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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람
“뜨거운 응원, 강한 원팀 정신으로 일궈 낸 우승이죠”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주창훈 감독
우승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번 청룡기 우승을 이끌어 낸 비결은 무엇인가요? 우승을 해서 정말 기쁩니다. 이번 승리의 비결은 무엇보다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뛰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저와 최대곤 코치를 비롯한 코치진, 그리고 모든 선수들이 하나로 뭉친 ‘원팀 정신’이 승리로 이어진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년 전 대통령기에서 준우승에 그쳤던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학교와 교육청, 총동문회, 그리고 학부모님들까지 모두가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선수들이 많이 들어왔고, 특히 유격수 엄준원 선수와 국내 최정상급 투수 정우주 선수처럼 좋은 자원들이 팀에 합류하면서 전력이 크게 강화된 점이 전주고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이번 청룡기 결승전에서 감독님의 작전이 화제를 모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사용하셨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결승 상대가 전통의 강호 마산 용마고등학교였고, 경기는 비가 오는 날에 진행되었습니다. 1회부터 4회까지 비가 많이 오게 되면 경기가 취소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 팀 에이스 정우주 선수를 선발 투수로 기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만약 정우주 선수가 공을 45개 이상 던지게 되면 선수 보호 차원에서 다음 날 경기에 등판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익수 포지션에 정우주 선수를 두고, 위기 상황에서만 투수와 우익수의 포지션을 바꾸는 변칙적인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다행히 전략이 먹혀들어 갔습니다. 1회 말 만루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정우주 선수는 삼진을 잡아내며 팀을 구했습니다.경기 도중 중단된 상황이 있었는데, 이후 어떻게 팀을 이끌어 가셨는지요? 3회 말 비로 인해 경기가 약 한 시간 반 정도 중단되었습니다. 경기 재개 후, 이한림 선수가 3점 홈런을 쳤습니다. 이한림 선수는 “당시 팀을 위해 멀리 외야 플라이를 치려는 팀 배팅을 했을 뿐인데 결과가 홈런으로 돌아와 기쁘다”고 했어요. 한림이는 우주와 함께 배터리로 호흡을 맞추며 팀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덕분에 이 경기의 MVP가 되기도 했지요. 이한림 선수는 정우주 선수의 직구가 좋다고 판단했어요. 높은 직구를 사용해 상대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볼 배합을 선택했습니다. 정우주 선수의 최고 구속은 155km를 넘길 정도로 위력적입니다. 이 작전들이 모두 맞아떨어지면서 결국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선수들의 미래 계획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우주 선수는 앞으로 국내 프로 무대에서 1위를 차지한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싶다는 큰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한림 선수 역시 포수로서 프로 무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를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이 두 선수가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남은 선수들도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으니 앞으로도 전주고의 우승 신화를 계속 써내려 갈 예정입니다.우승 후 전주시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번 우승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전주고등학교 야구부와 전주시민들 모두에게 큰 의미를 가진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전주고의 앞으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우승 이후 식당에 가거나 길을 걷다 보면 전주시민들의 뜨거운 응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희 팀을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전주 야구를 응원해 주시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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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부
#감독
#청룡기 우승
전주의 꽃심
“아중리 외가까지 나무꾼이 다니던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지요”
이상교 어르신의 추억 가득한 옛 사진들
하숙생 형들 보며 공부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세 살 되던 해에 완주군 금상면에서 전주시 중노송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때가 해방 직후였는데, 그때부터 서울로 대학 가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중노송동 물왕멀에서 살았어요. 예전 전주역 바로 뒤에 집이 있었습니다. 그 전주역을 둘러싼 철조망 바깥으로 논두렁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썰매를 타러 나온 동네 아이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7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풍경이 생생합니다. 제가 풍남초등학교,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나왔는데요. 집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학교 진학에 어머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님께서 당시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학생들 하숙을 치셨거든요. 특히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어머님께서 절 위해 환경을 만들어 주신 셈이지요. 어머님의 바람대로 하숙생 형들이 밤새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서너 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던 그 시기가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운 추억도 많습니다. 당시 전주공설운동장이 풍남초등학교 근처에 있었어요. 전주시의 행사들은 모두 그곳에서 치렀지요. 국경일 기념식도 하고, 체육대회도 열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대표 선수들이 체육대회에 출전하면 다 함께 응원하러 갔는데요, 열심히 응원하다 보면 절로 애교심이 커졌습니다. 졸업 앨범 사진을 찍을 때도 참 즐거웠어요. 저는 전동성당과 한벽루 등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친구들과 학교를 벗어나 전주 명소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었지요.유년 시절 정서적 고향, 아중리 외가의 추억 제 유년 시절 추억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아중리 외가예요. 당시 중노송동 집에서 3~4km 떨어진 아중리 외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풍남초등학교에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외갓집이 있었어요. 전주공설운동장을 지나 남중학교를 거쳐 걷다 보면 인봉리, 마당재, 가재미 마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재미를 지나면 팥죽배미가 있었는데, 그 마을을 지나면 나오는 은행다리 마을에 바로 외가가 있었습니다. 100호 정도의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시골 마을이었지요. 마을까지 가는 제대로 된 진입로도 없어서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을 따라갔습니다. 1955년 아중저수지 둑을 쌓으면서 비로소 소달구지가 지나갈 정도의 길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라는 동요를 참 좋아하는데요, 저희 외가가 그 동요 속 가사처럼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로 울긋불긋한 꽃 대궐을 이뤘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풍경이 선해요. 마당에는 복사꽃이 피어 있고, 집 뒤로는 살구나무, 대밭, 감나무가 가득했어요. 오뉴월에는 모 심으려고 해놓은 논에서 우렁이를 잡아다 외갓집 화로에 구워 먹고, 한여름에는 평상에 누워 은하수를 보다가 타닥타닥 모깃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기도 하고, 가을에는 메뚜기 잡고 놀고, 그야말로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제 정서적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1961년 6월에 돌아가셨는데, 전주시에 기증한 사진은 당시 상여 나가던 모습을 찍은 거예요. 사진에 논에 모심기한 모습이며, 마을 풍경이며, 아중저수지 모습 등 당시 아중리 풍경들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진에서 그 시절 전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사진으로나마 전주의 근현대사를 보여 주고파 제가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이에요. 근현대사를 몸소 겪은 세대지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고, 6·25 전쟁을 겪고, 전쟁 후 지독한 보릿고개를 넘어 전주가 점점 발전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6·25 때 전주 시내가 폭격으로 환하게 불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6·25 직후 먹을 게 없어서 찔레꽃이며 진달래 뜯어 먹던 시절은 또 어떻고요? 그런 시절을 지나 지금의 발전한 전주를 보면,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때 감히 전주가 지금처럼 발전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 시절의 전주가 생생한 사람으로서 요즘 사람들에게 그때의 전주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꾸준히 전주시에 제가 소장한 전주시 관련 기록물들을 기증해 왔습니다. 집에 두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고, 저만의 기록물로 남겠지만, 시에 기증하면 전주 시민과 함께 나눌 수 있으니까요. 제가 요즘도 가끔 외가가 있던 아중호수를 찾는데요, 농업용수를 대던 저수지가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비록 그 옛날 사진 속 풍경은 사라졌지만, 발전한 모습이 자랑스럽거든요. 그러니 사진으로나마 많은 이들이 보고 전주의 변화를 확인하고, 내 고장 전주를 자랑스러워했으면 해요. 이상교(79) 어르신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와 전주와 전라북도 중·고등학교에서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제8회 전주 기록물공모전에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기증하여 최우수 기록물로 선정됐다.
2021.01.22
#전주공설운동장
#중노소동
#아중리
#기록
“전주 사람의 역사가 곧 전주의 역사이지요”
신동수 어르신 선친의 유언장과 개인 기록물
삶의 좌우명이 된 선친의 유언장제가 무녀독남 독자예요. 그 옛날 독자로 태어났으니,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1971년 남기신 선친의 유언장에도 저에 대한 사랑과 당부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선친께서는 후두암으로 오랜 시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요, 임종 보름 전 유언장을 작성하셨습니다. 유언장에는 다섯 가지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해라, 우리 논을 지켜라, 상급 학교 교사가 되어라, 장례는 가정의례 준칙대로 치러라, 곧 태어날 네 아들 교육에 힘써라”가 그것입니다. 그 유언장을 좌우명 삼아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당시 완주군 간중초등학교에 재직 중이었는데,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노송동에 지금의 전주대학교 전신인 영생대학이 있었어요. 완주에서 근무를 마치고 야간에 영생대학을 다니며 중·고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땄습니다. 사실 제가 근무하느라 선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게 한스럽고 죄송해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거든요. 선친의 유언장이 제가 열심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 제 아들이 세상을 떠났어요. 서울에서 4년, 전주에서 4년 9개월을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수발했는데 하늘도 무심하게 떠나 버렸지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아들에 대한 제 사랑은 모두 선친에게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더군요. 자식을 사랑하는 선친의 마음이 제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10년 가까운 그 힘든 세월을 잘 견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니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쳤습니다. 전주와 함께한 내 청춘의 기록물들 제 고향이 초포리인데, 옛날에는 완주군 하리였어요. 훗날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초포리가 되었지요. 한마디로 전주시 외곽에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전주북중학교까지 왕복 50리 길을 걸어 다녔어요. 새벽에 일어나 별 보고 출발해서 학교에 갔습니다. 당시 전주북중학교가 지금 전주고등학교 자리에 있었거든요. 한 울타리 안에 앞쪽 건물이 북중, 뒤쪽 건물이 전주고였습니다. 그 당시 학교 앞에 전주역이 있었고, 그 역 앞으로 개천이 흘렀어요. 그 옆으로 미나리꽝이 있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제가 선친의 유언장과 함께 제 개인적인 기록물들을 전주시에 기증했는데요. 북중학교 졸업 앨범도 그중 하나입니다. 당시 졸업 사진을 한벽루 앞에서 찍었어요. 제 졸업 앨범 속에 과거의 전주가 살아 있는 셈이지요. 1963년 육군사관학교 입교생 수험표에도 전주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육사가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많이들 선호했습니다. 육사만 나오면 탄탄대로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당시 덕진동에 육군병원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호반촌도 개발되기 전이라 병원 주변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전라북도 육사 지원생들은 모두 그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했어요. 신체검사가 무척 엄했는데, 저는 결국 신체검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때 수험표를 ‘백로지(갱지)’라고 질이 좋지 않은 노란 종이로 만들었거든요. 그 수험표를 보관하고 있다가 전주시에 기증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오래된 종이 한 장일지 몰라도 제게는 참 의미 있는 기록물입니다. 원래도 노란 종이가 세월이 쌓여 더 빛바랜 종이가 되었지만, 제 청춘과 전주의 역사가 담겨 있으니까요. 1964년 호성동사무소에서 발급한 병역신고필증도 그런 의미에서 함께 기증했습니다. 1960년대 전주 시민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개인의 기록물로 전주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파제가 전주시에 기증한 선친의 유언장과 제 졸업 앨범, 수험표, 병역신고필증 등은 모두 전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두 전주가 만들어 준, 가족의 역사가 담긴 기록물인 거예요.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살아오면서 전주에서 남긴 전주가 준 기록물 말입니다. 그러니 전주시에 기증해야 하는 게 맞지요. 전주 사람의 역사이면서 전주의 역사이기도 한 기록물을 전주시에서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제 기록물이 요즘 사람들에게 ‘옛날 전주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걸 보여 주는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 여러모로 참 힘든 상황인데요, 돌이켜 보면 역병은 주기적으로 돌았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인 1950년대에는 ‘뇌염방학’이란 게 있었어요. 흔히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하죠? 당시 뇌염이 창궐할 때 일주일 이상 방학을 했습니다. 그런 시기를 겪은 사람으로서 지금 상황이 참 안타까워요. 제가 2005년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에서 정년퇴직했는데요. 30년 넘는 교직 생활 동안 전라북도 곳곳으로 전근 다니면서도 늘 전주를 생각했습니다. 제 기록물이 전주와 전주 시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일흔여덟 살 할아버지의 삶이 담긴 기록물을 보며 젊은 사람들이 조상들의 생활상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동수(77) 어르신은 전주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영생대학을 졸업하고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제9회 전주 기록물수집공모전에 선친의 유언장과 개인 기록물을 기증하여 최우수 기록물로 선정됐다.
2020.12.24
#역사
#기록물
#졸업장
기획 특집
3·1운동 100주년, 전주 그날의 기억
전주 3·1운동의 숨결이 머문 곳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신흥고신흥고는 기전여학교와 함께 전주 지역 학생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1929년 항일학생운동 등 신흥고 학생들은 항일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7년 신사참배 종용에 거부하면서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다. 현재 신흥고등학교 기념관 내에는 전주 3·1운동의 치열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전주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러한 역사를 기리기 위해 신흥고 앞 버스정류장을 3·1운동 테마정류장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정류장에는 지역 작가들이 만든 3·1운동 상징 조형물과 함께 역사 기록 현판이 전시된다.주소 |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전화 | 063-232-7070 전주 3·1운동의 횃불 밝힌 서문교회서문교회는 1893년에 세워진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자 전주 3·13만세운동을 총지휘한 김인전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교회이다. 또한 1921년 부임한 배은희 목사 역시, 항일민족단체였던 신간회의 전주지부장을 맡아 교육과 농촌부흥운동에 힘썼다. 현재 서문교회 내에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탑이 남아 있다. 직경 1m의 커다란 종이 달려 있는 이 종탑은 1908년에 세워져 1944년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되었으나, 해방 후 다시 제작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주소 |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220 전화 | 063-287-3270 독립운동가 김인전 서문교회 목사1876.10.7. ~ 1923.5.12.일제 강점기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按手)를 받았다. 1914년 전주서문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전주 3·1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한·중 연대 조직인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운동 비용 조달에 주력했다. 1923년 4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으며,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학인당1949년 해방 정국, 백범 김구 선생과 해공 신익희 선생이 전주를 방문해 학인당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임시정부 인사들과 회동했다. 그들이 머물렀던 방은 현재 ‘백범지실’, ‘해공지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임시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귀빈들이 주로 머물렀던 인재 고택 학인당은 일제하에서도 민족 문화 보존에 앞장을 선 상징적인 건물이다. 주소 |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45 전화 | 063-284-9929 꼿꼿한 시인의 기개가 서린 비사벌초사신석정 선생은 친일 시를 한 편도 남기지 않았으며,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시인이다. 노송동에 위치한 비사벌 초사는 시인이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부터 별세한 1974년까지 시인이 직접 가꾸고 살았다. 오직 시를 향한 열정만으로 집을 채웠고 비사벌 초사에서 예순여덟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석정 시인이 떠난 후 이 집을 인수한 부부는 현재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비사벌초사’라는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주소 | 전주시 완산구 관선4길 42-9 전화 | 063-231-3118
2020.10.29
#3·1운동
#신흥고
#서문교회
#학인당
#비사벌초사
“낡은 사진 한 장에서 그 시절 전주를 만납니다”
진상훈 어르신의 추억 가득한 성심여자중학교 사진들
학생들과 행복했던 시절을 기록하다오직 교사의 사명감으로 보낸 37년이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가르치는 일에 대한 열정,학교에 대한 애정이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1980년대 해성중학교에서 근무한 6년을 제외하곤 1973년 성심여자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학교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20대부터 60대까지 제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곳이니 그 애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했던 순간, 학교의 모습 등을 사진으로 남기고,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요. 단순히 머릿속으로 ‘그때 참 즐거웠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사진을 보면 당시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거든요. 사진 한 장이 지닌 힘이 그렇게 큽니다. 당시엔 체육대회를 종합경기장에서 열었는데 학교에서 종합경기장까지 행진을 하며 걸어갔어요. 시민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들고 말이에요. ‘엄마, 아빠 왜 싸워?’라는문구가 담긴 피켓을 든 거리 행진 사진을 보면 아직도 웃음이 납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이 떠올라서 말이죠.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겠지요. 사진을 통해 전주의 옛 모습을 만나다사진의 힘을 느낀 후 본격적으로 여러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앨범은 굳이 꺼내지 않으면 잘 보지 않을 것 같아 액자로 제작해서 집 안 곳곳에 두었습니다. 그렇게 둔 액자들이 서른 개가 넘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하신 은사님들 사진은 물론, 고등학교 친구들 사진, 제자들 사진을 보며 당시를 추억하곤 합니다. 그 사진들에는 그저 인물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한벽루, 오목대, 이목대, 풍남문, 종합경기장, 덕진공원, 전주역 등 전주의 옛 모습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제가 전주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당시 졸업사진을 풍남문 앞에서 찍었어요. 1964년 즈음 찍은 졸업사진을 보며 옛 친구들은 물론 그 당시 풍남문 모습까지 볼 수 있는 거예요. 1973년경 한벽루로 떠난 성심여자중학교 소풍 사진에는 숨겨진 재미가 있어요. 징검다리에 서서 손잡고 있는 아이들 뒤로 빨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당시 한벽루 아래 전주천에는 빨래터가 있었거든요. 1980년대 소년체전이 열린 종합경기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스게임을 하는 학생들과 관중들 모습을 보면 당시 열기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렇게 사진 한 장에는 소중한 사람들은 물론 옛 전주의 모습, 그리고 추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주의 풍광은 많이 변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기억은 항상 변함없이 제 마음에는 그대로입니다. 예술로 말하면, 성악이나 같을까요? 사람의 몸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 저에게 성심여중과 전주는 항상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주는 울림이지요. 사진으로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퇴직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자들과 만나 학교에 있었을 때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당시 학생들이 저를 ‘베토벤 선생님’이라 불렀어요. 음악도 워낙 좋아하고 헤어스타일이 마치 베토벤 같았거든요. 학생들과 만나면 그때 그 시절 베토벤 선생님으로 돌아가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줬고, 여전히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는 학교와 학생들에게 언젠가는 보답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성심사진전’입니다. 그동안 모은 학교 관련 사진들을 전시하는 거죠. 그날을 위해 앞으로도 학교와 관련된 사진들을 차곡차곡 모을 계획입니다. 추억을 함께 나누는 일만큼 행복한 일이또 있을까요? 전주시에 사진을 기증한 이유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 ‘성심사진전’에서 많은 분들과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진상훈(72) 어르신은 37년간 전주성심여자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학생들과 학교에 대한 애정으로 모은 사진들로 사진전을 열고 싶은 꿈이 있다.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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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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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개인의 일기도 시대를 읽는 생생한 기록물입니다”
박병익 씨가 소개하는 50여 년의 추억이 담긴 일기
일기를 쓰며 세상을 읽고 배우다 제 기억에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5학년 때만 해도 학교에서 쓰라고 하니까 반강제적으로 썼고, 6학년 때부터는 자발적으로 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는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 전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졌습니다. 일기에는 단순한 일과만이 아니라 그날그날 인상적인 일들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소소한 일상과 크고 작은 사회․문화․정치적인 이슈들까지 모두 아울렀던 것이지요. 이렇게 폭넓은 이야기를 썼던 것은 신문 배달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4~5년간 배달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읽고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감상까지 적은 거예요. 저는 일기를 쓰면서 세상을 읽고 배운 셈이죠. 다양한 이슈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1972년 열린 제5회 킹스컵, 1973년 뮌헨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은 경기 모습을 그림까지 그려 가며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스포츠 캐스터의 꿈도 꿨어요. 형편이 어려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서 결국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요. 일기를 통해 시간여행을 떠나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원에서 전주로 이사를 왔어요. 형님이 당시 전주에서 최고 명문 학교로 꼽히던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남원을 떠나 전주에 온 겁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은 형님이 판검사가 될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 인근 농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하지만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 형편은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집안 살림을 맡으시고, 어머님이 밖에 나가 돈을 버셨어요. 새벽 5시에 군산에 가서 사 온 갈치를 시청, 병무청 등을 돌아다니면서 파셨습니다. 어머님이 군산에서 도착하실 시간에 맞춰 리어카를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 갖다 놓는 일은 제 몫이었어요. 그런데 커 가면서 그 일이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동네 여학생들을 피해 생선을 실은 리어카를 끌다 전봇대에 부딪힌 일이 일기에 남아 있거든요. 전주고등학교를 다닌 이종사촌 형에게 도시락을 전해 주러 가는 길에 깡패를 만나 10원과 목걸이를 빼앗긴 일도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일기를 볼 때면 뭉클한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추억 어린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거죠. 나의 일상이 모두의 역사가 된다 사실 개인적인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를 기증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철없던 시절의 내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 시대를 담은 자료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습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텔레비전 있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만화방에 1원에서 1원 50전의 입장료를 내면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로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곤 했지요. 그런데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박치기 왕'프로레슬러 김일 선수 경기가 종합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김일 박치기, 천기덕 당수' 하면 온 국민이 열광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김일 선수가 전주에 왔으니 온 전주가 들썩였지요. 당시 프로레슬링 경기 입장권이 2원이었는데 할인권을 가져가면 얼마를 할인해 줬어요. 아직도 그 할인권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이트 장소로 유명했던 전주 시내 탁구장 이야기, '빈대극장'이라 불린 동시 상영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본 일들도 모두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박병익이라는 개인의 일기를 통해 1970년대 전주 사람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이번 기록물 공모전을 통해 내가 쓴 매일의 기록이 내일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 줄이라도 좋으니 일기 쓰기를 권합니다. 나의 일상이 모두의 역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박병익(60) 씨는 2018년 제5회 전주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50여 년 전의 일기장 등을 기증, 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제라이온스협회 전북지구 제1부총재로 활동하며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0.09.09
#전주의꽃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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