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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꽃심
“오래된 책자와 그림 속에서 100년 전 전주를 만나다”
김종선 씨가 소개하는 <효행록>과 <근사록> 속 전주
대대손손 간직해 온 소중한 기록물 IMF(국제통화기금) 직후니까 아마도 1998년경이었을 거예요. 제가 김해김씨 삼현파 71대손인데 당시 종중의 총무이사를 맡고 있었어요. 총무 이사를 맡으면서 종중 사무실의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그때 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에 등장하는 수철, 정철, 우철 삼 형제는 김해김씨 집안에서 효자로 워낙 유명했습니다. 이 발견되면서 효자 삼 형제 이야기가 구전설화가 아닌 실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러니 얼마나 귀중한 자료입니까? 그래서 지난 20년 넘는 세월을 소중하게 보관해 왔던 것이죠. 이 과 함께 전주시에 기탁한 은 저희 증조할아버지께서 작성한 일종의 회고록입니다. 김석두 어르신이 바로 그분인데요, 전라감영에서 경리과 업무를 담당하셨습니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보관해 오시던 것을 제가 이어서 보관해 왔습니다. 2017년 임실군청 김철배 학예사의 해석으로 이 그저 단순한 일기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 담긴 중요한 기록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오래된 자료에서 만난 '전주의 역사' 과 에 담긴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두 책자 모두 전주의 역사를 담고 있답니다. 은 효자 삼 형제 중 막내인 우철이 큰형 수철의 효행을 기록한 책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는 두 장의 그림이 있는데 한 장은 선산의 지도를 그린 그림이고, 나머지 한 장이 150~180년 전 전주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전주의 옛 모습이 담긴 그림 아래쪽을 보면, 청년이 장어를 잡는 천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지금으로 치면 색장동과 대성동의 중간에 자리한 전주천입니다. 그 전주천을 따라 승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지소(紙所), 즉 종이를 만들던 관청이 있고, 그 아래쪽에 기와집 4채와 초가집 3채가 있습니다. 기와집에는 지소에서 행정을 보던 사람들이 살았고, 초가집에는 지소에서 종이를 만들던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이 오래된 그림이 전주가 아주 오래전부터 한지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1894년 2월, 저희 증조할아버지께서 고창에 수금을 하러 간 사이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고창에서 전주까지 오는 길이 수월하지 않게 되었죠. 무려 두 달이 걸려 전주에 도착하니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라감영이 모두 불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감영을 비롯한 전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안의 자랑을 넘어 전주의 자부심이 되길 사실 과 모두 어찌 보면 그저 저희 집안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저희 집안이 효자 집안이자 높은 관직을 거친 문신 집안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기록물인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사람들에게 효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전주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의 회고록이나 효행록이 아닌 전주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이번 기록물 공모전에 기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을 발견했을 당시 아버님이 병환 중이셨습니다. 은 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효를 가슴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지요. 저처럼 을 통해 많은 이들이 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지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오는 3월이면 전라감영 복원이 완료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주의 자부심을 드높인 전라감영의 복원을 앞두고 이 의미 있는 자료로 쓰이길 기대합니다. 김종선(60) 씨는 임실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가가 전주시 효자동에 모여 살아 전주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다. 전주시에 기탁한 과 이 제7회 전주기록물수집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20.09.09
#전주기록물
#효행록
#근사록
“개인의 일기도 시대를 읽는 생생한 기록물입니다”
박병익 씨가 소개하는 50여 년의 추억이 담긴 일기
일기를 쓰며 세상을 읽고 배우다 제 기억에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5학년 때만 해도 학교에서 쓰라고 하니까 반강제적으로 썼고, 6학년 때부터는 자발적으로 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는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 전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졌습니다. 일기에는 단순한 일과만이 아니라 그날그날 인상적인 일들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소소한 일상과 크고 작은 사회․문화․정치적인 이슈들까지 모두 아울렀던 것이지요. 이렇게 폭넓은 이야기를 썼던 것은 신문 배달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4~5년간 배달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읽고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감상까지 적은 거예요. 저는 일기를 쓰면서 세상을 읽고 배운 셈이죠. 다양한 이슈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1972년 열린 제5회 킹스컵, 1973년 뮌헨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은 경기 모습을 그림까지 그려 가며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스포츠 캐스터의 꿈도 꿨어요. 형편이 어려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서 결국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요. 일기를 통해 시간여행을 떠나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원에서 전주로 이사를 왔어요. 형님이 당시 전주에서 최고 명문 학교로 꼽히던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남원을 떠나 전주에 온 겁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은 형님이 판검사가 될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 인근 농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하지만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 형편은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집안 살림을 맡으시고, 어머님이 밖에 나가 돈을 버셨어요. 새벽 5시에 군산에 가서 사 온 갈치를 시청, 병무청 등을 돌아다니면서 파셨습니다. 어머님이 군산에서 도착하실 시간에 맞춰 리어카를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 갖다 놓는 일은 제 몫이었어요. 그런데 커 가면서 그 일이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동네 여학생들을 피해 생선을 실은 리어카를 끌다 전봇대에 부딪힌 일이 일기에 남아 있거든요. 전주고등학교를 다닌 이종사촌 형에게 도시락을 전해 주러 가는 길에 깡패를 만나 10원과 목걸이를 빼앗긴 일도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일기를 볼 때면 뭉클한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추억 어린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거죠. 나의 일상이 모두의 역사가 된다 사실 개인적인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를 기증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철없던 시절의 내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 시대를 담은 자료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습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텔레비전 있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만화방에 1원에서 1원 50전의 입장료를 내면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로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곤 했지요. 그런데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박치기 왕'프로레슬러 김일 선수 경기가 종합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김일 박치기, 천기덕 당수' 하면 온 국민이 열광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김일 선수가 전주에 왔으니 온 전주가 들썩였지요. 당시 프로레슬링 경기 입장권이 2원이었는데 할인권을 가져가면 얼마를 할인해 줬어요. 아직도 그 할인권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이트 장소로 유명했던 전주 시내 탁구장 이야기, '빈대극장'이라 불린 동시 상영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본 일들도 모두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박병익이라는 개인의 일기를 통해 1970년대 전주 사람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이번 기록물 공모전을 통해 내가 쓴 매일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 줄이라도 좋으니 일기 쓰기를 권합니다. 나의 일상이 모두의 역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박병익(60) 씨는 2018년 제5회 전주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50여 년 전의 일기장 등을 기증, 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제라이온스협회 전북지구 제1부총재로 활동하며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주의꽃심
“빛바랜 옛 사진들을 보며 ‘한지골’을 추억합니다”
최영재 선생이 사진으로 소개하는 전주한지의 역사
흑석골, ‘한지골’이 되다전주한지의 품질이 우수한 이유, 그 첫 번째는 바로 물입니다. 전주천의 맑은 물이 좋은 한지를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거죠. 흑석골은 물이 깨끗하고 공기도 맑아 한지를 만드는 데 최상의 조건을 지닌 곳입니다. 무려 일제 강점기부터 한지공장단지가 조성돼 있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자랑합니다.그런데 처음부터 흑석골이 전주한지의 주요 생산지는 아니었어요. 원래 완주군 일대에 한지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6・25 전쟁 이후 그 많던 한지 공장들이 모두 흑석골로 이주하게 됩니다. 산중에 숨어 있는 무장공비를 피해서 말이지요. 그렇게 이주한 공장들이 무려 스무 개였습니다.그 시절 흑석골 마을 전체가 한지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 당시 전주한지는 이곳에서 다 나온 겁니다. 그렇게 흑석골은 ‘한지골’로 불리게 됩니다. 1990년대 초 정부의 환경 규제에 따라 전주 시내에서 한지 공장을 못 하게 될 때까지 흑석골의 한지 역사는 계속됐습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지에 빠지다저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흑석골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초 아버지가 이 흑석골에 ‘호남제지’라는 이름으로 한지 회사를 여셨죠. 2000년대 초반까지 현직에 계셨으니 근 40년을 한지업에 종사하셨습니다. 회사가 날로 성업해서 서서학동에 1, 2공장을 세우고 우아동에 3공장, 소양에 4공장을 운영하셨지요. 그러다 1990년대 나라에서 폐수 발생 등의 이유로 도심 내 공장들에 대한 규제를 시작하면서 더 이상 시내에서 공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1995년 시내에 있던 공장들을 모두 소양으로 옮기게 된 것이죠. 저는 1990년대 초반에 오늘날 ‘천양제지’로 합쳐진 소양 공장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한지업에 종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장남이고 하니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에 입사하게 된 거죠. 그런데 입사 후 한지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 매력에 빠져 버렸습니다. 한지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지의 역사를 공부하게 됐고, 그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한지 관련 작가들과 소통하면서 전주한지가 왜 좋은지, 옛날에는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을 공부하기도, 새로운 한지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한지에 물들어 갔습니다. 전주한지의 새 역사, 함께 만들어 가다한지를 만들수록 한지의 우수성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 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전주시에서 기록물공모전을 연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좋은 기회다 싶었어요. 기증한 사진은 흑석골에서 ‘호남제지’를 운영하던 당시 아버님이 직접 찍으신 사진들입니다. 1970년대 솥단지에 물을 끓여 닥나무를 삶는 모습부터 한지 만드는 과정, 1977년 호남제지 공장 전경, 1980년대 작업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어요. 아주 오래된 사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리는 데 좋은 자료로 쓰이길 바라는 마음에 기증하게 됐습니다.현재 전주시에서 서서학동 흑석골 일대에 대규모 전주한지 단지를 조성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조 공간을 비롯해 역사 공간, 체험 공간, 한지 미술 공간 등으로 구성된다지요? 그야말로 그 옛날 ‘한지골’이 보다 더 근사한 모습으로 재탄생할 거라는 기대가 커요. 한지를 만들고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이 한지단지 조성에 도움이 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전주가 세계 어느 나라 종이보다 우수한 한지의 본고장답게 나아가는 행보에 걸음을 더하고 싶습니다. 최영재(53) 씨는 ‘한지골’이라 불린 흑석골에서 태어나 일평생을 한지와 함께해 왔다. 현재 전주한지 제조 회사인 ‘천양제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서 전주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흑석골
#호남제지
#전주한지
#천양제지
“꼭두는 단순한 인형이 아닌 시대를 담은 문화유산입니다”
소빈 닥종이 인형 작가가 소개하는 상여 조각상 ‘꼭두’
먼 길 떠나는 망자의 길동무, 꼭두그렇게 처음 접하게 된 꼭두는 왠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로 장지까지 모시는 일이 흔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화려하게 장식한 꽃상여에 망자를 태우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로 시작되는 상여 매김 노래를 하며 걷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심지어 대여섯 살 때 6~7㎞ 떨어진 장지까지 상여를 타고 간 적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대해 보다 빨리 깨닫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상여에 장식하는 꼭두도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던 거죠. 꼭두는 그 종류가 다양한데 보통 시종과 광대처럼 사람의 형상과 용과 봉황, 호랑이 같은 동물의 형상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꼭두는 각각 주어진 역할이 있어요. 길을 안내하는 안내 꼭두, 망자를 나쁜 기운에서 지켜 주는 호위 꼭두, 흥을 돋우고 즐겁게 해 주는 광대 꼭두가 그것입니다. 각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모두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길동무입니다. 보내는 사람에게는 떠나는 사람을 잘 모시고 갈 거라는 위로를 건네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먼 길 떠나는 망자의 길동무, 꼭두그렇게 처음 접하게 된 꼭두는 왠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상여로 장지까지 모시는 일이 흔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화려하게 장식한 꽃상여에 망자를 태우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로 시작되는 상여 매김 노래를 하며 걷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심지어 대여섯 살 때 6~7㎞ 떨어진 장지까지 상여를 타고 간 적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대해 보다 빨리 깨닫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상여에 장식하는 꼭두도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던 거죠. 꼭두는 그 종류가 다양한데 보통 시종과 광대처럼 사람의 형상과 용과 봉황, 호랑이 같은 동물의 형상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꼭두는 각각 주어진 역할이 있어요. 길을 안내하는 안내 꼭두, 망자를 나쁜 기운에서 지켜 주는 호위 꼭두, 흥을 돋우고 즐겁게 해 주는 광대 꼭두가 그것입니다. 각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모두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길동무입니다. 보내는 사람에게는 떠나는 사람을 잘 모시고 갈 거라는 위로를 건네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꼭두 전시 공간 마련, 이루고 싶은 한 가지 꿈‘꼭두’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꼭두 수집으로 이어졌습니다. 꼭두를 모으기 위해 서울, 대구 등 각지의 골동품 가게를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한두 개씩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다 보니 골동품 가게에서 먼저 연락이 오더군요. 좋은 꼭두가 있는데 구매할 생각이 있느냐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모은 꼭두가 총 150여 점 정도 됩니다. 전주시에 기탁한 아홉 점의 꼭두는 이 150여 점의 꼭두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들입니다. 승려, 광대, 상인 등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얼굴만 있는 꼭두는 상여 매김을 하는 사람이 들던 꼭두인데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꼭두예요. 꼭두의 차림새를 통해 시대에 따라 달라진 의복 문화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꼭두는 단순히 조각품이 아니라, 시대를 담고 있는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꼭두를 어느 정도 모은 후부터 꼭두를 전시하고,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는 꼭두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꿈꿔 왔어요. 꼭두를 통해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꼭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 그러던 중 전주시에서 기록물수집공모전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바로 이거다 싶었지요.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서 열리는 공모전에서 한국적인 존재 꼭두를 소개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꼭두를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으니까요. 전주시에 꼭두 기탁을 계기로, 제 바람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꼭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관심을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소빈(50) 작가는 남원 출신으로 원광대 조형미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2004년 대한민국 한지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닥종이 인형 작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 그동안의 작품을 총망라한 ‘소빈의 삶’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2020.09.08
#조각상
#꼭두
#닥종이인형
"기록물은 시간이 준 선물입니다"
이용엽·문정자 부부에게 듣는 전주의 기록물 이야기
아버지의 일기에서 발견한 전주의 역사 이용엽 아버지 일기를 읽기 전까지 제게 아버지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아버지였습니다. 그저 묵묵히 가장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 말이지요. 그런데 공립 전주농업학교 재학 시절의 학습일기 속 아버지는 무척 유쾌하고 재미난 분이셨어요. 학습일기니만큼 주로 학교생활에 대한 기록이긴 한데,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100여 년 전 전주의 모습까지 담겨 있는 가치 있는 기록물이었지요. 일기는 1916년 5월 6일부터 3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첫 일기는 비가 와서 원족, 요즘 말로 소풍을 가지 못해 교실에서 오락 시간을 보낸 내용이에요. 축음기를 켜고 노래를 들으며 유쾌하게 놀았다는 글에서 춤추며 노는 아버지를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더군요. 팔달정(현 팔달로 추정)의 전주좌대성단신파연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감동한 이야기는 그 시절 청년들의 여가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 어느 날은 전주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대회를 구경하셨습니다. 경기를 보며 자전거가 달리는 모습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모습 같다는 감상도 적어 놓으셨어요. 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린 전주군 이동면 검암리 (오늘날의 전주시 금암동)의 간이 자전거경기장은 훗날 덕진운동장 개발의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일기 속에서 전주의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사진 속 추억, 소중한 자료가 되다 문정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있다죠? 제게 기증은 남편이 저에게 미친 선한 영향력입니다. 나누는 것의 기쁨을 배웠다고나 할까요? 아버님의 일기를 기증하는 남편을 보면서 기록물 기증이 단순히 내 것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기록물의 가치와 힘을 전하고 나누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나도 무언가 기증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중·고등학교 시절 입학식과 졸업식 사진이 떠올랐어요. 요즘은 워낙 사진이 흔한 시대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사진은 참 귀했거든요. 그래서 특별한 날이면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찍은 사진을 참 소중히 보관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 사진을 기증한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사진이지만, 기증하면 그 옛날 전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기록물의 가치이용엽 아버지 일기를 기증한 후 더 많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형과 동생과 함께 일기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형이 한자로 된 원본을 번역한 것을 받아 제가 정리를 하고, 여동생이 교정을 봐서 책을 출판한 것이지요. 집 안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에 감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공립 농업학교 재학 시절 아버지가 판서해서 만든 일제강점기 교과서 일부도 기증했는데요, 그렇게 모아 놓은 기록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의미 있는 것들을 기증하다 보니 아내도 모아 놓은 기록물을 꺼내기 시작하더군요. 어쩌면 기록물은 우리 부부가 함께한 시간이 준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래된 것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같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 기록물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거든요. 경험해 보지 못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니까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도 기록물에 대해 소중히 여겼으면 해요.
2020.09.02
#전주의기억
#아버지의일기
#전주옛모습
"푸른 눈의 '베리 삼촌'은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조기현 씨가 소개하는 '브라이언 배리'의 사진
아직도 생생한 '배리 삼촌'과의 추억 브라이언 배리, 아니 배리 삼촌이 한국에 온 때가 1967년입니다. 제가 1968년생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배리 삼촌은 이미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그 사연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배리 삼촌은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현재 부안군 변산면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으셨는데, 근무 당시 저희 할머니 댁에서 하숙하셨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원래 슬하에 7남매를 두셨어요. 아들 여섯에 딸 하나요. 그런데 여섯째, 제게는 막냇삼촌이죠. 그분이 6·25 때 돌아가셨대요. 배리 삼촌이 1945년생인데 그 삼촌과 비슷한 또래였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마치 막내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며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신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의 인연을 맺게 된 거지요. 삼촌은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부안이 무척 그리웠대요. 좋아했던 막걸리와 홍어 무침 생각도 간절했고요. 그러던 차에 평화봉사단 모집 연락을 받고, 다시 한국에 오셨습니다. 평화봉사단 교관 활동을 마치고, 대우그룹 회장실 소속 해외 홍보부 근무를 하게 되면서 서울로 떠나셨는데요. 명절이면 꼭 부안 할머니 댁에 내려오셨어요. 집안 애경사 참석은 물론이고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고 상주 역할도 하셨습니다.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배리 삼촌은 한국에서 참 많은 활동을 하셨어요.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불교 활동입니다. 평화봉사단으로 처음 한국에 오셨을 당시,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셨대요. 그렇게 불교에 관한 관심이 점점 깊어지던 중에 불교 탱화의 거장 만봉스님을 만나 탱화를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삼촌이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으셨고, 재능도 있으셨대요. 그런데 미국 부모님 반대로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술에 대한 애정이 불교 탱화로 꽃을 피운 셈이지요. 1999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태국 왕실 사원에 한국의 단청을 그렸고, 총 40권을 영어로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2009년 화관문화훈장도 받으셨어요. 배리 삼촌은 재주만큼 흥도 참 많은 양반이셨어요. 아직도 할머니 댁 마당에서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 마시고 장구 치고 노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취미였던 장구를 시작으로 농악을 제대로 배워서 남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정읍농악전수자로 제자들을 양성하신 거예요. 외국인이 한국 사람에게 농악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참 재미나지 않나요?40년 만에 빛을 본 1960년대 전주천 빨래터 사진사진도 참 좋아하셨습니다. 변산을 비롯해 전라북도 곳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셨어요. 이번에 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전주천 빨래터 사진은 삼촌이 전라북도 곳곳을 여행하며 남긴 사진 중 하나입니다.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와서 변산에 가기 전에 전주에 묵으셨는데 바로 그때 찍으신 사진이에요. 그런데 1960년대만 해도 전라북도에는 컬러 사진을 현상하는 곳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삼촌이 미국에 사는 형님에게 필름을 우편으로 보내서 현상을 부탁하셨답니다. 그러고선 두 분 다 사진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계셨대요. 그러다 2010년 배리 삼촌의 친형님께서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창고에서 필름을 발견하고 인화하셨다고 해요. 무려 40년도 더 지나서 세상 빛을 본 거지요. 그 사진을 디지털화해서 메일로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집안 어른들은 삼촌이 부안에서 생활하셨으니 부안에서 찍은 사진일 거라 하셨는데, 딱 보니 전주천이었습니다. 제가 신흥학교를 나왔는데 다가교를 신흥학교 다리라 불렀거든요. 사진에 찍힌 풍경이 그 신흥학교 다리 아래 모습이었습니다. 흰 천이 바람에 날리고 아낙네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빨래를 하는 모습이 삼촌 눈에 참 신기하셨나 봐요. 2016년 배리 삼촌이 돌아가신 후에 유품들을 막내 작은아버지가 보관하셨다가,지금은 제가 관리하고 있어요. 저는 앞으로 배리 삼촌의 활동과 작품들을 알리고 싶어요. 유튜브 등을 이용한 일종의 사이버기념관을 제작하는 거지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삼촌을 보며 많은 분들이 애향심을 가졌으면 해서요. 아마, 하늘에 계신 배리 삼촌도 같은 마음이시지 않을까요? 조기현(1968) 씨는 문화예술공연기획 의 대표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브라이언 배리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은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제8회 전주시기록물수집공모전에 브라이언 배리가 촬영한 1960년대 전주천 빨래터 사진을 기증했다.
2020.08.28
#브라이언배리
#부안군
#고향
"현장 기록한 사진 시민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최영철 어르신이 사진으로 추억하는 미원탑과 금암 분수대
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기록물이다. 사라진 과거의 모습도 사진 속에서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전주의 랜드마크였던 미원탑과 금암 분수대 옛 모습도 모두 사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전주의 오래된 풍경이 담긴 사진을 전주시에 기증한 최영철 어르신은 35년간 전북도청 공보실에서 근무하며 전라북도 곳곳을 기록한 사진사이다. 최영철 어르신을 만나 촬영에 얽힌 에피소드와 그 시절 전주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숙부님이 주신 카메라가 사진 인생의 시작 초등학교 시절, 숙부님께서 카메라 한 대를 주셨습니다. 그 카메라가 제 사진 인생의 시작인 셈이죠. 1930년대 독일제 카메라였는데 그 카메라로 참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 원판을 찾으러시내 사진관에 갔습니다. 구 도청 옆 소방서 자리에 ‘부민사진관’이라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원판을 찾아서 집에 가려는데사장님이 자꾸 붙잡으시는 거예요. 초등학생이 카메라가 있다 하니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학교 수업 마치고 와라, 방학하면 또 방학했으니 오라 하며 자꾸 부르시더라고요. 오전반, 오후반 나눠서 수업하던 시절이었는데 오전반 수업이 끝나고 가면 점심까지 챙겨 주시면서 사진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때 사장님께 사진 이론에 대해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공짜로 배우기만 할 수 있나요? 사장님께 사진 이론을 배우면서 사진관 일을 도와드렸지요. 당시 도민증이라는 게 있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이에요. 그 도민증에 들어가는 증명사진을 네 장씩 잘라서 봉투에 넣고 이름을 쓰는 일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배운 사진 이론 덕에 군대에 가서 보직도 바꾸었지요. 원래 시설계에서 건축, 보수 작업을 했는데 인쇄소에서 일하게 된 겁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점차 내 것이 되어 갔습니다.일상에서 찍은 사진이 역사의 한 장면이 되다 제대 후에도 꾸준히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거의 알고 지냈는데 그중에 전라북도청 공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이 공보실에서 함께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혼자 사진 찍으러 다니기 힘에 부친다고 말이지요. 그때부터 전라북도 곳곳을 누비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지역별 여러 행사는 물론, 모를 심고 수확하고, 수확한 쌀을 넣을 가마니 짜는 모습까지, 밤낮없이 사진을 찍으러 다녔지요. 그런데 사진 찍는 게 그저 일이라 생각했으면 그렇게 열심히 찍지 못했을 겁니다.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사진 찍는 일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늘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전주시에 기증한 미원탑 사진이 바로 그렇게 찍은 사진입니다. 미원탑은 1967년도 조미료 미원을 광고하기 위해 그 당시 전주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팔달로 네거리에 세워진 광고탑이에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미원탑은 전주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전주의 관광 명소였습니다. 전북 각지에서 미원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참 많았지요. 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미원탑 사진은 1968년에 찍은 거예요. 도로 정비가 채 되지 않아 차선도 흐릿할 때였어요. 퇴근길에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자전거를 세워 두고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미원탑이 10여 년 후인 1979년 차량 통행 문제 등으로 철거되면서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지요.1980년에 찍은 금암광장 분수대 사진은 운이 참 좋았어요. 당시 업무차 헬기를 타고 다른 지역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마침 분수대에서 분수가 솟구치더라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더군요. 조종사분에게 잠시 멈춰 달라 말하기도 죄송스러워서 급히 셔터를 눌렀지요. 1980년대 금암광장 분수대는 전주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였습니다. 분수대 주변 화단도 참 예쁘게 잘 꾸며 놨거든요. 분수 구경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습니다.그 시절 전주, 사진으로나마 보여 주고파제가 사진을 찍을 때 꼭 지키는 원칙은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들을 찍는 거지요. 전주시에 기증한 미원탑과 금암광장 분수대 사진도 모두 그런 생각으로 찍었습니다. 의미 있는 장소와 공간, 그리고 순간은 시간이 흐르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섰기에 전주시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1970~1980년대 전주를 대표하는 미원탑과 금암 분수대는 이제 전주 사람들에게 추억의 공간으로 남은 곳들입니다.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시절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사진을 통해 그 시절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특히 금암광장 사진의 경우, 항공사진이라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시가 금암분수대를 28년 만에 복원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고 있는데요, 옛 금암분수대와 복원되는 금암분수대를 비교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저는, 많은 이들이 사진을 찍었으면 해요.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이 가치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최영철(85) 어르신은 전북도청 공보실에서 35년간 근무하며 전라북도의 다양한 현장과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5월에 열린 제8회 전주기록물수집공모전에 직접 찍은 미원탑과 금암광장 분수대 항공사진을 제출, 최고상을 받았다.
2020.06.30
#미원탑
#전주사람
#사진
“전주의 역사(驛舍)에 민족의 역사(歷史)가 살아 숨 쉰다”
박준상 어르신이 추억하는 전주의 역(驛) 이야기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옛날, 기차는 단순한 교통수단 그 이상이었다. 전주역에서부터 멀리 이리역까지, 철도청에서 40년간 근무한 박준상 어르신에게 기차역은 일터를 넘어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장소였다. 박준상 어르신의 추억 가득한 전주 역사(驛舍) 이야기를 들어 보자. 사람들로 북적이던 노송동 시절의 전주역 요즘 사람들에겐 생소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만 해도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대신 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2년간 중학교 과정을 배울 기회가 있었어요. 그렇게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철도청 입사 시험을 봤습니다. 당시 50명을 뽑는데 350명이 몰렸어요. 시험 결과, 1등 그러니까 수석으로 철도청에 입사했습니다. 1945년 4월 1일 자로 철도청에 입사해서 교육을 받고 6월 30일부터 전주역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주역은 기린봉을 등지고 노송천을 바라보고 있는 자리, 즉 현재의 노송동에 있었답니다. 당시 노송천을 가로지르는 노송가교가 있었는데 전주역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다리를 건너 50m쯤 지나면 전주역 광장이 나왔어요. 반세기도 훨씬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 풍경이 생생합니다. 당시 전주역에 하루에 오가는 열차가 임시열차까지 해서 40편가량 됐어요. 1,500명 정도가 오갔으니 그야말로 역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마중 나오고 배웅하는 사람들까지 하면 역을 방문하는 사람들 수는 어마어마했어요. 노송가교까지 사람들이 줄을 섰으니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1981년 현재의 역사로 옮기기 전까지 무려 50여 년간 노송동에 자리한 전주역은 전주는 물론, 전라북도 사람들의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6·25 당시 전주역 풍경 전주역에 발령받았을 때가 해방 직전이었는데요, 당시 일본 군인들이 여수에 상륙해서 북으로 올라갈 때 전주역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객차가 모자라 화물차에 사람도, 말도 함께 실어 날랐다더군요. 소련군이 청진, 나진에 상륙했을 때 남조선을 요새화한다며 쌀을 비롯한 화물을 기차에 엄청나게 실어 날랐다고도 해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입사 후 하도 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합니다. 그러다 직접 목격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해방 후 8월 하순부터 일본, 중국 등지에서 돌아오는 귀환 동포들로 기차 안의 혼잡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1~2시간 지연은 보통 있는 일이었고, 목적지가 없는 귀순 동포들이 광장 언덕과 역사에 거적을 깔고 자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렇게 해방 직후 붐볐던 기차역이 조금 한산해지나 싶었는데 그 후 5년이 채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 직후 기차는 피난민을 수송하는 유일무이한 교통수단이었지요. 피난민들이 보따리를 지고 객차 위까지 올라탔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타서 스프링이 가라앉아 기차가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지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40년 철도청 근무 중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 바로 6·25 직후였습니다. 어쩌면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간직했던 기억에서 모두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내 나이가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아흔셋이에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지요. 아흔이 넘고 나니 내가 죽고 나면 수십 년 전 전주역에 대한 기억을 알릴 길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철도청에서 근무한 자료들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려 했는데 과연 내 바람처럼 잘 간직하고 널리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차에 전주시 기록물 공모전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이겠지만 우리가 살던 시절을 후대에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 말이지요. 사실 40년간의 철도청 근무 중 전주에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익산, 정읍, 신태인, 백양사, 순천, 동산, 삼례, 이리역 등 근교에 안 가본 곳을 손꼽는 게 더 쉬울 정도예요. 그런데 내가 송천역에서 퇴직을 했어요. 그러니까 전주에서 시작해 전주에서 마무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전주에서의 기억이 유독 마음이 남아 있어요. 내가 기증한 자료들로 이런 내 마음이 모두 전달되진 않겠지만 그저 지나온 전주의 역에 대한 역사를 알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2020.05.25
#노송동
#전주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