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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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됐든 역병이 됐든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나면 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법이니 역병이 지나가면
세상은 다른 풍경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과연 그때의 세상은 지금보다 나을 것인가 아니면 더 가혹할 것인가.
역병이 창궐하는 지금,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그래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역병 뒤 과연 농민군의 염원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이광재 소설가와 열혈 독자 유정미 씨가 전주와 정읍을 돌며 동학농민혁명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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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class="txc-image" style="clear: none; float: none;" alt="image" src="https://daum.jeonju.go.kr/data/sys_webzine_list/3740062266_amoisCUx_000f61dc62baedadddb28c2ae2793102b4983c0b.jpg"></p><p><br></p><p><span style="font-size: 14pt;"><b>전라감영,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b></span></p><p><span style="font-size: 12pt;">전북도청사가 있었고, 그보다 먼저는 호남을 굽어보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에 전라감영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 물론 예전 전라감영의 위용과 규모에는 미치지 못할 터지만 어쨌거나 선화당(宣化堂)이 복원되면 전주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명소가 될 것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아울러 내아를 포함해 부속건물 또한 알뜰하게 들어서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두고 있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문제는 옷이 아니라 내면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번듯하게 지어진 건물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겠지만 그 이면에 어떤 은은함을 배어들게 할 것인가 질문해야 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애꿎은 백성을 잡아다 동헌 마당에 뻗쳐 놓고 매타작을 일삼던 곳이 그 옛날의 관청이었음을 떠올릴 때 그 치장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백성들의 속살은 더 아프게 멍들었을 것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자식을 낳아 호남에서 관직을 하게 하는 것’이 옛 양반님네의 꿈이었다 하니 우리가 복원하려는 것이 그러한 양반님네의 꿈은 아닐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 12pt;">이번에 복원된 선화당 옆에는 오래도록 그곳을 지켜 온 회화나무가 푸른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150살쯤으로 추산되는 이 회화나무가 거기서 내려다본 풍경 가운데 가장 장쾌한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 모르긴 해도 탁주 잔을 앞에 둔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이 전라감영과 각 고을에 대도소(동학의 교세 확장을 위해 설치된 교단 조직)와 집강소(농민군이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기구)를 설치하고 관민상화(官民相和)의 꿈을 이루고자 통 큰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이 한 번의 대담으로 호남은 어디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새 세상으로 거듭났으니 전라감영은 전 세계 민주주의의 발상지이자 성지가 아닐 수 없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그러니 이 혼탁한 각자위심(各自爲心, 각자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의 한복판에서 전라감영은 동귀일체(同歸一體,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일)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핵심 동력이자 심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span></p><p><br></p><p style="text-align: center;"><img class="txc-image" style="clear: none; float: none;" alt="image" src="https://daum.jeonju.go.kr/data/sys_webzine_list/3740062266_xFWCqeST_ae99e0aa38cd224400a93332f675dc71d5053815.jpg"></p><p><br></p><p><span style="font-size: 14pt;"><b>아프지만 아름답게, 전주동학혁명 녹두관</b></span></p><p><span style="font-size: 12pt;">우리의 발길이 다시 향한 곳은 완산칠봉 투구봉 정상에 소담하게 자리 잡은 전주동학혁명 녹두관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2019년 6월 1일 개관한 녹두관은 입구에 들어서서 말굽 모양의 회랑을 따라 농학농민혁명을 기록한 전시물을 둘러보도록 설계되어 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바로 그 말굽 모양의 중앙에 무명 동학농민군의 묘가 놓여 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동학농민혁명 당시 진도에서 효수된 농민군의 유골이 인종학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보관되어 왔는데 이를 모셔와 뒤늦게 안장을 한 것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누군들 그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겠는가.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오늘 우리가 누리는 복락이 있다면 이는 마땅히 저들의 한숨과 의분과 장대한 뜻이 빚어낸 환희가 아닐 수 없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그렇다면 부도 명예도 다투지 않던 저들의 뜻이 과연 오늘의 천하에 두루 펼쳐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 12pt;">무명 동학농민군의 묘를 참배하고 마저 말발굽 모양의 회랑을 돌아 나오다 보면 필자의 소설 &lt;나라 없는 나라&gt;의 마지막 글귀를 만나게 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전봉준과 그를 그림자처럼 보필하던 호위무사가 나눈 대화가 그것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호위무사가 이제 재를 다 넘은 것이냐 묻자 아직 재는 남아 있다는 전봉준의 답변.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전봉준이 대답한다. 그냥 두어도 된다고,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거라고,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이라고…. </span></p><p><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밖으로 나서자 역병이 한창이라지만 하얀 철쭉은 완산에 만발하고 미세먼지가 사라진 세상은 부셔서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역병으로 한 세상이 멈추자 새 세상은 이리도 눈부시게 열리는 중이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어쩌면 코로나19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역설의 나침반이 되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span></p><p><br></p><p><span style="font-size: 14pt;"><b>정읍, 오래된 새것을 들여다보자</b></span></p><p><span style="font-size: 12pt;">원평에서 순댓국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차를 달려 황토현에 오르자 풀 냄새가 진동하고 새들이 소란스레 지저귄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소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솔바람이 이마에 밴 땀을 씻어 주는데 전승기념탑을 우러러보자 시린 하늘에 다시 눈이 부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그곳 황토현 정상에서 농민군이 진을 쳤다는 시야산을 건너다본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황토현과 시야산 사이의 나지막한 구릉이 갑오년의 전쟁터인데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 제정되면서 그곳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중이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그런데 한바탕의 토목공사 끝에 새것은 창조되지 못하고 장엄한 항쟁의 옛 터전만 사라지는 건 아닐까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 비어 있는 공간 속으로 역사적 상상력이 스며드는 건 차라리 차선책인데 군림하듯 무슨 건물이 들어서고 뜻에 맞지도 않는 기념물이 설치된다면 백성의 전설만 영토 밖으로 쫓겨나는 꼴이 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근대화 이후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 온 우리의 공연한 기우이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span></p><p><span style="font-size: 12pt;">전봉준 장군이 생전에 살았던 고택을 들러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뭔가 일이 풀리지 않거나 과분한 일을 만났을 때 전봉준 장군 고택을 찾는 건 내게 습관이 된 것 같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그곳을 찾아 전봉준 장군의 형형한 눈빛과 마주치기만 하면 나는 잃어버린 겸손을 조용히 회복하게 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세상과 한번 맞서게 해 달라고 녹두장군께 간청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 12pt;">고부 관아가 있었다는 고부초등학교와 향교를 둘러본 뒤 이번에는 백산으로 향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동학농민군이 모여 군사를 편재하고 비로소 전봉준을 무리의 지도자로 선출했던 곳이 바로 백산이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 농민군이 얼마나 모여들었던지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 되었다는 그곳.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미세먼지가 사라져 시야가 트였으리란 예상 그대로 정상에 오르자 발아래 호남평야가 고스란히 펼쳐지고 멀리 전주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 또렷이 드러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 일갈하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가 작다 했다더니 전라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산이야말로 호남의 태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span></p><p><span style="font-size: 12pt;"><br></span></p><p><span style="font-size: 12pt;">본래 인간은 광대무변한 우주의 섭리를 받아 안고 살아야 하는 자이니 그게 바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요, 동학농민군이 몸소 행하고자 했던 삶의 방식이며, 오늘날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아닐까.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전주에서 정읍까지 동학농민군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은 고단하지만 많은 것을 깨치게 한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한 번 걷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될 길이 우리 사는 이곳에 놓여 있다. </span><span style="letter-spacing: inherit; font-size: 12pt;">이곳의 모든 것들은 오래되어 삭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못한 꿈을 일러 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새 길이 아닌가. </span></p><p><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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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글 이광재</b>│소설가</p><p>군산에서 태어나 전주에 거주하고 있다. 전봉준 평전 &lt;봉준이, 온다&gt;와 장편소설 &lt;나라 없는 나라&gt;, &lt;수요일에 하자&gt;가 있다. &lt;나라 없는 나라&gt;로 2015년 제5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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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