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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목록(155건)
전주의 꽃심
“내 삶의 소소한 기록이 전주의 역사가 됩니다”
탁경식 어르신이 추억하는 전주의 옛 모습
온 동네가 부채를 만들던 석소마을1968년 우아동 농지를 사면서 뙤집을 함께 샀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낯선 뙤집은 잔디와 흙을 쌓아 지붕을 얹은 집이에요. 쉽게 말하면 초가집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에 샀던 그 집은 석소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었고,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인 김동식 명인의 외조부가 사시던 집이었습니다. 듣기로는 조선시대부터 부채를 만든 집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 집이 훗날 석소마을이 부채마을로 불린 시작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죠. 인후동, 진버들, 산등성이 너머 마을까지 부채를 만들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석소마을에 살던 김동식 명인의 이모, 이모부, 외삼촌 등 외가가 모두 부채를 만들었어요. 그때가 석소마을이 부채를 한창 만들던 때였거든요. 여름엔 마루에 앉아서, 겨울엔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부채를 만들곤 했지요. 아중지구가 개발되기 전까지 석소마을에선 온 동네가 함께 부채를 만들었습니다.흔히 부채를 한 사람이 만든다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대나무 깎는 사람, 대나무에 풀을 발라 한지를 붙이는 사람, 손잡이에 달린 고리만 만드는 사람, 여러 사람 손을 거쳐야 비로소 부채 하나가 완성됐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부채를 저도 하나 구입했지요. 당시 쌀 한 말 가격을 줬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부채가 김동식 명인의 외삼촌, 이모, 이모부 손을 거쳐 김동식 명인의 손에서 완성된 부채예요. 행복했던 시절을 사진으로 기록하다석소마을에 살던 20년 동안 사진을 참 많이 찍었습니다.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도 참 열심히 찍고 다녔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 가족들의 삶을 사진으로 남기면 그게 바로 우리 가족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역사가 별건가요? 사진 한 장만 봐도 역사가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특별한 순간만 찍은 것도 아니에요. 마루에 걸터앉아 웃고 있는 어머니와 아이들 모습, 아이들이 강아지와 즐겁게 놀던 모습, 이사하던 날 트럭에 짐을 싣는 모습 등 일상적인 순간들을 찍었습니다. 가족들 모습 외에도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모두 사진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전주시에 기증한 옛 아중초등학교 사진과 1982년 전국소년체육대회 사진도 그렇게 찍은 겁니다. 딸아이가 중앙여고를 나왔는데 1학년 때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육대회에 참여했어요. 그때 따라가서 찍은 사진인데 그때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사진을 보면, 아름다웠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게다가 그 당시 종합운동장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 전주의 역사를 담은 사진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역사가 전주의 역사가 되다역사라는 게 어찌 보면 아주 대단한 게 아니에요. 우리 삶 자체가 역사로 남는 거니까요. 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기록물들도 그저 제 삶의 일부분일 뿐입니다.만약 저 혼자 간직했다면 그저 추억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예전 전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빌딩이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과거에는 논밭이었고 초가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많이들 모르잖아요. 우아동 농지와 토지 매매계약서를 비롯해 뙤집 사진, 옛 아중초등학교 사진, 1982년 전국소년체육대회 사진 등이 결코 대단해서 기증한 게 아니에요.하지만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시 땅 한 평을 160원 주고 샀어요. 자필로 쓴 매매계약서에 그 사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매매계약서 한 장에서도 그 당시 땅값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게 바로 역사가 아닙니까? 소소한 삶도 소중한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문서 한 장, 사진 한 장이 개인을 넘어 전주의 역사로 남을 테니까요. 내 삶을 기록했을 뿐인데 전주의 역사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디 기억하지 말고, 기록하길 바랍니다. 탁경식(75) 어르신은 ‘부채마을’로 불린 석소마을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동안 모아 온 기록물들을 전주시에 기증해 제3회, 제4회, 제5회 전주기록물수집공모에서 연달아 수상하기도 했다.
2020.09.10
#초가집
#뙤집
#석소마을
#부채
잘 고쳤다 이 집
오래된 주택을 동네 문화 거점으로
인봉집
구도심에서 하룻밤 낭만을 채우는 집노송동 풍경이 으레 그렇다지만 ‘인봉집’이 자리한 중노송동은 30년 전 추억이 물씬 떠오르는 아기자기한 옛 모습 그대로다. 인봉집 역시 별다를 것 없는 오래된 주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트클러스터 별의별’의 고은설 대표가 이곳을 ‘도시 민박’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면서 새로운 동네 문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노송동 주택들은 한옥과 양옥이 오묘하게 섞인 건축양식이 특징이에요. 또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주문하고 설계해서 구조가 각양각색 개성이 넘치죠. 아파트와는 확연히 다른 생활방식과 감성이 공간 전체에 묻어난다고 할까요.”입구부터 펼쳐진 돌담길을 따라 오르면 차 한잔 마시기 딱 좋은 고즈넉한 정원이 시선을 붙잡는다. 정원에서 바라본 ‘동네 경치’도 눈에 걸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하다. 벽돌로 만든 집 외벽과 큼직한 옥상은 1980년에 지어진 오래된 집다운 모양새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색다른 실내 풍경이 또 보는 맛을 더한다.큰 테이블이 있는 거실과 현대식으로 고친 화장실, 큼직한 다용도실, 4개나 되는 방까지. 인원이 많아도 넉넉히 숙박이 가능하다. 2층 침대와 간이 침대, 널찍한 창과 테라스를 보면 퍽 세련된 느낌이 들지만, 나무 계단과 원목 벽면은 옛 모습 그대로라 독특한 조화를 뽐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이랄까. “오래된 주택이 뿜는 정취는 보존하면서도 깔끔하게 하룻밤을 보내도록 꾸몄어요. 낭만은 낭만대로, 편리함은 편리함대로 다 즐길 수 있어요.” 동네 사람이, 동네답게 고친 동네 문화 거점인봉집은 고은설 대표와 동네와 주택이 좋아 서울에서 전주로 내려온 서미영 씨가 합심해 만든 공간이다. 이곳이 여느 유명 게스트하우스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민박 명소이자 동네 문화 거점으로 성장한 힘은 바로 두 사람의 도시재생에 대한 신념과 철학 속에서 나왔다.노송동의 동네 문화 거점은 인봉집말고도 더 있다. 전시·강연 공간인 ‘사철나무집’, 동네 예술 교육 배움터 ‘철봉집’이 그 주인공. 고은설 대표는 세 집을 기반으로 전주시 사회혁신센터와 협력해 청년들이 살 집을 직접 고치고 거주하도록 돕는 ‘청년, 전주 일 년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가 하면, 시민 개개인이 직접 종노송동 도시재생에 참여할 수 있는 펀딩을 열기도 했다. 또 ‘로컬DIY스쿨’을 통해 주민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우리 동네 리빙랩’을 진행해 인봉마을의 동네 기억과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등 도시재생을 실천하고 있다. 12월 개관을 목표로 공사 중인 ‘희희당’과 ‘인봉라운지’도 기대되는 공간이다. 희희당은 청년들에게 주거 공간을 마련해 주는 청년쉐어하우스이며, 인봉라운지는 다른 공간들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거점 커뮤니티 공간이자 주민 카페다. 고은설 대표는 이 모든 공간을 연결한 프로그램을 통해 동네의 자립이 가능한 도시재생 사례를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동네에 청년을 살게 하고, 동네 사람을 고용하고, 동네 문화가 자생하는 동네 생태계가 완성되는 거죠.” 앞으로도 노송동에 ‘별의별 집’들이 가득 세워지기를 바란다. 인봉집주소│전주시 완산구 인봉 1길 21-10문의│010-8979-9977
#별의별
#도시민박
#로컬DIY
#리빙랩
“1950년대에도 전주는 이미 영화의 도시였습니다”
한경수 어르신이 추억하는 영화의 도시 전주
운명처럼 시작된 간판장이의 삶그때가 아마 열대여섯 살 때였을 거예요. 그때 다니던 공장 바로 뒤에 옛 도립 전주극장이 있었어요. 일하다 보면 극장 스피커에서 나오는 영화 소리도 들리고, 고개를 돌리면 극장 간판도 보이고 그랬지요. 근데 하루는 전주극장에 걸 영화 간판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이 왠지 관심이 가더라고요. 간판 그리는 일을 생각한 게 바로 그때부터였던 듯해요. 결국 공장은 그만두었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한 1년 정도 방황하다 결국 새로 생긴 시민극장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영화 간판을 그려 보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기회가 찾아온 거지요. 2년간 시민극장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중 더 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전라북도 최고의 극장이었던 도립 전주극장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메인 간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당시만 해도 영화가 개봉되면 시내 사거리에도 간판 그림이 걸렸거든요. 일종의 광고인 셈이죠. 바로 그 그림을 먼저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뿌듯했던 40년 세월사거리 광고판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다 실력을 인정받아 전주극장 메인 간판을 그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바라 왔던 일인데 결코 쉽지만은 않았어요. 우선 간판이 워낙 크다 보니 그림을 그릴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어요. 건물 밖 한편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환경이 보통 열악한 게 아니었어요. 여름엔 더워서 지치고, 겨울엔 추위에 손을 불어 가며 그려야 했지요. 그저 단순한 돈벌이라 생각했으면 못 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뛰는 순간이 있습니다. 완성된 간판이 극장에 붙고 불이 켜졌는데 그 앞에 어마어마한 관객들이 보이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간판이 극장의 얼굴이었거든요. 그 얼굴을 그린 사람으로서 관객들이 많으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요. 그게 버팀목이 되어서 40년 넘는 세월을 버티면서, 그림을 그려 왔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셀 수 없이 많은 간판을 그렸는데요, 하나같이 소중합니다. 너무 많이 그렸기에 어떤 작품을 손꼽기는 쉽지가 않아요. 다만, 나 같은 명작들을 그린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2001년 은퇴하기까지 정말 수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붓을 놓고 살다 보니 시원섭섭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은진교회’ 목사님이 교회 벽면에 그림을 그려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셨습니다.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천지창조 과정을 그렸습니다. 꼬박 보름 동안 그렸는데 힘들었지만 예전 생각도 나고 참 뿌듯했어요. 영화의 도시로 언제까지나 사랑받기를오늘날 전주가 영화의 도시로 불린다지요? 전주에서 오랜 시간 영화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전주 시민으로서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앞으로도 그 명성을 이어 갔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런 마음에서 전주시에 영화 관련 사진을 기증했습니다. 총 두 장을 기증했는데, 그중 하나는 당시 도립 전주극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와 찍은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1959년 개봉돼 큰 사랑을 받은 간판 사진입니다. 사실 정말 오래된 사진들이고, 간직하고픈 추억이라 선뜻 기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고 싶기도 하고,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오늘날 못지않게 옛날에도 전주는 영화의 도시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더군요. 이런 제 마음이 전해져서 전주가 그 옛날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영화의 도시로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한경수(80) 어르신은 간판장이 1세대다. 해방 직후 도립 전주극장의 간판부터 전주의 웬만한 영화 간판들은 모두 어르신의 손을 거쳤다. 2016년에는 은진교회 담장에 아홉 폭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전주극장
#간판장이
#은진교회
멋진 하루
만경강으로 가는 길
만 가지 이야기를 품고 흐른다
그리운 미나리 부대를 회상하다전주의 물줄기는 결국 만경강으로 흘러간다. 노송천, 아중천, 관선천, 건산천은 전주천으로, 중인리와 독배, 구이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삼천으로 합쳐진다. 그리고 전주천과 삼천은 만경강의 품에 안긴다. 물줄기에는 사람의 구비가 있다. 이야기와 사연이 구비마다 서린다. 전주의 만 가지 이야기를 품고 흐르는 만경강은 전주천이나 삼천의 속살 깊은 이야기로 더욱 유장하다.‘국민학생’으로 불렸던 여덟 살 무렵, 풍남동과 노송동을 가르는 철길 아래로는 관선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를 두고 우리 꼬마 사회는 양분되어 있었다. 내가 속한 풍남동 조직은 서점을 하거나 자전거 수리점, 목공소 집 자녀들이 한 무리를 이뤘다. 그에 비해 미나리 농사를 짓는 집이 많았던 노송동 아이들은 미나리 부대로 불렸다. 종종 미나리 부대 아이들과 풍남초등학교에 모여 공을 차고 놀았다.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아버지의 고향인 삼천동 비아마을에서 살았다. 비아마을과 인근의 마을은 종종 기접놀이를 벌였는데, 아버지는 꾀꼬랑나발(태평소)을 부셨다. 밀레니엄 무렵의 어느 해인가는 풍남문의 제야의 종 행사에서 아버지가 나발을 분 기억도 난다. 그 당시 삼천교 인근의 도로는 비포장이어서 버스가 지날 때면 ‘부르크’ 담장 호박잎마다 뿌연 먼지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버스 창가로 가득 미나리 밭이 펼쳐졌다. 언제부터인가 삼천 인근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미나리 밭이 사라졌다. 그리고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볼 수 있었던 미리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삼천은 나에게 모천과도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되면서 삼천에 눈빛 순하게 떠오르는 별빛 대신 아파트의 불빛이 독하게 피어올랐다. 그런데 아직 내 유년의 강이 거기 만경에 있었다. 층층의 논과 소담한 마을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흐르는 만경강, 우리는 거기로 모였다. 가을 햇살과 함께 만경강을 거닐다만경강은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익산, 전주, 김제, 군산을 거쳐 새만금으로 흘러 서해에 닿는다. 만경강으로 가는 길은 온통 논으로 푸르렀다가 가을이 되자 황금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대지는 어디로 이 많은 색을 거두는지 파란 하늘 끝이 광막하다. 어디 자연만 광막하다 할 것인가? 저 알곡을 만들기까지 농부들의 땀으로 벼 이삭이 숙연하게 고개를 숙인다.10월의 가을볕이 좋은 날, 전주농생명소재연구원 정승일 본부장, 전주빵 장윤영 대표, 디자인농부 김요섬 대표와 함께 만경강에 모였다. 전주 최고의 농업 지역으로 보리나 밀, 쌀 등이 많이 나는 만경강은 우리들에게 공통분모다. 지역 원료로 지역 농・특산물을 만들거나 연구하는 우리들에게 만경강은 삶의 터전이자 모태다.디자인농부(주)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날것의 곡물에 디자인을 입혀 휴대하기가 쉽고 먹기도 간편한 미숫가루와 콩가루 등을 생산한다. 전주빵은 전주 밀로 전주의 대표 상품 중 하나인 비빔빵을 만들고 있다. 술로시티는 전주 보리로 전주만의 맥주를 만들고 있다. 전주농생명소재연구원은 각 기업들의 연구 개발을 지원한다.만경강은 시민들에게도 보물단지와 같은 곳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전주는 열섬이 생겼다. 미나리와 벼가 자라던 삼천동, 평화동, 송천동, 서신동, 중인동 등의 논이 도심으로 바뀌면서 전주는 뜨거운 여름을 맞게 되었다. 열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업 지역에 대한 개발을 멈추고 곳곳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 그리고 강바람이 도심에 스며들 수 있도록 만경강을 잘 가꾸어야 한다.주말에 만경강에 나가면 잘 가꾸어진 자전거도로를 따라 라이딩을 할 수 있다. 또한 뚝방길 정자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만히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전주천과 삼천 지류 곳곳에서 살고 있는 그리운 얼굴들이 생각날 것이다.우리는 가을 햇살이 뜨거운 만경강을 걸었다. 바야흐로 나락이 야무지게 영글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몸을 낮추며,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우리는 만경강에 모여 강물 소리를 듣듯 서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글 유상우│술로시티 대표유상우 씨는 지역의 원료로 술을 빚는 양조자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술로시티 브루어리’를 운영하며, 술과 함께 농업이 잘 익어가는 풍요로운 도시 전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만경강
#전주천
#뚝방길
기획 특집
2020 이영차, 전주!
시민이 묻고 전주가 답하다
Q. 금암분수정원, 어떻게 만들어지나요?A. 금암광장 교차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하시죠? 전주시는 2018년, 오거리 형태의 불합리한 기하 구조를 네거리 형태의 교차로로 바꾼 이후 불필요해진 팔달로와 기린대로 중앙 교통섬을 팔달로 상가 쪽으로 옮겨 기린대로를 순방향 직선화하기로 했는데요, 팔달로 상가 쪽으로 옮겨지는 교통섬에는 도심 속 정원을 조성할 계획입니다.현 금암교통광장에는 옛 금암분수대를 복원한 옹달샘 분수와 도래도래샘터, 원형 벤치, 경관조명 등을 설치합니다. 또, 팥배나무, 윤노리나무, 꽃아그배나무, 때죽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를 식재해 금암분수를 조성할 예정이랍니다.옛 기억을 되살리고 천만그루 정원도시의 가치를 담아 조성될 금암분수정원은 물과 꽃과 나무와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 갈 예정이니, 2020년 봄 새로운 정원에서 만나요!Q. 혁신도시 복합문화센터, 언제 건립되나요?A. 혁신도시 복합문화센터, 많이 기다리셨죠? 전주시는 덕진구 장동 1068-2번지(3816.5㎡)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할 예정인데요, 이 공간은 아이들부터 어르신들까지, 전 세대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문화시설로 들어설 계획입니다. 건물 1층은 유아놀이터와 어린이놀이터, 맘카페로 채워지고, 2층은 어린이 체험관과 어린이 교양교실 등으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체험활동 공간으로 구성할 예정입니다. 3층은 청소년 동아리방과 지역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연습실과 다목적 공연장으로 채워집니다. 2021년 새롭게 선보일 혁신도시 복합문화센터 기대해주세요.Q. 대한방직부지, 어떻게 진행되나요?A. 서부신시가지 옛 대한방직 부지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는데요, 전주시는 '대한방직부지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대한방직 부지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계획입니다.전주시가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한 이유는 옛 대한방직 부지가 사유지일지라도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부지 자체가 시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시민과의 소통과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이를 위해 전주시는 12월 중으로 공론화 관련 전문가와 시민단체, 언론, 시의원, 공무원 등으로 '시민공론화를 위한 사전준비위원회(가칭)'를 구성할 예정인데요, 사전준비위원회는 시민 공론화의 방식과 주요 의제, 위원회 구성, 운영기간 등을 폭넓게 검토해 공론화위원회의 출범을 준비하게 됩니다.시민과 본격적인 대화에 나설 전주시와 공론화위원회. 조금 더디 가더라도 바른길을 가기 위해 경청과 소통의 자리를 만들었으니,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2020.09.09
#금암분수정원
#혁신도시복합문화센터
#대한방직부지
문화로 사람으로, 4관왕에 빛난 전주
2019 대한민국 자원봉사대상 대통령 표창전주시가 대한민국 자원봉사대상에서 지방자치단체 부문 최고상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자원봉사자 수가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 전국 최고 수준인 데다, 최초로 자원봉사과를 신설하는 등 선도적인 인프라 구축과 자원봉사 활성화에 힘써온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2019 보육 유공 정부 포상 대통령 표창전주시가 보육 사업 발전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기관 표창을 받았다. 국공립어린이집 7개소를 확충하고, 육아종합지원센터의 수준을 높이는 등 그동안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도시 만들기에 앞장선 결과이다.2019 아시아 도시경관상 수상폐공장에서 문화예술공간이 된 팔복예술공장이 도시경관분야 아시아 최고의 국제상을 수상했다. 옛것을 허물지 않고 시민의 기억을 지킨 점, 주민과 함께 공간을 재생한 점이 큰 점수를 받았다.2019 공동체 우수 사례 발표 한마당 최우수상온두레 공동체로 활동 중인 '나눠드림 교육공동체'가 공동체 한마당에서 최우수상인 행정안전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나눠드림'은 육아 품앗이 모임으로 시작해 돌봄교육, 고학력 여성 교육인 마을아카데미 등 활발하게 사업을 펼쳐 왔다.
#전주소식
#대통령표창
금암동 추억의 골목길
뿌리를 기억하는 땅
하나뿐인 양은솥이 '빵꾸' 나고중학교 1학년 방학이 끝나가던 1972년 여름, 어머니가 동네에서 얻어 온 2만 원을 들고 임실에서 전주로 전학을 왔다. 셋째 형은 전북대, 넷째 형은 전주농고에 다니고 있었다. 팔달로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백제대로는 상상도 못 하던 시절. 상전벽해지만, 금암동에서 시작한 전주의 기억은 또렷하다.지금의 금암1동 주민센터 옆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꼭대기에 작은 교회가 있었다. 교회를 지나 밭고랑 사이 황톳길을 5분쯤 더 걸으면 2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방죽 옆 허름한 집이 전주살이를 시작한 곳이다.자취방 주인은 단칸방 다섯 개를 전세로 얻어 우리에게 사글세를 냈다. 우리는 두 번째 방을 얻어 살았다. 방문 앞에 작은 마루가 있고, 그 아래 연탄 화덕이 있었다. 연탄불을 갈거나 밥을 해 먹으려면 개폐식 마루를 열어야 했는데, 여기가 부엌인 셈이었다. 밥해 먹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니 늘 창피했다.어느 일요일 오후, 형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바람구멍을 막고 있던 걸레를 빼내 화력을 높이고 양은솥에 밥을 안쳤다. 그러고는 잠깐 누워 있다는 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한 낌새에 재빨리 나가 뚜껑을 열었다. 쌀은 흔적도 없고 솥 바닥은 용광로처럼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솥에 물을 부었다. 양은솥 바닥이 '뻥' 뚫리면서 연탄불로 물이 흘러내렸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처럼 분진이 솟구쳤다.하나뿐인 양은솥이 '빵꾸' 났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뻔한 살림에 자식들 가르치며 힘들게 농사짓는 부모님 대신 남원 큰형님 집에서 자그마한 양은솥 하나를 얻어 왔다. 솥을 가져오던 날, 우린 오랜만에 잘 퍼진 찰진 밥을 배불리 먹었다. 몇 년 전 임실 진뫼마을 고향 집 마당에 양은솥 하나를 걸어 놓았다. 주말이면 형제들이 모여 그 솥에 국을 끓여 먹는다. 국물이 넘쳐흐를 때면 '빵꾸' 나 버린 양은솥 때문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애태우던 어린 학생이 떠오른다.인정 많은 전주 사람들자취는 주인집 아줌마를 잘 만나야 고생을 덜한다. 다행히 내가 만난 주인들은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두 아주머니 모두 공동창고에 우리 연탄이 없거나 우리가 나무토막을 주워 불을 피우고 있으면 화력 좋은 자기 집 연탄 밑장을 들고 왔다."학생, 다음에 연탄 떼면 주고 우선 우리 거 갖다 써.""학생들, 나는 밥을 다했응게 우리 집 연탄불에 밥해 묵고 얼른 학교 가!"어디 연탄뿐일까? 그 당시 시골에서 도시로 나가 자취했던 학생치고 반찬이 풍족했던 이는 많지 않았다. 여러 끼니를 왜간장에만 비벼 먹던 우리 형제는 주인집 김치 한 포기를 몰래 훔쳐 먹었다. 아주머니에게 미안했지만, 반찬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별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항아리 속 김치가 줄어든 것을 알았겠지만, 우리에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우리 또래 아들이 있었으니 알고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는 알싸한 전주 김치. 그분을 다시 뵐 수 있다면 항아리에 담긴 그 김치를 우리가 훔쳐 먹었다고 고백할 것이다. 다시 훔쳐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고 말씀드릴 것이다.따뜻한 마음의 비단을 깔아 주던내 등하굣길은 전북대학교 신정문과 삼성문화회관 일대에 끝없이 펼쳐졌던 뽕나무밭이었다. 누에가 마지막 네 잠을 자고 깨어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머리 들고 하늘거리는 모습이 떠올라 뽕잎을 만지작거리며 걸었던 길. 오늘도 가족과 옛 자취방에 들렀다가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앞 '녹색예술거리 나눔숲'을 걷는다. 뽕나무 숲을 기억하는 '땅심'에 '나눔숲'이 있어 생태・문화・예술이 살아 있는 곳. 하늘을 가리던 뽕잎의 푸르름이 그대로 내려앉은 땅. 이곳은 누에가 화려하고 따뜻한 비단을 깔아 주던 비단길이요, 비단숲이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을 나눠 주던 전주 사람들의 그윽한 정이 담긴 길이다. 글 김도수 │ 시인·수필가시집 , 동시집 , 산문집 , 가 있다. 전북작가회의 회원이며,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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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일기도 시대를 읽는 생생한 기록물입니다”
박병익 씨가 소개하는 50여 년의 추억이 담긴 일기
일기를 쓰며 세상을 읽고 배우다 제 기억에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5학년 때만 해도 학교에서 쓰라고 하니까 반강제적으로 썼고, 6학년 때부터는 자발적으로 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는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 전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졌습니다. 일기에는 단순한 일과만이 아니라 그날그날 인상적인 일들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소소한 일상과 크고 작은 사회․문화․정치적인 이슈들까지 모두 아울렀던 것이지요. 이렇게 폭넓은 이야기를 썼던 것은 신문 배달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4~5년간 배달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읽고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감상까지 적은 거예요. 저는 일기를 쓰면서 세상을 읽고 배운 셈이죠. 다양한 이슈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1972년 열린 제5회 킹스컵, 1973년 뮌헨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은 경기 모습을 그림까지 그려 가며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스포츠 캐스터의 꿈도 꿨어요. 형편이 어려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서 결국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요. 일기를 통해 시간여행을 떠나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원에서 전주로 이사를 왔어요. 형님이 당시 전주에서 최고 명문 학교로 꼽히던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남원을 떠나 전주에 온 겁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은 형님이 판검사가 될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 인근 농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하지만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 형편은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집안 살림을 맡으시고, 어머님이 밖에 나가 돈을 버셨어요. 새벽 5시에 군산에 가서 사 온 갈치를 시청, 병무청 등을 돌아다니면서 파셨습니다. 어머님이 군산에서 도착하실 시간에 맞춰 리어카를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 갖다 놓는 일은 제 몫이었어요. 그런데 커 가면서 그 일이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동네 여학생들을 피해 생선을 실은 리어카를 끌다 전봇대에 부딪힌 일이 일기에 남아 있거든요. 전주고등학교를 다닌 이종사촌 형에게 도시락을 전해 주러 가는 길에 깡패를 만나 10원과 목걸이를 빼앗긴 일도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일기를 볼 때면 뭉클한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추억 어린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거죠. 나의 일상이 모두의 역사가 된다 사실 개인적인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를 기증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철없던 시절의 내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 시대를 담은 자료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습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텔레비전 있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만화방에 1원에서 1원 50전의 입장료를 내면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로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곤 했지요. 그런데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박치기 왕'프로레슬러 김일 선수 경기가 종합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김일 박치기, 천기덕 당수' 하면 온 국민이 열광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김일 선수가 전주에 왔으니 온 전주가 들썩였지요. 당시 프로레슬링 경기 입장권이 2원이었는데 할인권을 가져가면 얼마를 할인해 줬어요. 아직도 그 할인권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이트 장소로 유명했던 전주 시내 탁구장 이야기, '빈대극장'이라 불린 동시 상영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본 일들도 모두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박병익이라는 개인의 일기를 통해 1970년대 전주 사람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이번 기록물 공모전을 통해 내가 쓴 매일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 줄이라도 좋으니 일기 쓰기를 권합니다. 나의 일상이 모두의 역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박병익(60) 씨는 2018년 제5회 전주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50여 년 전의 일기장 등을 기증, 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제라이온스협회 전북지구 제1부총재로 활동하며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주의꽃심
#전주기록물
전주 기린봉
묵묵히 거기 있어 더욱 빛나는 산
시리도록 아픈 기린봉의 추억기린봉 이야기를 하자면 30여 년 전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작고 아담한 시골 마을. 산으로 가로막힌 버스 종점이 있었고, 종점 뒤편에 허름한 한옥이 있었다. 그 뒤채에 자리한 2만 5천 원짜리 사글셋방이 참으로 가당찮지만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여러 번 답사 끝에 얻은 안전 가옥, 나의 자취방이었다. 그곳이 바로 기린봉 아래였고, 주인집 할머니와 나와의 동거는 거의 1년을 넘겼던 것 같다.시절은 하 수상하였다. 기린봉 산 그림자에 복학생 운동권의 삶도 녹록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주신 등록금은 분실로 위장하고 선거를 준비하는 후배의 등록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나는 휴학을 했다. 멀리 대륙에선 이념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자고 나면 대학생들의 죽음이 연일 지면을 달구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열사 정국이었다. 참으로 시리도록 아픈 기린봉 시절이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그곳을 떠났고, 가슴이 답답할 때 하릴없이 올라 지친 심신을 달랬던, 내 청춘이 잠시 머물렀던 기린봉은 오랜 세월 기억 저편 아득한 곳에 구겨 넣고 잊고 살았다. 이두황 단죄비를 세우다20여 년 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을 맡으면서 기린봉과 다시 만났다. 한때 시대에 울분한 한 청춘의 호흡을 고르게 해주던 기린봉이 아닌, 다소 불편한 기린봉으로…. 기린봉 초입 양지바른 언덕에 누워 있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의 무덤 때문이었다.이두황은 동학 농민군 진압부대의 우선봉장으로, 명성황후 살해의 일본군 길잡이로, 정미 호남의병에 대한 ‘대토벌’ 작전의 혁혁한 공로자로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다. 어이없게도 기린봉이 품은 성정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기린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성을 내려다보며 죄인 이두황의 행각을 묵묵히 지켜본 기린봉인데 말이다. 기린봉은 그들에게도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좋은 안식처로 보였던 모양이다. 결국 이두황 사후 100년이 되던 해인 2016년에 이두황 단죄비를 기린봉 사거리에 세웠고, 구천을 중음신으로 떠돌던 농민군과 의병들의 혼백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열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비로소 기린봉이 온전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기린봉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무념 무상 비로자나불의 모습으로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인간들에게 늘 곁을 내어주었다. 샐쭉하게 토라진 가시내의 모습도, 속세의 들뜬 허영과도 애당초 인연이 없이, 없는 듯 있는 듯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鎭山)이 아니면 어떻고 주산(主山)이 아니면 어떠리. 기린토월(麒麟吐月), 우백호(右白虎)의 거추장스러운 장삼도 부담스럽게 느끼며 벗어 버리고 싶은 것이 기린봉의 진면목 아니었던가. 일상의 삶조차 보듬어 주는 기린봉민족문제연구소와 전북민언련에서 같이 활동하는 정혜인 선배와 오랜만에 기린봉에 올랐다. 속살 드러내 놓고 솔향, 흙향, 풀향을 그윽하게 객들에게 풀어놓는 기린봉. 하찮은 미물조차도 함부로 내치지 않는 배려가 미덥다. 속세에 찌든 일상의 삶들에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다정하게 안아주는 산이 얼마나 있을까. 정상에 오르니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밟고 서서 저 넓은 세상을 보라 한다. 어떠한 금기도 없이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껴안으며 역사를 품어 왔던 순교자의 모습이다. 전주천 물기를 머금은 동고사 풍경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고, 저 멀리 모악산에서는 미륵이 걸어 나온다. 완산칠봉 등성마다 일자진을 친 갑오년 동학 농민의 함성도 들려오고, 변복을 하고 전주성 동문을 빠져나가는 전라감사 김문현의 줄행랑도 보인다. 남부시장 아낙의 흥정 소리도, 멀리 비비정 만경강 기슭을 거슬러 오는 만선의 황포돛배도 품 안에 들어온다.우리는 가까이 있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 같다. 기린봉이 딱 그렇다. 칭얼거리지 않고 묵묵히 거기 있음으로 더욱 빛나는 게 기린봉이다. 드러내지 않음이 드러냄이다. 마주 보면 서로 닮아 간다 했던가? 일망무제 호남평야의 넓은 들을 바라보다 스스로 넓어진 것이 기린봉이 아닌가 싶다.지짐지짐 가랑비가 내린다. 내려갈 채비를 서두른다. 맑은 가을날, 기린봉이 아중저수지의 물로 목욕하고 색색의 옷으로 꽃단장하는 날 다시 와야겠다. 글 김재호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김재호 씨는 2011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을 맡아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서고 있다. 사람과 역사를 위해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늘 분주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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