 가래나무 ‘추’다. 이곳에선 전주천의 물이 가래나무의 잎처럼 짙은 초록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초록빛 강물에 손을 담그면 마음도 초록빛으로 물들 것 같다.전주천 벚꽃 잎은 강물에 떠가고추천대교에서 팔복동을 거쳐 만경강까지 이어지는 길의 이름은 ‘전주천 벚꽃길’. 평소에는 2차선 좁은 길로 대형 트럭이 지나가지만, 벚꽃이 피는 계절엔 풍광이 그만이다. 전주천을 옆에 끼고 달리다 보면 만경강이 나타난다. 익산으로 출퇴근을 할 적에는 이 운치 있는 길을 보려고 일부러 돌아가기도 했다.만경강은 운장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완주와 진안을 지나 고산천과 소양천으로 흐르다가 삼례에 이르러 소년기를 마친다. 만경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건 삼례부터다. 전주천과 만나는 순간 만경강은 수많은 아명(兒名:어릴 때 부르는 이름)을 버리고 제 이름을 얻는다. 강의 성년식이 이뤄지는 곳, 삼례 비비정이다.비비정(飛飛亭)은 완산 8경 중 하나인 비비낙안(飛飛落雁)으로 유명한 정자다. 갈대밭 사이 강물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예전엔 황포 돛을 단 목선이 수시로 오갔다. 김소월의 시 에서 그린 풍경이 비비정의 모습이었던 것. 에서 이도령이 ‘꼭 보고 가리라 노래 불렀던 장소’이기도 하다. 기러기가 내려앉는 풍경은 사라졌지만,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구 철교 위에는 ‘열차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소설 속 이몽룡이 연인을 만나기 위해 건넜던 만경강을 19세기 초에 동학농민군들이 건넜다.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동학 접주들이 모임을 가졌던 곳,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후 동학농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진 곳도 이곳이었다. 전봉준은 후일을 기약하며 비비정 앞에서 동지들과 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동지의 밀고로 체포된 전봉준은 만경강을 건너 압송된다. 시인 안도현은 만경강을 건너는 전봉준을 상상하며 시를 썼다. 그의 등단작 이다.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우리 봉준이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그 누가 알기나 하리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풀이었더니(…하략…)안도현, 중봄이 오는 나루터에 버들개지는 아니 피고역사의 흐름을 아는 것일까? 비비정을 지나면서부터 강은 멀고 깊어진다. 오롯이 서해로 흐르는 것에 집중한다. 강둑으로 나란히 뻗은 강변길은 봄에는 벚나무가 화사하고, 가을에는 억새의 군락이 물결친다. 성숙해진 수량만큼이나 풍광도 좋아서 여유가 있으면 자전거 트래킹이 좋고, 드라이브도 근사하다. 왕궁에서 흘러온 익산천이 합류하면 여기서부터가 춘포다.춘포의 옛 이름은 ‘봄개나루’. 봄이 오는 나루터다. 춘포에서부터 만경강은 중년기에 이른다. 원숙해진 강은 갈대의 무리를 이끌고 노을의 나라로 간다. 슬픔의 지도가 있다면 춘포에서 목천포에 이르는 지역이리라. 만경강변 억새들이 성긴 머리칼을 풀고 바람에 스적이는 것을 보면 왜 이곳을 ‘노화십리(蘆花十里)’라 불렀는지 알 수 있다. 겨울 햇볕에 흐느끼는 억새의 무리와 함께 저물녘까지 있고 싶다. 근처에 있는 ‘춘포 문학마당’은 원고지 모양의 표지판이 인상적이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문학비로 이뤄진 춘포 문학마당은 시조 시인 이병기, 시인 정양, 시인 안도현, 소설가 윤흥길의 작품을 돌에 새겨 거리를 두고 세웠다. 예전에 목천포 다리는 만경강을 오가는 가장 큰 다리 중 하나였다. 지금은 사라진 이 다리는 윤흥길의 소설 에 등장한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비행기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피난민 소녀와 강가 마을에 사는 소년의 사랑, 그리고 슬픈 전쟁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 삶에서 끝나지 않은 채 지속하고 있다.“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꽃 이름이 뭔지 아니?’ 난생처음 보는 듯한,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만 한 들꽃이었다. ‘쥐바라숭꽃……’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윤흥길, 중 만경강은 만개의 고랑에 물을 흘려보내며 서해로 간다. 유난히 풍요로워서 빼앗길 것이 많은 전북의 마른땅을 적시며 사람들의 마을을 지나 흘러간다. 이 강물을 탐내어 일제는 둑을 쌓고 퍼 가려 했다. 동상면에서 발원하여 고산천과 전주천이 합수하고 익산천을 만나 서해를 향해 무장무장 흘러가는 강을 두고 누가 감히 주인을 자청할 것인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어머니 강, 만경강이다. 글 박태건 | 시인익산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랐다.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대안 문화연구소에서 지역문화 연구를 했다. 시집 , 산문집 을 냈다. 2020년 전북작가회의의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가래여울
#전주천
#비비정
“전주 사람의 역사가 곧 전주의 역사이지요”
신동수 어르신 선친의 유언장과 개인 기록물
삶의 좌우명이 된 선친의 유언장제가 무녀독남 독자예요. 그 옛날 독자로 태어났으니,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1971년 남기신 선친의 유언장에도 저에 대한 사랑과 당부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선친께서는 후두암으로 오랜 시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요, 임종 보름 전 유언장을 작성하셨습니다. 유언장에는 다섯 가지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해라, 우리 논을 지켜라, 상급 학교 교사가 되어라, 장례는 가정의례 준칙대로 치러라, 곧 태어날 네 아들 교육에 힘써라”가 그것입니다. 그 유언장을 좌우명 삼아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당시 완주군 간중초등학교에 재직 중이었는데,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노송동에 지금의 전주대학교 전신인 영생대학이 있었어요. 완주에서 근무를 마치고 야간에 영생대학을 다니며 중·고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땄습니다. 사실 제가 근무하느라 선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게 한스럽고 죄송해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거든요. 선친의 유언장이 제가 열심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 제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서울에서 4년, 전주에서 4년 9개월을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수발했는데 하늘도 무심하게 떠나 버렸지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아들에 대한 제 사랑은 모두 선친에게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더군요. 자식을 사랑하는 선친의 마음이 제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10년 가까운 그 힘든 세월을 잘 견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니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쳤습니다. 전주와 함께한 내 청춘의 기록물들 제 고향이 초포리인데, 옛날에는 완주군 하리였어요. 훗날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초포리가 되었지요. 한마디로 전주시 외곽에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전주북중학교까지 왕복 50리 길을 걸어 다녔어요. 새벽에 일어나 별 보고 출발해서 학교에 갔습니다. 당시 전주북중학교가 지금 전주고등학교 자리에 있었거든요. 한 울타리 안에 앞쪽 건물이 북중, 뒤쪽 건물이 전주고였습니다. 그 당시 학교 앞에 전주역이 있었고, 그 역 앞으로 개천이 흘렀어요. 그 옆으로 미나리꽝이 있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제가 선친의 유언장과 함께 제 개인적인 기록물들을 전주시에 기증했는데요. 북중학교 졸업 앨범도 그중 하나입니다. 당시 졸업 사진을 한벽루 앞에서 찍었어요. 제 졸업 앨범 속에 과거의 전주가 살아 있는 셈이지요. 1963년 육군사관학교 입교생 수험표에도 전주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육사가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많이들 선호했습니다. 육사만 나오면 탄탄대로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당시 덕진동에 육군병원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호반촌도 개발되기 전이라 병원 주변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전라북도 육사 지원생들은 모두 그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했어요. 신체검사가 무척 엄했는데, 저는 결국 신체검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때 수험표를 ‘백로지(갱지)’라고 질이 좋지 않은 노란 종이로 만들었거든요. 그 수험표를 보관하고 있다가 전주시에 기증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오래된 종이 한 장일지 몰라도 제게는 참 의미 있는 기록물입니다. 원래도 노란 종이가 세월이 쌓여 더 빛바랜 종이가 되었지만, 제 청춘과 전주의 역사가 담겨 있으니까요. 1964년 호성동사무소에서 발급한 병역신고필증도 그런 의미에서 함께 기증했습니다. 1960년대 전주 시민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개인의 기록물로 전주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파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선친의 유언장과 제 졸업 앨범, 수험표, 병역신고필증 등은 모두 전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두 전주가 만들어 준, 가족의 역사가 담긴 기록물인 거예요.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살아오면서 전주에서 남긴 전주가 준 기록물 말입니다. 그러니 전주시에 기증해야 하는 게 맞지요. 전주 사람의 역사이면서 전주의 역사이기도 한 기록물을 전주시에서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제 기록물이 요즘 사람들에게 ‘옛날 전주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걸 보여 주는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 여러모로 참 힘든 상황인데요, 돌이켜 보면 역병은 주기적으로 돌았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인 1950년대에는 ‘뇌염방학’이란 게 있었어요. 흔히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하죠? 당시 뇌염이 창궐할 때 일주일 이상 방학을 했습니다. 그런 시기를 겪은 사람으로서 지금 상황이 참 안타까워요. 제가 2005년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에서 정년퇴직했는데요. 30년 넘는 교직 생활 동안 전라북도 곳곳으로 전근 다니면서도 늘 전주를 생각했습니다. 제 기록물이 전주와 전주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일흔여덟 살 할아버지의 삶이 담긴 기록물을 보며 젊은 사람들이 조상들의 생활상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동수(77) 어르신은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영생대학을 졸업하고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제9회 전주 기록물수집공모전에 선친의 유언장과 개인 기록물을 기증하여 최우수 기록물로 선정됐다.
2020.12.24
#역사
#기록물
#졸업장
기획 특집
여름은 책이다 – 책과 축제
책을 경외하는 마음 축제에 담다, 2018 전주독서대전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 사랑하는 힘, 질문하는 능력. 지난해 전주에서 열렸던 독서대전의 슬로건이었다.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바로 독서다. 올해 전주는 ‘기록과 기억’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독서대전을 이어 간다. 기록과 출판 분야에 남다른 이력을 지닌 책의 도시 전주만이 해낼 수 있는 이색 축제다. 지난해 ‘대한민국 독서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 전국의 독서인들을 감동시켰던 전주가 올해는 독자적으로 ‘전주독서대전’을 준비한다. 출판사들과 도서·독서 관련 단체 80여 곳이 함께하고, 강연·공연·전시·체험 등 140여 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한옥마을 기와지붕 처마 아래에서 대한민국 대표 작가들과 낭독 삼매경에 빠질 수도 있고, 글쓰기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오는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펼쳐지는 ‘전주독서대전’의 주요 프로그램들을 미리 만나 보자. 만나고 싶었습니다, 윤흥길 소설가현재 완주군에 거처를 마련하고 장편소설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윤흥길 소설가를 독서대전의 첫 문을 여는 강연으로 만난다. , 등 우리 현대사를 다룬 문제작들의 집필 과정과 현재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극배우들이 작품의 주요 대목을 무대극으로 준비해 입체적이고 색다른 강연이 될 예정이다. 일정 | 9. 14.(금) 16:00 장소 | 한벽문화관 공연장 전주가 읽은 작가, 김애란 소설가전주 시민이 뽑은 올해의 책, 의 김애란 작가가 독서대전을 찾는다. 그가 5년 만에 출간한 신작 은 역대 최연소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이상문학상 수상작 와 젊은작가상 수상작 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 김애란 작가의 소설 이야기를 기대해 보자.일정 | 9. 15.(토) 20:00 장소 | 전통문화연수원 그 책, 작가를 만나다‘읽다, 쓰다, 듣다, 놀다, 먹다, 찍다’라는 6개 핵심어로 진행되는 강연. 책방 대표인 정지혜의 ‘읽다:당신을 위한 책 처방’, 글쓰기 강사 은유의 ‘쓰다:글쓰기의 최전선’, 대중문화비평가 이영미의 ‘듣다:세상을 바꾸는 노래’, 박성우 시인의 ‘놀다:아홉 살 마음’, 한승태 작가의 ‘먹다:우리가 먹는 세상’, 이광수 사진작가의 ‘찍다:사진은 칼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이 펼쳐지고, 강연마다 색깔 있는 음악 공연이 곁들여진다.일정 | 9. 14.(금)~9. 16.(일) 장소 | 한벽문화관 공연장 시민공모전, 참여하세요!추천 책 소개 UCC 영상물 공모 , 독서 활동 사진 공모 , 초등학생 만화 그리기 공모 , ‘2018 전주의 책’ 독후감 공모 , 책 속에 등장하는 전주 인증사진 공모 접수 | 8월 15일까지 전주독서대전 홈페이지(http://jjbook.kr) 문의 | 063-230-1813
2020.12.08
#독서대전
#기억
# 글쓰기
멋진 하루
바람 쐬는 길
흘러내리는 물길, 올라가는 오붓한 숲길
기억은 시간을 통해 과거를 그려내고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 이모님 댁을 찾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1970년대 중반의 여덟아홉 살 무렵이었다. 당시 전주역은 우아동에 위치한 현재의 역사가 아니라 전주시청사가 자리 잡고 있는 옛 전주역이다. 서울을 가거나 여수를 가거나 고속버스보다는 철도가 원거리 여행의 교통수단이었던 기억 속의 전주역이 아직도 생생하다.여수로 향하는 전라선은 드물지 않게 터널을 만난다. 터널은 캄캄한 밤과 겹쳐진다. 여수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거리가 멀고, 그곳으로 향하는 곳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모르는 소년의 아득함처럼, 캄캄한 터널은 아직도 먼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그 옛날 전주 동산동 방면으로는 덕진역이 있었고, 남원 방면으로는 남관역이 있었다. 슬치 넘어 관촌으로 향하는 기차들 중에는 신리역에서는 서지 않아 도 남관역에서는 꼭 서야만 하는 열차도 있었다고 한다. 강원도 태백만큼 험악하지 않지만 증기기관차로 슬치고개를 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운 좋으면 하루에 두 번, 어떨 땐 그 이상 잔뜩 숨을 몰아쉰 채 슬치를 넘어야 하는 기차의 전진기지가 남관역이었다. 전주의 남쪽 관문 남관역의 존재 이유였다.마흔 중반 이하의 젊은 세대에겐 전북대 앞에 철길이 있었고 전주시청이 전주역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한벽루 아래 터널이 기찻길이었다는 사실은 어렴풋하게 들었을 법하지만 사십 년이 채 되지 않는 전주를 그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듯하다. 지금의 전주역을 지나 신리로 새롭게 길이 난 게 1981년 5월이기 때문이다.철길은 그렇게 한벽루 밑을 흐르고 옛 전주역에서 출발하는 전라선은 한옥마을을 오른쪽에 끼고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를 지났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오목대와 이목대가 별개로 떨어진 언덕 위의 정자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승암산 아래 능선에 나란히 존재했다. 전라선이 뚫리면서 철로로 인해 승암산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후일에 기린대로가 뚫리면서 거리가 더 넓어졌다. 확연하게 분리된 공간은 본래 한 몸이었다. 하필이면 한벽루 아래로 철길이 났을까 싶지만 운명은 한벽루 아래에 터널을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주천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 철길이 되었다. 터널을 바로 지나면서 좌측에 자리한 전주 자연생태관은 철로가 있던 시절엔 철길 옆 오막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철길로 인해 고립된 삶을 살던 터전이었다. 이 길가에 전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고조인 목조의 고향을 찾아와 왕업의 다짐을 내보였던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다. 1800년대 초 순교자가 처형당했던 마당이 지금의 전동성당이었다. 순교자가 처형된 자리에 전주성을 지탱하고 있던 돌들로 프랑스 신부에 의해 1900년대 초에 전동성당이 지어졌다. 그리고 처형된 순교자들이 치명자산에 하나둘 안장되면서 치명자산은 세계적인 성소가 되었다. 1970년대 이목대를 지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풍남동 일대의 한옥마을 보존이 이뤄졌다고도 한다. 그것이 오늘의 한옥마을로 이어졌으니 철길이었던 이 공간은 수백 년의 역사를 여러 갈래로 담고 있다. 중세 봉건왕조의 창업과 구한말 왕조의 답답한 마음, 그리고 천주교의 피의 역사와 근대문명에 우왕좌왕하던 전주 유림들의 철로에 대한 완고한 반감과 후회가 담겨 있으며 그것이 지금의 모습과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바람 쐬는 길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지금은 이곳을 ‘바람 쐬는 길’이라 부른다. 한벽루 아래 터널로부터 시작해 색장마을 3.4km가량의 구간이다. 철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길에는 나무 터널이 시원하게 드리워져 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자전거로 느리게 달리기 딱 좋은 곳이다. “전주 사람 중에 이 길을 얼마나 찾아보았을까요?”라는 질문에 김 팀장이 대답한다. “아마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 아니고서는 손에 꼽을 것 같습니다. 이름 그대로 바람 쐬기에 딱 좋은 공간이고 여러 가지 보고 느낄게 참 많은 길인데 말입니다. 색장마을 구간과 은석교 너머 신리로 향하는 자전거 도로가 완성되면 편백나무를 쭉 심어 나무 터널로 만들어도 참 좋겠어요. 이 구간만 올해 완성되어도 빼놓지 않을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라고 덧붙인다. 완주군 상관면 신리와 전주시 색장동 구간 중 이어지지 않은 구간을 전주시와 완주군이 함께 자전거 도로로 만들고 있다. 이 도로가 완성되면 한벽루부터 왕복 13km가량의 전주천을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게 된다. 한옥마을 이목대 아래나 향교 아래 또는 전주자연생태관에서 공영자전거를 빌려 이 코스를 도는데 한 시간 남짓 달릴 수 있는 훌륭한 자전거 코스가 될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어 시간 달려볼 만한 길이다. 좀 더 욕심내 신리를 지나 한일장신대를 지나 왜목재 너머 구이로 돌아오거나 화심 방향으로 돌아오면 출발점으로부터 30km 조금 넘는 훌륭한 라이딩 코스가 된다. 시간을 간직한 옛길, 옛 기억 사이에서 도시가 변하면서 옛길은 무용지물이 되고 방치되기도 한다. 광주에서 경상도로 이어지는 경전선 옛 철길은 ‘푸른길’이라는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북한강변 기찻길은 한강 자전거 도로로 훌륭하게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옛 공간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대한 개념이 약하던 때, 새로운 철길을 내면서 기린대로와 바람 쐬는 길로 이어지는 옛 전라선 철길을 배려해 줄 여유가 그 시절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덕진광장, 전주시청사 주변, 바람 쐬는 길에는 철로로서 기능했던 옛 기억을 담아둘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인다.언뜻언뜻 스치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지만 말고,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되 묵묵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구조물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고민이 이뤄졌으면 싶다. 글 김길중 | 한의사김길중 씨는 한의사이자 전주 생태교통시민행동 공동대표이다. 전주시 자전거 다울마당 위원으로 활동했다.
2020.12.07
#전주역
#한벽루
#자전거 도로
금암동 거북바우로
혼자 빨리 가는 길보다 함께 멀리 가는 길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는 이유 금암도서관 앞, 좁다면 좁은 2차선 도로인 ‘거북바우로’가 금암2동을 가로지르며 죽 뻗어 있다. 조금은 낡은 상가 건물, 그 뒤로 새로 놓인 커다란 아파트 단지. 눈에 들어오는 모습 모두가 전주의 경관과 잘 섞여드는 평범한 마을이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발을 들여놓으면 고정된 풍경을 바꾸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거북바우로’의 청년들이다.모인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바람은 같다. ‘세상을 좀 더 신나고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품고 카페며 공방, 청소년 스카우트 활동 공간과 교육 시민단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왜 ‘거북바우로’냐고, 휘황찬란한 번화가를 마다하고 유서 깊은 바위 터에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면 걸어 보면 된다. 그러면 마주치게 된다. 이 동네가 숨겨둔 아주 솔깃한 매력을 말이다. 전주의 ‘화룡정점’으로 탄생한 거북바위천 년도 더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켜 왔다고 보기엔 낯선 모양새다. 전주의 미래유산 10호로 지정된 ‘거북바위’는 높이 뻗은 아파트 단지 앞에 담담히 몸을 웅크리고 들어서 있다. 큰 조경석을 얹고 계단을 깔아둔 덕에 바위가 앉은 야트막한 언덕까지 오르기가 수월했다. 가까이서 보니 위용이 보통은 아니다. 이 바위에는 꽤 격조 높은 설화가 서려 있다. 거북바위는 후백제의 도읍이었던 전주에서 ‘사방신’ 역할을 맡았던 바위라고 전해 온다. 후백제를 만든 견훤이 전주를 지켜 줄 상징물들을 찾다가 ‘용머리 고개’와 ‘기린봉’, ‘승암산’을 지명했다. 그리고 이곳 금암동에 바위를 거북이 모양으로 깎아 이 자리에 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바위는 전주의 ‘화룡정점’으로 탄생한 셈이다.지금은 아파트 주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지만, 거북바위는 여러 차례 사라질 위기를 겪었다. 1982년엔 전주KBS방송국 정비 사업 도중 철거될 위기에 처했고, 2011년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며 또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 천 년의 역사를 견뎌온 거북바위는 앞으로도 전주를 지켜줄 수 있을 듯하다. 가만히 바위 밑 마을을 바라보자니 청년들이 모여든 이유도 짐작이 간다. 이렇게 오래 묵은 마을이야말로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기엔 가장 적격인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청년들은 마을 공동체의 심장에 희망 하나 콕 찍어준 ‘정점’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거북바위’에 기대어 꿈꾸는 청년들 거북바위를 지나 부지런히 길을 따라 걸어 가다 보면 탁 트인 도시 경관을 내려다보며 커피 한잔 즐길 수 있는 카페, ‘해달별커피’가 나온다. 이 카페 덕에 동네에서 마주치기 힘든 20~30대 청년 관광객들을 한 번씩 만날 수 있다. 다둥이 아빠인 청년 사장이 운영하는데, 카페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은 모두 동네 주민이다. 또 매달 수익의 일부를 원도심 지역 청소년들에게 후원하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서 거북바우로의 이웃 길인 ‘매봉16길’로 잠깐 걸음을 옮긴다. ‘땅콩방리본’이라는 작고 예쁜 공방을 찾기 위해서다.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실내 분위기가 포근함이 매력이다. 이곳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땅콩 어린이 시장’이나 ‘골목시장’을 열어 마을 주민과 교류를 하고 있다. 삭막한 동네에 화사함을 선물하는 마을 사랑방이라고 보면 되겠다.마지막으로 ‘코끼리가는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들이 생활하는 곳에 들렀다. ‘사단법인 아름다운배움 전북나래’의 보금자리이기도 한 이곳은 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을 ‘세계 시민’으로 키워 내는 공간이다. 또 학교를 떠나 일찍 사회로 진출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도전할 수 있는 상담소이기도 하다. 거북바우로 위에 모인 청년들은 마을과 지역의 든든한 공동체 의식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한다. 마을이 살고, 주민이 행복해야 결국 청년들도 희망을 싹틔울 수 있다는 뜻이다. 거북바우로를 걷는 걸음걸이가 경쾌하면서도 무거워진다. 길 위에 새겨진 청년들의 꿈이 거북바위처럼 묵직하게 다가와서가 아닐까.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듬직하게 완만한 언덕 도로를 따라 내리막이 나올 때까지, 걸음은 제법 걸었어도 마음은 넉넉해진다. 거북바우로를 완주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물론 걷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 따라 시간은 달라진다. 먼저 청년들을 만나 보는 것을 추천한다. 길만 따라 걷기보다는, 길에 올라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더 즐거우니까 말이다.아프리카 속담 중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돌아보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같이 가려는 것이 아니라면 빠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곳 ‘거북바우로’의 산책 방식은 그렇지 않다. 급히 색칠하고 빨리 발전하려는 걸음법보다는,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듬직하게 마을 주민과 나란히 걷는 걸음법이 더 어울린다. 전주의 ‘정점’을 찍고 싶은 청년들이 거북이처럼 걸음을 느리게 시도해 보는 풍경, 언젠가 전주의 마을 곳곳에서 마주칠 미래가 아닐까. 글 이동훈 | 코끼리가는길 대표이동훈 씨는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 전주로 내려온 청년 활동가이다. 현재는 ‘코끼리가는길’, ‘사단법인 아름다운배움 전북나래’ 대표로 활동하며 청소년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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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군산 시간여행
근대와 현대 사이 시간 위에 펼쳐진 역사를 만나다
아득한 기억 속의 보물창고“햇살이 아프도록 따가운 날에는… 난 거기에 가지.”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이 걷히고 며칠 만에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전주에서 광역투어버스를 타고 군산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단 두 장의 앨범으로 전설이 되어버린 포크듀오 ‘어떤날’의 노래다. 군산은 외갓집이 ‘있었던’ 곳이다. 굳이 과거형을 쓴 이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셔서 이젠 나에겐 외갓집이라는 장소성이 사라진 탓이다. 외갓집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의 맞은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할머니는 조그마한 선술집을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내항에 배가 들어왔고, 배가 들 때마다 밀물처럼 선원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그들에게 할머니는 막걸리와 음식을 파셨다. 외갓집은 나에게, 선원이 주고 간 바나나와 미군PX에서 흘러나온 온갖 초콜릿과 사탕을 맛볼 수 있었던, 일종의 보물창고였다. 아픈 식민지의 기억, 군산근대역사문화거리아득한 기억을 더듬다보니 금세 군산 경암동이다. 철길이 동네를 가로지르고 있어서 유명해진 경암동은 사실 묘한 경관을 지닌 곳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드물고 살림집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도 많고 가게가 많이 들어섰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는 곳은 지번으로 ‘장미동’이다. 어렸을 때 나는 단순히 외갓집의 동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쌓을 장(藏)에 쌀 미(米) 자를 쓴 이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수탈되던 쌀이 항상 쌓여 있었던 곳이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그래서 군산 구도심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은행과 나가사키18은행, 군산세관과 미즈상사 등 식민지 수탈의 거점으로 쓰였던 건물들뿐 아니라 일본인이 거주하던 집들도 많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곳이 히로쓰 가옥과 동국사다. 히로쓰 가옥은 전형적인 일본 무사의 집 형태를 지녔다는 점에서, 동국사는 현재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일본식 사찰 중 하나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최근 군산시는 이 건물들을 식민지시대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재조성하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가 다르게 거리가 변하고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일본식 전통 가옥, 군산 히로쓰 가옥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유산, 군산 신흥동에 위치한 히로쓰 가옥은 일제강점기 포목점과 농장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목조 주택이다. 근대 역사를 한옥으로 새긴 공간, 전주한옥마을 좀 걸었다고 피곤해졌는지 전주까지, 송재학의 시를 빌자면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어” 순식간에 왔다. 관광지로 개발된 후부터는 전주한옥마을을 자주 가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고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들이 하나씩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주한옥마을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주를 처음 방문하는 손님이 오면 나는 그들이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에 서서 풍남문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는 조선 왕의 초상을 모신 경기전과 천주교인이 최초로 순교한 곳인 전동성당이 바로 코앞에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도 기막힌데, 일제에 의해 전주성곽이 허물어질 때 나온 돌로 전동성당을 지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막히다는 설명을 해준다. 한옥마을이 현재의 모양을 갖추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이다. 웨딩거리라 불리는 중앙동 일대가 중심 상가로 조성되고 풍남동에 일본인이 거주하게 되면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교동 인근에 터를 잡아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중앙동과 풍남동, 교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한옥부터 해방 이후에 지은 생활 한옥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공간이다. 가히 근대 100년의 역사를 한옥으로 새긴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선비촌이기도 하다. ‘정승 열 명이 왕비 한 사람만 못하고, 왕비 열 명이 산촌의 선비 한 사람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 선비는 각별한 대우를 받은 존재였다. 성리학적 이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라고 볼 수 있는 선비가 집단으로 모여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한옥마을은 달랐다. 금재 최병심, 고재 이병은, 강암 송성용, 성당 박인규 등 근현대 호남유학의 대를 잇는 큰 학자들이 모여 살았고, 그분들이 생활했던 집과 후학을 양성했던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전주향교가 위험해지자 전북 각지에 살던 유학자들이 하나둘씩 향교를 지키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기린대로를 중심으로 이목대 쪽에는 금재가 후학을 양성했던 옥류정사와 성당이 살았던 구강재가 있다. 그리고 오목대 쪽에는 고재가 학문을 닦았던 남안재와 강암의 묵향이 담긴 아석재가 있다. 그러나 보통 관광객이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다니기는 쉽지 않다. 일단 정보가 부족하고 정보가 있더라도 골목골목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향교 옆에 있는 남안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지나쳤다. 고재의 아들이자 향교전의를 지낸 이남안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2000년대 초, 처음 한옥마을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어 가끔 인사도 드리고 막걸리도 한잔씩 하곤 그랬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서야 들었다. 참 쓸쓸하다. 나에겐 또 하나의 장소가 사라졌다. 어떤 의미에서 전주한옥마을은 우리 역사의 ‘실루엣’일지도 모른다. 조선과 근대의 기억이 비극적으로, 때로는 혁명적으로 시작되던 그 어떤 순간을 저장한 세계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처럼 ‘햇살이 아프도록 따가운 날’이 또 오면 다시 ‘거기’에 가고 싶을 것 같다. 태조 어진을 모신 사당, 경기전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당이다. 경기전 어진은 현존하는 태조의 유일한 초상화로 전주에서는 해마다 태조 어진 봉안 의례를 행하고 있다. 글 이경진 | 문화기획자이경진 씨는 한때 시를 썼던 시인이지만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화기획자나 중간지원조직활동가로 더 알려져 있다. 현재는 완주문화특화지역조성사업 단에서 마을조사 총괄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2020.11.27
#광역투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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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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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2019 전주의 약속
2019 새로운 전주시대가 열린다
전 분야 일자리 창출로‘활력경제’일자리는 가장에겐 가족을 지키는 힘이고, 청년에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다. 시민의 삶이자 희망인 일자리. 2019년 전주는 구석구석 도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전통산업부터 미래산업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를 위해 시정 전 사업에 걸쳐 ‘지역경제활성화 기여도 평가제’를 도입하여 시작부터 끝까지 일자리를 집중적으로 챙길 계획이다. 아울러, 일자리 창출과 직결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을 대폭 확대한다. 소상공인 영세기업에게 사업 공간을 제공하고, 카드수수료 0% 정책도 조례제정 등을 통해 단계적으로 실시한다. 또한 창업카페, 3D프린팅지원센터, 스마트 미디어센터 등을 갖춘 지식산업센터가 팔복동과 노송동에 각각 건립된다. 무엇보다 팔복동의 변화가 주목된다. 팔복예술공장, 야호예술놀이터, 예술기찻길, 금학천 생태복원 등 4대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북부권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역특화 신성장산업 육성에도 박차를 가한다. 세계 최초로 드론축구를 개발한 전주는 2025년 전주드론축구월드컵 개최를 목표로 관련 인프라를 강화하고, 글로벌 드론축구 육성에 힘쓰면서 세계적인 드론메카도시로 발돋움한다. 팔복동, 동산동, 고랑동 일대에 조성되는 탄소소재 국가산업단지는 관련 기업을 집중 유치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탄소복합소재의 표준화와 탄소섬유의 상용화에 집중 투자한다. 또한 금융산업 전문인력 양성, 3D프린팅,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전주형 스마트시티를 구축한다.도시재생은 지역 경제에 숨을 불어넣는 뜨거운 힘이다. 완산권역 구도심 100만 평은 아시아문화심장터로 재생한다. 2019년 전라감영 1단계 복원이 완료되면 문화심장터의 핵심 공간이 될 것이고, 20주년을 맞는 전주국제영화제 위상에 걸맞은 독립영화의 플랫폼 ‘전주독립영화의 집’도 건립된다. 덕진권역은 지난 8월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된 전주 역세권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한옥형 선상역사를 신축하고 청년 창업자와 예술인들의 활동 공간을 조성한다. 또 법원․검찰청 부지에 ‘한국문화원형콘텐츠 체험 전시관(가칭)’고 ‘법조삼현기념관’까지 들어서면 덕진 뮤지엄밸리의 꿈에 한층 가까워질 것이다. 오래된 것은 다시 살리고, 새로운 것에는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2019년 전주는 도시 곳곳에서 굵은 땀을 흘릴 것이다. 시민의 삶을 존중하는 ‘생태도시 전주’생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전주시는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에 주력할 방침이다. 시민이 일상 속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인 미세먼지. 전주시는 미세먼지로부터 시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해결 방안으로 천만 그루 나무 심기를 시작했다. 2026년까지 천만 그루 나무와 꽃을 심어 전주시 전체를 대규모 정원으로 만드는 것인데, 바로 ‘천만 그루 정원도시 전주 프로젝트’이다. 백제대로, 팔달로 등 주요 도로마다 도시 외곽의 찬 공기를 도심 중심부로 끌어오고 확산시키는 바람길 숲을 만들고, 시민 곁에 도시 숲을 조성할 예정이다. 팔복동 고형연료 소각시설 문제도 행정적 대응과 함께 정부 차원의 법 제정과 개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해나갈 계획이다. 또, 대기질 개선을 위해 미세먼지 분진흡입차량을 구입, 도로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를 줄이고 전기자동차 구매와 노후 경유차 조기 폐차도 적극 지원한다. 악취를 줄이기 위한 예산도 과감하게 투자한다. 전라북도・김제시・완주군과 공동으로 혁신도시 악취 저감을 위해 노력하고, 삼천둔치 악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주종합리싸이클링타운 음․폐수 전용관로를 신설할 계획이다. 대전동물원의 퓨마 사살 소식이 알려지면서 동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는 요즘, 전주동물원은 동물이 행복한 생태동물원으로 평가받으며 중앙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민선 6기부터 시작한 생태동물원 개선 사업으로 큰물새장, 사자․호랑이사, 늑대사, 다람쥐․원숭이사, 코끼리사, 곰사를 친환경적인 시설로 개선했으며, 전주동물원의 마스코트가 될 수달이 적응 훈련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내년에는 시베리아호랑이사․원숭이사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걷고 싶은 도시, 대중교통이 편리한 도시,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기린대로․장승배기로에 자전거도로를 개설하고, 지능형교통체계 ITS 구축 사업을 통해 차량 정체가 자주 발생하는 주요 도로의 정체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다. 아울러 버스 타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버스정책추진단이 꾸려져 시민들과 함께 지혜를 모을 계획이다. 또, 북부권 국도 대체 우회도로를 건설하고, 견훤로 교통체계 개선・객사길 보행환경 개선 사업도 역점적으로 추진한다.
2020.11.10
#일자리
#경제
#생태도시
#정원도시
미리 만나보는 ‘2019 내 곁의 변화'
견훤로 차선 확장, 출퇴근길 뻥 뚫린다!전주의 새해가 길따라 시원하게 뻥 뚫린다. 대표적인 상습교통정체구간인 전주시 명주골네거리에서 호성네거리까지 견훤로 구간의 교통 정체 해소를 위해 새해 3월부터 교통 체계 전면 개선 공사를 추진한다. 전주시는 2020년까지 견훤로의 기존 양방향 4~5개 차선을 6~7개 차선으로 늘리고, 우아중 앞 호성로 구간에 대해서도 일부 확장 공사를 시행할 계획이다. 완주군 용진·봉동 방향으로 출퇴근하는 차량이 몰려 교통 체증이 심각했던 견훤로. 이제 출퇴근 시간에도 가슴 졸이는 일은 그만! 금암광장 교차로, 혼란도 우회거리도 다 줄어요안전 먼저 챙기는 교차로의 변신! 기린대로와 팔달로, 가리내로 등 전주의 주요 도로가 만나는 금암광장 교차로가 달라진다. 기린대로와 팔달로의 양방향 체계를 일 방향으로 전환하고, 팔달로와 기린대로의 교차지점을 시청 방향으로 약 150m 떨어진 기린대로상으로 옮겼다. 5지 형태의 불합리한 기하구조를 4지 형태의 교차로로 바꿔 차량이 엉키는 현상이 줄어든다. 전주시는 2019년 5월까지 교차지점 및 시내버스 승하차장에 도시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새로워진 금암광장 교차로는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를 위한 안전한 도로로 다시 태어난다. 혁신도시 기지제, 명품 생태공원으로 변신해요혁신도시 기지제가 시민들을 위한 생태공원으로 확 바뀐다. 전주시는 총 40억 원을 투입해 기지제 주변에 총 길이 1.37㎞ 규모의 순환형 산책로를 조성한다. 물 위를 걸으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수중 데크가 설치되고, 육상 산책로 교량도 설치될 예정이다. 특히, 기지제 순환형 산책로는 장애인과 노인, 임산부, 유아 동반자,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인해 일시적인 배려가 필요한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민들이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노선과 완만한 경사도로 계획됐다. 기지제의 습지와 수중, 육상 등 구간별 다양한 보행 환경을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생태 탐험, 전주에서 즐겨보자. 팔복동의 세 번째 변화, 맑은 금학천에 발 담가요팔복동 산업단지 옆에 위치한 금학천이 1년 내내 맑은 물이 흐르고 사람이 모이는 생태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전주시는 팔복예술공장 2단지 예술터 조성사업, 철길 명소화 사업에 이어 2020년까지 금학천 지방하천 정비 사업을 시작한다. 과거 장마철 집중호우 시 주변 주택과 공장건물 1,300여 동, 농경지 200여㏊가 침수 피해를 입었던 팔복동 산업단지 주변이 침수 걱정을 덜게 돼 환경과 안전 모두를 지킬 수 있게 된다. 6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낙후되었던 팔복동 공단 환경이 가장 문화적인 사람 중심의 공간으로 재탄생, 지속 가능한 생태문화도시로 또 하나의 꿈을 실현 중이다. 객사길일방통행, 손잡고 편히 걸어요전주의 핫 플레이스 객사길이 ‘더 걷고’ 싶어진다. 일명 객리단길로 불리는 전주 객사길의 교통 체계가 일방통행으로 바뀌었기 때문. 불법주정차 차량과 양방향으로 주행하는 차량 사이를 아슬아슬 피해 다녀야 했던 시민들이 편안하게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됐다. 전주시는 전주객사1·2·3길 5개 노선(1.7km 구간)의 교통 체계 개선을 위한 교통시설물 설치를 마무리하고, 지난 11월 말부터 일방통행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시행 구간은 전주초등학교에서 충경로 방향, 객사1길 도로, 전주천에서 전주중앙교회 방향, CGV영화관에서 천변 방향이다. 또, 불법 주정차를 강력하게 단속하여 보행 환경을 개선할 계획이다. 사람 중심의 도로로 확 바뀌는 전주객사길, 더 많은 발길로 지역 경제도 더욱 활기를 띌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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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뿌리를 찾는 일에 함께하겠습니다”
송현석 씨가 소개하는 보물 같은 수집품
묵은 추억을 한 권 책으로 지금은 관광지인 전주한옥마을 한복판에 낙타표 문화연필 공장이 있었다고 해요. 1940년대니까 제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에요. 문화연필은 전주에 본사가 있는 향토 기업이었지요. 공장 전경이 담긴 안내서를 비롯해 여러 장의 포스터와 연필 케이스까지 문화연필에 관련된 이 많은 자료를 어떻게 가지고 있냐고요? 수집 활동을 하는 이들과 교류하던 중, 각종 자료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낡은 연습장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고물이었어요. 아마 쓰레기 더미에 버려져 있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을 일일이 오려서 시험지 종이 위에 붙이고 비닐을 씌운 뒤 앨범에 철을 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을 완성했어요. 얼굴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묵은 추억을 새로이 옮겨 보물로 되살려 냈다고 생각해요. 평범한 졸업 앨범이 기록 유산으로 전주농고와 전주여고 졸업 앨범 역시 수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구했어요. 각각 1937년과 1940년도 앨범인데 상태가 썩 좋은 편이에요.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의미 있는 사진이 눈에 띄어요. 운동장에서 일장기를 올리는 장면을 통해 우리 근대사의 아픔을 만날 수 있어요. 풍남문과 오목대, 한벽굴 같은 명소들의 당시 풍경을 발견하면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지요. 학생들의 모습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고요. 80여 년 시간 동안 대부분의 졸업 앨범이 불에 타거나 분실되고, 제지공장에 팔리는 등 수명을 다했을 거예요. 지금껏 용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희소가치가 충분한 기록 유산이지요. 이 밖에도 전주 소재의 양조회사인 월성소주에서 만든 달력, 전주 태생인 김해강 시인 친필 편지 등 전주의 근현대사를 통과해 온 자료들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찾아서 예전엔 각 도별로 ‘도민증’이라는 게 있었어요. 지금의 신분증이었죠.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의 참가 비용을 마련할 목적으로 ‘올림픽 후원권’이 발행되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인 셈이죠. 이 외에도 우표와 옛날 동전, 호롱불과 성냥갑까지.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한때는 서민들과 일상생활을 함께하던 것들을 수집하고 있어요.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한 건 20여 년 전이에요. 어릴 적부터 우표나 동전 모으기를 즐기다가 성인이 된 후까지 쭉 이어 왔으니 꽤나 오랜 취미이지요. 단순히 소장을 목적으로 수집을 시작했는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수집품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어요. 학창 시절과 비교해 오늘날의 전주 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특히 등․하굣길을 걷던 기억이 향수로 남아 있어요. 완주군 소양에서 출발해 아중리를 지나 시내에 이르는 도로 양옆으로 포플러 가로수가 아름드리 늘어서 있었어요. 그 풍경이 사라진 게 안타까워요. 하물며 사람들의 생활상이 변화한 건 말할 것도 없겠지요. 기록물이 없었다면 그 변천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의 뿌리를 잇는 뜻깊은 일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모든 것이 훗날에는 기록물이 될 수 있겠죠. 지난날의 기록물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속속들이 이해하듯이, 지금 우리의 삶을 내일에 알릴 귀한 사료가 될 거예요. 하찮은 물건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말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모아 온 물건들을 전주시의 기록물 공모전에 꾸준히 출품할 생각이에요. 전주시에서 뜻깊은 일을 하는 만큼, 저도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요. 기록물 중에는 부식되기가 쉬워 보관이 까다로운 것들이 많거든요. 개인이 보존하기에는 한계가 있는데, 전주시가 나서서 관리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에요. 앞으로도 우리의 뿌리를 찾고 이어가는 작업에 동참하겠습니다. 완주군 소양면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송현석 씨는 전북을 거의 떠나본 적 없는 우리지역 토박이이다. 어릴 적부터 수집이 취미였던 타고난 수집가이다.
20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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