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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3·1운동 100주년, 전주 그날의 기억
100년 전 전주에서 타오른 독립의 횃불
3·1운동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습니다. 그날은 장날이었는데 김제 쪽에서, 남원 쪽에서, 고산 쪽에서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전주 시내로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이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나는 주동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형사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다가 그만 붙들려 두들겨 맞기도 하였습니다. 한 청년이 만세를 부르다가 소방대의 갈쿠리에 찍혀 즉사하는 것을보았고, 한 기전 여학생은 헌병에게 붙잡혀 땅에 내동댕이쳐지는순간 그 자리에서 숨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주 은석교회 오기준 목사의 증언 타오르는 만세운동의 불길100년 전, 일제의 잔인한 압제에 맞서 대한민국 독립의 봄을 두드렸던 전주 시민들이 있었다. 아직 영글지 못한 앳된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의 학생들이 있었고, 종파를 초월한 종교인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시민들이 있었다.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호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주 신흥학교를 비롯해 기전여학교 등에 일제히 휴교령이 떨어진다. 검문검색이 강화되었고 일본 경찰들은 총과 칼로 무장을 강화했다. 1919년 전주의 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했다. 독립선언서를 인계받은 서문교회 김인전 목사를 비롯한 천도교와 개신교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거사가 진행되었다.개신교 신자였던 최종삼은 신흥학교 학생 다섯 명과 함께 지하실에서 등사판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손수 제작 복사하였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수천 장에 달하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레에 싣고, 그 위에 무와 배추 등 각종 채소를 가득 채웠다. 장터로 향하는 길목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경찰들의 감시의 눈초리는 삼엄했다.1919년 3월 13일, 운명의 그날3월 13일, 그날은 전주읍 장날이었다.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 나오는 인경 소리를 신호로 신흥학교를 비롯한 기전여학교 학생들과 천도교, 개신교 신자들은 서문교회와 풍남문을 거쳐 남부시장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 손에서 장꾼과 지게꾼, 시민들의 손으로 태극기가 전해졌고, 독립선언서가 우렁차게 낭독되었다. 독립의 봄을 열망하는 메아리가 목에서 목으로 전해지고, 목소리들이 함성이 되어 전주 시내 곳곳에서 독립의 꽃망울을 터트렸다. 남문에서 시내 곳곳을 거쳐 우편국 앞까지 행진했고, 일제는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물을 끼얹고 칼을 휘둘러댔으나 밤새도록 곳곳에서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이날 만세운동에는 다섯 차례에 걸쳐 1만여 군중이 참여하였고, 300여 명에 이르는 전주 시민이 구속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인경 소리와 동시에 터진 만세는 독립의 봄을 두드리는 환희와 갈망의 울림이었다. 3·13만세운동에 가담했던 학생들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학생들은 싸늘한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대한독립의 당위를 주장하며 일본 재판관의 말문을 막았다. 전주의 3·13만세운동은 3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만세운동에 가담한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검거되고 일본 경찰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지만, 3·1만세운동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시장 상인들은 항거의 뜻을 담아 일제히 상점의 문을 닫았고, 시국강연회가 열리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주의 하늘을 뒤덮었던 독립의 함성이 100년이 흐른 지금, 다시금 거리에 울려 퍼진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스러져간 열사들의 넋을 기리며, 2019년 전주 도심 곳곳에 다시금 독립정신의 봄이 꽃피길 기대해 본다.
2020.10.29
#3·1운동
#태극기
#만세
전주의 꽃심
“전주 기록물은 전주에 있어야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김세신 어르신이 발로 뛰며 수집한 전주 기록물
한자 공부에서 시작된 기록물 수집 스무 살 무렵,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기 위해 2년간 천자문을 쓰고 익혔어요. 아마도 못다 한 공부의 한을 그렇게 풀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익힌 한자는 후에 기록물 수집을 업으로 삼는 결정적 계기가 됐지요. 한창 돈벌이를 찾던 와중에 눈에 띈 게 고미술품, 고문서를 판매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동서학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당시 서학동, 교동, 완산동 일대에 고문서, 고미술품 가게들이 참 많았거든요. 자연스럽게 다양한 고문서, 고미술품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래된 문서의 가치를 잘 모르니 무게를 재서 그 값을 매기던 시대였어요. 한자 공부를 한 덕에 낡은 문서가 지닌 가치가 보이더군요. 10여 년 전 했던 한자 공부가 큰 자산이 된 셈이죠. 그렇게 오래된 문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강점을 토대로 고미술품도 함께 수집, 판매하는 가게를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항아리, 가구들도 함께 모았는데 모으고, 보관하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고문서와 고미술품 위주로 수집해 왔습니다. 1968년 궁도대회 채점표, 전주시에 기증수집 일을 시작하고 7~8년 동안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정보를 알아볼 수도 없던 시대니 무작정 발로 뛰면서 기록물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발로 뛴 덕에 일은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쪽 업계에서 제법 인정도 받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괜찮은 수집물이 있다고 먼저 연락을 주는 이들도 생겼지요. 얼마 전 전주시에 기증한 1968년 전주 청양정에서 열린 궁도대회 채점표인 획기지도 그렇게 얻게 된 것입니다. 17년 전쯤 광주에 사는 지인이 궁도대회 경기 결과를 기록한 획기지가 있는데 전주에서 열린 대회 같다면서 연락이 왔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획기지에는 매회마다 적중된 화살 수와 참가자 전원의 성적이 빠짐없이 기재돼 있었고, 당시로선 찾아보기 힘든 여성 선수에 대한 기록까지 있더군요. 하지만 당시엔 오랜 시간이 지난 기록물이 아니었기에 큰 가치가 있진 않았어요. 그래도 전주에서 열린 대회 기록물이니 그 가치를 떠나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 지난해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 소식을 듣고 천양정 궁도대회 획기지를 기증했어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기에 전주시에 기증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히 기증할 기록물인데 상까지 받게 되니 그저 뿌듯할 따름입니다. 평생의 꿈, 내 고장 기록물 연구소오래된 기록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지역입니다. 역사적 사건의 기록물이 아닌 이상 본고장에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지요. 전주의 기록물은 전주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이번에 진옥 주장 술통을 비롯해 1968년 전북대 전주성심외국어학원 학생 모집 요강 전단지, 전주 최씨 족보 등도 모두 전주의 기록물이기에 전주에 있어야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기록물을 모으는 일을 하다 보니, 전주에 관련된 기록물을 참 많이도 모았습니다. 전주 시내 학교 졸업 앨범, 족보, 다양한 책자들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기록물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이에요. 그 바람을 현실화하는 계획도 세웠답니다. 바로 내 고장 기록물 연구소를 여는 겁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후쯤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껏 해온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의미 있는 내 고장 기록물 수집에 정진할 계획입니다. 김세신(71) 어르신은 전주시 완산동 용머리고개에서 ‘국보고미술원’을 4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문서, 고미술품 등 근대 유물을 수집, 판매하고 있다.
2020.10.28
#역사
#기록
#궁도
#기록물
#기증
잘 고쳤다 이 집
옛 여관이 여행자의 명소로
대명여관
낡은 간판도, 방에서 나온 물건도 모두 그대로 두세요 전주시 중앙동에 있는 ‘대명여관 전주 갤러리 게스트하우스’는 산벚꽃 같다. 비슷비슷한 높이의 건물 사이에서 흰색 테두리와 붉은 벽돌이 어우러진 3층 건물은 눈에 얼른 들어오지만, 막상 가까이 가려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건물 앞에 서면 활짝 핀 산벚나무 아래 섰을 때처럼 활짝 열린 문이 발밑을 환하게 밝힌다. 이 문은 60여 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문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는 ‘대명여인숙’이었다가 1969년에 ‘대명여관’이 되었다. 그리고 김은희 씨 부부의 손길이 닿아 지난 2016년 봄, ‘대명여관 전주 갤러리 게스트하우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호주에 사는 부부는 김은희 씨의 친정인 전주에서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우연히 빈 건물인 채로 방치되던 ‘대명여관’을 발견했다. 부부는 보자마자 “정말 멋지지 않아?” 하고 동시에 외쳤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전주를 좋아해요. 그래서 나중에 전주에서 살 집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이 집을 만난 거죠. 현재는 호주와 전주를 오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게 됐어요.”라고 김은주 씨는 이야기한다. 그녀와 남편이 이 공간을 꾸미는 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그대로 두세요!”였다. 색 바랜 옛 간판과 항아리들, 방마다 놓여 있던 작은 TV와 낮은 탁자, ‘용건만 간단히’라고 써 놓은 전화기, 여관 주인이 사용한 붉은 자개장과 재봉틀 등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는 고생을 자처했다. 부부에게 이곳의 가치는 대명여관이 거쳐 온 ‘시간’이었던 까닭. 사람을 여행하는 곳, 옛것과 새것이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사람이 모이는 곳에 시간이 고이면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지금의 ‘대명여관’도 마찬가지. 1950년대부터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으니 말해 무엇 하랴. “50대 한 여성분이 오셨는데, 여기에 살면서 대학을 다녔노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주인 할머니가 마당에서 빨래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하시면서 반가워하셨어요. 예전에는 잠깐 하숙집으로 운영되기도 했던 모양이에요.” 김은희 씨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중매쟁이’ 역할을 하게 된 일도 있다. 익산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던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만난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사람들이 있단다. 그래서 결혼 축하연도 이곳에서 열었다고 한다. 행여 이곳을 찾게 되거들랑 옛것과 새것이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앞으로 김은희 씨 부부는 카페와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 1층 공간에서 꾸준히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또한, 이 공간과 어울리는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무료로 장소를 내어줄 계획도 갖고 있다. 여행자들 마음속 꽃나무가 향기를 머금겠다. 대명여관 전주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주소 |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4길 25-10문의 | 010-7528-2122
2020.10.27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전시회
#카페
오래된 집이 멕시코 요리 전문음식점으로
아이마미따
멕시코 중세도시에 살던 부부, 전주의 골목길에 반하다전주 ‘객사길’에는 작은 ‘멕시코’가 있다. 멕시코에서 6년 동안 음식으로 한국을 알려 온 이민구, 이사벨 씨 부부가 이번에는 전주에 멕시코 문화와 요리를 소개하는 음식점 ‘아이마미따’를 열었다. 직선으로 뻗은 골목 안쪽으로는 색색의 벽과 나무 문이 늘어서 있고, 머리 위에서 멕시코 전통 공예인 ‘빠뺄 삐까도(papel picado)’의 화려한 문양이 바람에 흔들리면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멕시코에서의 식당 운영은 안정적이었지만, 이민구 씨 가족은 지난 2018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올해 여섯 살이 된 아들 환희와 멕시코 사람인 아내에게 한국에 대해 알려 주고 싶다는 그의 바람 때문. 그래서 부모님이 살고 계신 전주에 자리를 잡았다. 부부가 현재의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골목길’에 있다. “과나후아토(Guanajuato)라는 곳에 살았는데, 아기자기한 골목길로 이루어진 곳이었거든요. 여기에 와서 보니까 그 골목길이 떠올라서 반갑더라고요.” 이민구 씨 부부는 마당이 있고,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멕시코 음식은 물론, 멕시코의 문화를 알리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두 사람에게 두 채의 낡은 집은 새로운 꿈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실내에 전시된 멕시코 작가의 인물사진과 민속품들도 매력적이지만, 마당에 설치한 여우, 원숭이, 토끼 등 다양한 색깔의 조형 작품을 창문을 통해서 보는 즐거움도 크다. 이민구 씨는 “원래 오랫동안 주택으로 쓰였기 때문에 내부만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바꾸고, 외관이나 뼈대는 그대로예요. 대들보나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던 흔적도 남아 있죠.”라고 말한다. 한국인 남편과 멕시코인 아내가 만드는 음식과 이야기스물세 살에 여행자로 멕시코에 갔다가 한식당까지 열게 되었다는 이민구 씨. 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는 아내인 이사벨 씨를 만나 더 영화 같아졌다. 지인의 생일 파티에서 아내인 이사벨 씨를 만나게 되었고, 식당을 운영하는 동업자로, 인생을 여행하는 동반자로 함께하고 있다. 대대로 축산업을 해온 까바소스 가문의 딸인 그녀는 현지에서 공수한 재료와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조리법을 활용해 멕시코 음식을 선보인다. 미역국과 장조림, 김치를 특히 좋아하는 아사벨 씨는 막걸리와 모주 같은 전통 술도 무척이나 사랑한다. 이들 부부는 새로 뿌리내린 전주에서 매일 즐거운 상상을 한다. “얼마 전엔 환갑을 맞은 분께서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시기도 했고요. 88세 어르신이 오셔서 음식을 맛보시고 즐거워하셨어요. 멕시코 음식과 분위기를 즐기시는 모습을 보는 게 저희의 기쁨이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편안한 대화 속에서 오래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이마미따주소 | 전주시 완산구 전주객사1길 46-7문의 | 063-282-1585이용시간 | 화~목 11시 30분~24시, 금~일 11시 30분~새벽 2시
2020.10.16
#멕시코
#객사길
#멕시코요리
멋진 하루
에코시티 세병호
엄마 품처럼 포근한 초록 세상
시어머니와 함께 세병호를 걷다시어머니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경상도 여자가 전라도로 시집을 왔으니,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던 결혼 초기부터 그랬다. 아직도 주름진 손으로 담가 주시는 김치를 받아먹는 막내며느리, ‘얼마나 더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질 때도 있지만, 마흔 후반이 된 지금도 어머니에게 나는 아이 같은 막내며느리다. 햇살이 싱그러운 5월, 오랜만에 시어머니와 옆 동네 산책에 나섰다.주말 아침 조금 부지런을 떨어 도착한 세병호. 지난 여름 에코시티 한여름 밤의 콘서트에 가수 안치환을 만나기 위해 발품을 팔았던 곳이건만, 차를 가지고 오니 주차할 곳을 몰라 시간이 꽤 걸렸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차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아이고, 경치가 참 좋구나!” 하는 어머니의 감탄사가 연신 들린다. 혼자 하는 말씀이지만 어머니가 좋다 하니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여든이 넘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내내 보던 것이 초록 들판이었을 텐데 뭐가 저리도 좋으실까?’ 싶어 여쭈어보니 시골 노인의 눈에는 아파트 숲속에서 만나는 푸름과 세병호가 안겨 주는 편안함이 마음에 드셨나 보다. 얼마 전만 해도 연둣빛 새싹을 피워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자연이 어느새 인생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듯 초록을 발산하고 있으니 세병호의 아침은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다. 산책로이자 아이들의 자연 놀이터를 만나다에코시티가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이름이 바로 세병호이다. 사진작가들에게는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는 이곳은 쉼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도시인들의 삶 속에 잠시나마 근심 걱정 내려놓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에코시티 주민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산책로이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자연 놀이터로 사랑받고 있다.세병호는 에코시티가 들어오면서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가 아니다. 향토사단 전주35보병사단이 있을 때 군부대 안에 있었던 호수였다. 그런 탓에 호수와 호수 주변은 보존이 잘 되었고, 수명이 꽤 오래된 나무들과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보통 걸음의 탐방객이라면 보고 즐기며 걷는 시간이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으나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와 함께하는 산책은 넉넉히 2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다. 숲길을 거닐고 잔디밭 벤치에서 잠깐의 휴식, 그리고 모양새 없이 준비한 막내며느리의 간식 꾸러미로 허기를 달랜 다음 오붓한 둘만의 데이트는 막을 내릴 것이다. 천만다행! 다리 힘이 없으신 어머니가 당신 보기에도 세병호 둘레길은 밭에 가는 거리보단 짧다 싶으신지 자신감을 보이신다. 호수에서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다세병호의 아침은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이다. 자연이 선사하는 빛과 향기 아래 생태공원을 조깅하는 젊은이, 다정히 산책길에 나선 노부부, 그리고 호수 주변 이름 모를 꽃들과 함께하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모든 것들이 한없이 행복하고 평화롭다. 적당히 자란 수레국화가 꽃을 피우고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한다. 덩달아 붓꽃인지 꽃창포인지 구분이 안 되는 보랏빛 꽃을 피우고선 우리를 보고 군데군데 서서 손을 마구 흔든다. 호수 한쪽 귀퉁이엔 지난봄에 주민들에게 쏟아지는 사랑을 받았을 철쭉들도 보이고, 머지않아 꽃망울을 터뜨릴 장미들도 줄을 지어 키를 키우고 있다.평상이나 벤치, 잔디밭 곳곳에는 가족 단위로 산책 나온 주민들이 자리를 깔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에 덩달아 도시의 생명력이 넘치는 듯하다.아직은 잔디밭의 키 작은 나무들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자연친화적인 호수공원이 가까이 있음에 뿌듯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산책로가 경사지지 않아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이용하기에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숲속 산책길을 빠져나오며, 나에게 약속한다. 어머니가 더 연로해지시면 휠체어를 타고라도 다시 한번 세병호를 찾아오자고. 글 김갑련 | 전주시청 블로그 기자김갑련 씨는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과 시민들에게 전주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전주시청 블로그 기자’이다. 김갑련 씨는 전주의 자연과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전주 알림이이자 사회복지사이다.
2020.10.12
#호수공원
#세병호
#에코시티
#백석저수지
전주 음식
무더위 쫓는 전주산 체리와 수박
새콜달콤 전주산 체리, 맛보셨어요?빨갛고 앙증맞은 모양의 체리, 우리에게 더는 낯선 과일이 아니다. 수입산 일색이었던 체리가 이제 전주에서 생산되면서 유쾌한 반전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는 국내에서 체리를 생산하는 몇 안 되는 지역 중에 하나다. 물론 체리를 키우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재배법도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기후와 토양이 낯설었고 알맞은 품종을 선택해 심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전주에서 처음 체리 농사를 시작한 전주체리영농조합 박종신 이사가 체리를 수확해 내다 팔기까지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누나가 해외여행가서 체리나무를 보고 반해 버린 거예요. 집에 와서는 무작정 체리나무를 구해서 심었는데 될 리가 있나요? 농대 다녔다고 저에게 연락이 왔는데 저도 낙농·유가공이 전공이라 나무나 식물 쪽은 몰랐지요. 처음에는 가관이었어요. 다행히 2012년도에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윤익호 박사님을 만나 배우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리를 잡았습니다.”최근에는 수입산 대신 안전한 먹거리를 찾아 국산 체리를 찾는 소비자들 덕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래서 전주 체리는 전주푸드직매장에 내놓기 무섭게 팔리는 ‘인기 품목’이다. 새콤한 향 뒤에 따라오는 달콤함과 부드러운 과육의 식감, 그리고 방부 처리를 하지 않은 국산, 그리고 다양한 음식에 응용할 수 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수박이~ 왔어요. 시원 달콤 전주 수박!그런가 하면 여름에 빼놓을 수 없는 대표 과일은 단연 수박이다. 고창 수박이니, 어디어디에 꿀수박 유명 수박이 많기도 하지만 전주에도 수박이 생산된다. 그것도 꽤 맛있는 수박이다. 현재 전주 수박은 고랑동과 반월동 인근에서 많이 생산된다. 고랑동에서 수박 농사를 짓고 있는 노정옥 씨는 사람들이 ‘전주 수박’을 많이 찾아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전주 사람들조차도 전주 수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래전부터 수박 농사를 지어서 맛과 품질만은 자신해요. 올여름에는 전주에서 나는 전주 수박을 많이 찾아줬으면 좋겠어요.”올여름에는 전주 땅에서 전주 사람들이 정성으로 키워낸 이색 과일 수박과 체리로 더위를 식혀보는 건 어떨까? 얼음 동동 띄운 체리수박화채 한 그릇이면 더위가 저만큼 달아날 것이다. 여름 과일의 백미, 전주 복숭아뭐니 뭐니 해도 전주를 대표하는 과일은 복숭아다. 지금 우리가 먹는 근대 복숭아의 효시가 된 지역이 바로 전주다. 전주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복숭아 재배지였다. 전주 복숭아는 맛도 단연 으뜸이다. 햇볕이 많고 물이 풍부하면서도 복숭아 재배에 적합한 사질 토양은 전주 복숭아 맛을 최고로 만들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많은 전문가들이 전주 복숭아를 품질 면에서 국내 최고로 꼽는 이유이다. 온 가족과 함께 전주가 만든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전주 복숭아로 한여름 더위를 달래보세요. 문의 | 전주푸드직매장 종합경기장점(063-253-9850), 송천점(063-255-2365)
2020.10.08
#체리
#수박
#복숭아
전주, 도시는 살아 있다
찬란했던 역사 전라감영에서 되살아나다
옛 위엄 고스란히,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 굴곡진 세월을 거치며 터만 남았던 전라감영의 동편 부지가 3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오는 10월 7일 문을 연다. 일제 강점기 때 소실되었던 44채 중 7채의 건물을 복원한 것으로, 1951년 화재로 인해 선화당이 유실된 이후 67년 만의 부활이다. 전라감영은 조선 시대를 관통하여 1896년도까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다스리던 관청이며, 동학농민혁명 때 전주화약을 맺었던 장소이다. 전주시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전라감영을 2014년 복원하기로 하고, 전문가로 구성된 전라감영 재창조위원회를 구성했다. 재창조위원회는 전라감영의 원형을 고스란히 되살리기로 결정하고, 한옥 건축의 최고봉인 최기영 대목장을 비롯해 미장·온돌·창호까지 최고의 기능장들이 참여한 대공사에 착수했다. 19세기 후반 제작된 완산부 지도로 큰 틀을 잡고 각종 사진과 고지도, 문헌을 바탕으로 꼼꼼히 고증했으며,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흔적을 샅샅이 찾은 끝에 외관은 물론 내력과 생활상까지 구현했다.그저 옛 모습을 박제한 문화재가 아니라, 시민이 공감하며 동참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것이다. 건물별로 3D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활용한 실감형 콘텐츠로 생동감을 불어넣고 미디어파사드로 화려하게 수놓는다. 역사적 지식으로 스토리텔링한 투어와 게임을 운영하며, 전라감영의 진상품을 손수 만드는 체험 교육과 전통음악 공연도 진행할 예정이다. 10월에는 전주대사습놀이가 열리는 무대가 된다. 또한, 전라감영을 친근하게 안내할 청소년 문화유산 해설사를 운영한다. 전라감사의 집무실 ‘선화당’과 민심을 살피던 ‘관풍각’ 관청을 드나드는 세 번째 관문인 내삼문을 열고 들어가 찬찬히 둘러보자. 내삼문에서 뻗은 길을 쭉 걸어가면 선화당에 다다른다. 이곳은 전라감사가 도정을 수행하던 집무실로, 전라감영의 중심 건물이다. 웅장한 외관과 우아한 곡선의 팔작지붕이 돋보이며, 내부에는 미국 공사 대리 ‘조지 클레이튼 포크’ 중위가 찍은 사진을 참고하여 제작한 병풍형 가리개와 기물 등으로 장식했다. 또한, 디지털 병풍과 와이드 프로젝트 비전을 설치해 감사의 지방 통치와 감영의 조직 및 문화에 관한 내용을 상영한다. 선화당 동쪽에는 감사가 민정과 풍속을 살피던 누각인 관풍각이 들어섰다. 이곳에서는 시간여행(타임슬립) 만리경을 통해 전라감사 순력(巡歷, 관찰사나 원 등이 관할 지역을 순회하던 일)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선화당과 관풍각의 현판은 일제 강점기 때 촬영된 사진 속의 글씨를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했다. 수령 200년의 회화나무는 선화당 북쪽에 우뚝 솟아 새 모습을 갖춘 감영을 바라보고 있다. 전라감사의 휴식처 ‘연신당’과 식구들이 거처하던 ‘내아’북쪽에는 전라감사가 휴식을 취하던 연신당이 있다. 이곳 역시 실감형 콘텐츠를 통해 전라감영 건축과 감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와 함께 감사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내아와 내아 행랑이 지어졌다. 내아에서는 교육 체험이 이루어지며, 내아 행랑에서는 통인청(소리), 선자청(부채), 지소(한지), 인출방(출판)에 관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이렇듯, 천년 고도 전주의 역사성과 전통성, 그리고 오랫동안 간직해 온 문화적 정체성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라감영.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자 문화의 장으로 거듭날 날을 앞두고 있다. 수백 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시민과 호흡할 날이 머지않았다.
2020.09.23
#조선시대호남의수부
#전라감영
#10월7일문을엽니다
“사라져 버린 곳들도 사진 속에는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영무 어르신이 추억하는 1970년대 전주의 풍경들
20대 시절, 걸으면서 만난 1970년대의 전주 제 나이 스물다섯 살에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전주신학원에 입학했어요. 제가 1946년생이니 1970년도였지요. 그 당시 전주신학원이 신흥고등학교 정문 맞은편 언덕에 있었습니다. 왼쪽에 신일아파트가, 오른쪽에 예수병원이 있었고, 지금의 엠마오사랑병원 자리에 예수병원이 있었지요. 제가 남원 출신이에요. 그래서 전주신학원에 다닐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전주를 참 많이 걸어 다녔지요. 그때 본 전주 풍경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가장 즐겨 찾던 곳이 다가공원이에요. 신학원 바로 건너편에 있어서 틈날 때마다 산책하러 갔었지요. 다가공원은 지금도 가끔 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일요일이면 신흥학교를 지나서 천변을 따라 대성리에 있는 교회까지 걸어갔어요. 전주천변은 참 많이도 바뀌었지요. 그 시절에 비해 산책로로 정리가 많이 된 느낌입니다. 사라진 풍경들도 생각이 나는데요. 싸전다리 건너편 오른쪽 산의 초록바위 순교 터도 길을 넓히면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요. 지금은 조형물만이 그곳이 순교 성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지요. 한옥마을 모습도 참 많이 바뀌었어요. 제 기억에 오목대에 샘터가 있었거든요. ‘쌍샘길’로 불리던 그 길이 세월이 흐르고, 골목길을 넓히면서 샘터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쌍샘이 복원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라져서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복원된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완산동 집에서 기린로나 모래내까지 걸어 다니는데 신학원 다니던 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달라진 전주의 모습도 떠오르고요. 사진으로 다시 만나는 전라북도박물관 옛 모습 1971년, 신학원 2학년 때, 전라북도박물관에 갔어요. 사실 정확히 언제, 왜 갔는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당시 신학원 친구들과 함께 갔던 기억만 납니다. 두 친구와 함께 갔는데 한 친구는 김제 출신이고, 다른 한 친구는 진안 출신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셋 다 전주 사람이 아니어서 시내 구경 한번 가 보자 하고 갔던 모양입니다. 매화꽃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아마도 2~3월경이었나 봅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친구들이 시내 구경을 나가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기념사진도 찍겠다고 카메라까지 챙겨 갔지요. 박물관 안을 구경하고 나와서 정원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시 태조비가 박물관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사진 보고 알았어요. 제가 태조비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아, 그때 그 태조비가 경기전 앞으로 옮겨 왔구나’ 하고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사진을 보니 50년 전 박물관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어요. 지금 성심여고 네거리에 있는 구둣방이 바로 박물관 정문 자리였어요. 그런데 박물관이 경기전 자리에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믿지를 않더라고요.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찍은 거라며 사진을 보여주면 그제야 믿더군요.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사진 한 번 보여 주는 게 더 빨랐던 셈이죠. 전주신학원 사진도 찍어 뒀는데요. 제가 나오고 난 뒤, 4~5년 후에 전주신학원이 없어졌다고 해요. 사라진 건물이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신기해요? 자리를 옮긴 곳도, 사라져 버린 곳도 모두 사진 속에는 그대로 살아 있으니 말이에요. 사진은 역사적 자료이자 자랑스러운 기록물제가 사진을 기증한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비록 사라져 버렸지만, 사진 속에 남아 있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옛 모습을 떠올리고 믿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으로 1971년 찍은 전라북도박물관 사진을 기증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보거나 겪어 보지 않았지만, 사진으로나마 그 시절에 대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옛것에 관심이 참 많아요. 옛것에는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옛 물건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제 사진을 보고 ‘전라북도박물관이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구나’하고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진을 보고 난 뒤, 경기전에 가면 ‘이곳에 전라북도박물관이 있었구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옛날 박물관이 있던 자리구나’ 하고 한 번 더 생각했으면 해요. 전주는 그 어느 곳보다 우리 문화가 많이 남아 있고, 계승하고 있는 곳이잖아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옛날 전주의 모습과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과 애착을 보였으면 해요. 아끼고 보호하면 더더욱 좋겠지요.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사진으로 남겨 두세요. 사진은 증명인 동시에, 자랑할 수 있는 자료거든요. ‘나 이것 봤다, 여기 가 봤다’ 하는 자랑 말이지요. 그러니 관심을 쏟고, 보고, 기록하길 바랍니다. 이영무(74) 어르신은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40여 년간 목회 생활을 했다. 지난해 전주에서 출간한 종교 간행물 을 전주시에 기증한 데 이어 올해 1971년에 찍은 전라북도박물관 사진을 기증했다.
#전라북도박물관
#경기전
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군산까지
사라지는 것들 너머 사라짐에 귀 기울이다
근대와 현재라는 두 겹의 군산 시간여행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군산의 근대상을 잘 보여 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가족이 처음 군산에 발을 내딛게 되는 째보선창은 군산에서도 가장 분주하고 생기 넘치는 지역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지러진 건물들만이 탁한 서해를 마주하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바다만 아니라면 강원도 어느 폐광 마을을 떠올렸을 것이다. 기계 부품과 공구를 파는 가게들 그리고 몇몇 식당만이 지난 시절을 간신히 이어주고 있다. 째보선창은 금강의 지류가 바다로 트이면서 Y 자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 지역 상권을 쥐고 있던 객주가 째보(언청이)였다는 말도 있지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일제가 그 지역에 부두와 어시장을 조성하고 배들이 정박하기 좋게 뜬다리 부두를 설치했다. 부둣가에 일렬로 서서 세월을 견디고 있는 건물들 뒤로는 바다와 나란히 놓인 철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금세 군산내항이다. 그 일대는 장미동(藏米洞)인데, 장미꽃 같다 해서 장미동은 아니고, 일본으로 실어 갈 쌀들을 가득 쌓아 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 조선은행 건물이다. 1923년 건립 당시에는 군산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이다. 높은 층고로 과시적인 위용을 드러내는 이 건물은 근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대금과 농지 수탈을 위한 대출이 주요 업무였다. 1981년부터는 개인 소유가 되어 예식장으로 사용되다가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거쳐 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로 곁에 자리 잡은 붉은 건물은 옛 군산세관이다. 대한제국 때인 1908년, 벨기에산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마감된 우아한 건물이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장미꽃 담장이 어울릴 만한 이 붉은 건물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세행정 및 경제수탈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참 수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세관 창고와 근처 여기저기 20만 가마 이상의 쌀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한다.장미동 너머 신흥동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고급스러운 적산가옥들이 모여 있고, 근처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가 있다. 팔작지붕 홑처마 지붕이 급경사를 이루는 대웅전과 복도로 연결된 요사채는 모든 재료를 일본에서 공수해 에도시대 건축양식에 따라 지었는데, 대들보는 백두산 금강송을 사용했다. 절 뒤편에는 창건 때부터 조성된 대숲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산 맹종죽이라 더욱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그곳에서 다시 월명산과 신흥동 일대를 천천히 걷다 보면 군산이란 곳은 어쩌면 지난 시간을 꽉 움켜쥐고 있다가 천천히 풀어내는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밀려오는 근대의 분위기 속에서 여정은 다시 전주로 이어진다. 근대문화, 전주 안에 있는 또 다른 전주전주에는 군산의 수탈상과는 또 다른 모습의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전주 웨딩의거리와 차이나타운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 ‘박다옥’이라는 우동집과 중국인 포목상점 건물이 있고, 서문교회의 한옥 종각이 남아 있다. 다들 지척이라 여유 있게 산책할 수 있다. ‘박다옥’은 일본인 상업지역에 들어선 우동집으로, 전주에 처음 생긴 대형 일식집이었다. 중앙 현관 맨 윗부분은 페디먼트(pediment, 고전 건축에서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이 있는 현관)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대 그리스 건축물에 많이 사용되던 삼각형 장식이 이채롭다. 중국인 포목상점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전주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이 지었다고 한다. 출입구 상부에 삼각형 박공을 두었는데, 상하이의 전통적인 비단 상점을 따라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물 한쪽에 옛날식 이발소가 들어서 있다. 서문교회에서 다가교를 건너 왼쪽 언덕길로 접어들면 구 예수병원 건물(현 엠마오사랑병원)이 있고, 그 위로 가면 선교묘역과 선교사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곳을 만날 수 있다. 1892년 일곱 명의 젊은 선교 지망생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왔다. 호남 선교의 거점인 전주 중화산동 일대에는 그 흔적들이 많다. 담쟁이덩굴로 가득 덮인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인 구 예수병원은 1912년에 지었다가 화재로 소실되고 1936년에 새로 지어졌다.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에 이은 국내 두 번째의 근대적 병원이다. 원래 이름은 건축 비용을 댄 미국 교인 이름을 따서 매코완 기념병원으로 불렸으나 사람들은 야소 병원으로 더 많이 불렀다고 한다. 한자로는 예수를 야소(耶蔬)라고 적는데 사람들이 쉽게 부르던 그 이름이 공식 명칭이 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금 더 언덕을 오르면 선교묘역과 선교사촌이 나온다.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물탱크 창고와 숙소로 쓰던 몇몇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또 몇은 개축되어 있다. 먼 이국의 땅에서 깊은 신앙심으로 한국인에게 의료봉사를 하며 삶을 마감했던 이들의 생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주에서 이국적인 느낌이 그 어디보다 물씬 풍기는 동네다. 전주 안에 있는 또 다른 전주라 할 만하다. 이 길을 걷다 보면 과거와 오늘의 경계가 흩어지며, 시간은 담쟁이 잎들처럼 물들고 떨어지고 한다. 인생이 무상하다고 흔히들 되뇌지만, 무상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항상이지 않다는 말이니, 사라짐은 이미 우리 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삶의 내용일지 모르겠다. 가을이 깊어지면 호젓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구 예수병원을 가득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면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지구의 자전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사라짐의 소리’가 있다면 이곳 어딘가에서 들려올 듯도 하다. 글 유성용│여행생활자 전주에서 태어나 세계를 떠돌다가, 최근 동고사 아래 작은 헌 집을 고쳐 살고 있다. EBS 세계 테마기행, KBS 영상 앨범 등에서 캄차카, 부탄, 칸첸중가, 멕시코, 중앙 안데스 등 세계의 오지들을 소개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근대문화유산
#시간여행
여행자라면, 여름이라면
전주 가맥 3대 천왕
전주 가맥의 ‘갑’ 전일갑오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돼 ‘웨이팅’이 더 길어졌지만, 전주 시민들에겐 가장 친숙한 가맥집이다. 여름밤에는 테이블로 변신한 맥주 박스가 가게를 둘러싼다. 가게 안 자리가 모자라서, 여름밤의 낭만의 즐기고 싶은 ‘노천 가맥’의 풍경은 각박한 마음마저 씻어내기도 한다. 지금은 기계를 이용해 갑오징어를 눌러내지만, 본래 망치를 사용해 일일이 다 손으로 두드리고 연탄에 구워내는 갑오징어가 먼저 이름을 떨쳤다. 갑오징어 두드리는 소리는 전일갑오를 대표 하는 또 다른 상징이었다. 이렇게 두드려지고, 눌려 굳건함을 잃고 한껏 부드러워진 갑오징어 살들은 맥주 안주로 그만이다. 불에 구워낸 구수함과 이 집만의 특제 간장 소스는 맥주 ‘한 짝’쯤은 거뜬히 비워내게 했다. 가게 앞 연탄 화로에서 종일 몸을 말리고 있는 황태는 말린 생선만이 선사하는 포슬포슬함의 결정체다. 여기에 간장, 물엿, 청양고추, 깨가 수북이 들어간 특제 소스를 먹기 위해 안주를 추가할지도 모를 일. 주소 l 전주시 완산구 현무2길 16 전화 l 063) 284.0793 바삭 황태·촉촉 먹태 초원편의점아는 사람만 가게 안쪽에서 간단히 맥주를 즐기는 ‘초원편의점’. 지금 이곳도 가맥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되었다. 이곳의 대표 안주는 황태와 먹태다. 전주 대표 가맥 집들이 연탄불에 구워낸 황태의 맛을 고수하듯이 초원편의점도 오랜 시간 지긋이 구워낸 황태가 대표 안주다. 이곳은 노릇 바삭하게 구워진 황태를 접시가 아닌 커다란 쟁반에 내어준다. 워낙 바삭한 터라 통으로 구워진 황태를 찢을 때 가루가 사방에 날리기 때문에 널찍한 쟁반이 제격. 바삭한 황태 못지않게 초원편의점 고수들이 찾는 건 바로 먹태다. 먹태는 ‘황태가 되지 못한 촉촉함’을 품고 있다. 마른안주의 바삭함보다 쫄깃함을 즐기고 싶다면 황태보다는 먹태가 좋다.‘꾸덕꾸덕’한 식감이 황태 못지않다. 이곳에서도 물엿과 간장을 넣은 소스 장을 내어 주는데, 마요네즈를 넣은 것과 넣지 않은 것 두 종류 모두를 맛볼 수 있다. 다른 집의 수북한 깨 대신 초원편의점에서는 송송 썬 대파를 얹는데, 그 향과 맛이 이 집 만의 소스로 변신시켜 준다. 주소 l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32-1 전화 l 063) 287.1763 ‘치맥’과 ‘가맥’의 궁합 영동슈퍼이곳에 도착해 맥주 세 병을 내려놓으면 나타나는 ‘닭발’ 튀김. 가맥의 짝꿍 황태나 마른안주도 당연히 있지만, 영동슈퍼는 ‘치맥’ 이다. 소금이나 각종 향신료로 간을 하지 않은 시장 닭을 바로바로 튀겨 내주는 매콤한 고추 통닭과 쫄깃한 똥집 튀김, 그리고 떡하니 쫙 벌어진 통 닭발 튀김은 끝없이 맥주잔을 채우게 하는 맛이다. 서비스로 내어주는 닭발 튀김 덕에 진즉에 명성이 높아진 영동 슈퍼도 전주 경원동의 터줏대감이다. 전북대학교 앞으로 잠시 자리를 옮긴 적도 있지만, 다시 가맥의 원조 경원동으로 돌아와 치맥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통닭은 물론 닭의 다양한 부위를 고루 맛볼 수 있어 젊은이들이 특히 즐겨 찾는다. 튀김 반죽에 송송 썰어 넣은 청양고추의 알싸한 맛은 맥주와 찰떡 궁합. 쫄깃하게 뜯는 맛이 일품인 닭발 튀김은 메뉴판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릴 만큼 인기 안주가 됐다. 비교적 젊은이들의 걸음이 잦아 한복을 입고 방문하거나 SNS에 게시하면 서비스가 제공되는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다. 주소 l 전주시 완산구 현무1길 14
2020.09.22
#맥주
#오징어
#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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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