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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
전주천
계절을 따라 기억을 안고 흐른다
기억은 계절의 물결을 타고그런 날이 있었다. 푸르른 봄, 자전거를 타고 그녀를 바래다주던 날, 허기진 불면의 눈으로 여름밤 가로등을 벗 삼아 걷던 날, 뉘엿뉘엿 저무는 가을 노을빛에 물든 낙엽의 마음을 알 것만 같던 날, 한없이 깊은 겨울의 새벽, 하얀 눈 위에 첫발자국을 남기던 날. 이 모든 순간, 나는 전주천에 있었다. 전주천은 마치 전주 시내를 관통하듯 나의 기억을 관통하며 흐른다. 그러곤 매 순간의 기억만큼 다른 얼굴로 계절마다 나에게 돌아온다. 잔인하리만치 장소와 기억은 한패다. 이제는 사계절도 모자라 계절 사이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계절의 모습을 간직한 전주천은 오늘 나에게 또 하나의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흐르는 존재우리는 종종 삶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내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곤 한다. 나에겐 함께 음악의 길을 걷는 박경재가 바로 그런 존재다. 우리는 2012년 처음 만나, 함께한 지 어느덧 7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시간만큼이나 전주천에서의 추억 또한 많다. 2013년 첫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던 한벽루와 2015년 앨범 재킷을 위해 은밀히 찾아간 미산교, 그리고 2017년 의 배경 영상을 위해 머물던 새벽의 눈 덮인 청연루까지, 어쩌면 모던포크듀오 ‘이상한계절’의 굵직한 사건마다 전주천은 우리의 배경이 되어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천은 나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기억의 장소다. 한겨울 추위가 녹을 즈음이면 고개를 늘어뜨린 능수버들이 수수한 멋으로 봄을 알리고, 여름엔 풀벌레 소리가 천변 벤치로 나를 이끈다. 가을이면 황금빛 물 억새가 물결치고, 겨울엔 추위를 감내하듯 고요히 흐른다.이렇듯 전주천이 우리에게 친숙할 수 있는 건 가깝고 깨끗한 도심생태하천이기 때문이다. 전주천은 2000년 자연형 하천조성사업을 시작하며 1급수 지표 종인 수달과 쉬리, 흰목물떼새 들이 살 만큼 깨끗한 하천을 되찾았다. 과연 버들치와 왜가리를 손쉽게 만날 수 있었고, 갓 피어난 금계국과 쥐똥나무, 노랑꽃창포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여러 생명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이곳에서 우리는 화답하듯 징검다리에 앉아 발을 담갔다. 모든 강은 바다를 향해 흐른다지만, 전주천만은 그렇게 우리에게로 흐르고 있었고, ‘소살소살 흐르는 전주천’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곳나에게 전주천은 음악적 산파다. 나의 노래 의 도입부 ‘별이 빛나는 밤에는…’과 중 ‘호반촌에서 하가지구 끝까지’의 배경도 전주천이고, 의 ‘하얗게 살고 싶은’ 지향점 역시 전주천이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여전히 그 노래를 들을 때면, 여름밤 벤치가 그립고 무수히 페달을 밟던 자전거도로와 눈 덮인 남천교가 생각난다. 바로 이런 기억들이 싱어송라이터로서 나의 삶과 음악의 원천이 되고 있다.내가 사는 이곳에서 더 아름다운 음악을 하겠다는 꿈도 결국엔 전주천과 같은 우리의 자연이 선사한 것이리라. 그런 까닭에 전주천은 늘 과묵하지만, 내 마음을 이해하는 속 깊은 친구이자 우리 삶의 스승 같다. 우리가 저마다의 이유로 흔들리며 힘을 잃고 부유할 때에도 쉼 없이 흐르는 굴곡진 전주천의 모습은 마치 곡절 가득한 인생사를 닮아 더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다. 전주천이 일깨우는 삶의 의미한 개인의 기억을 오롯이 담아낸 넉넉함처럼 전주천에 시민들의 수많은 기억과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야기들 속에 다양한 생명들을 품고 흐르는 전주천의 모습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동시에 온 지류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살고 낮은 곳을 향해 살라는 진정한 삶의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며, 꾸준히 하루하루를 멋지게 만들어 내라고 말이다.나의 동반자 경재와 함께 걸은 전주천은 새삼스럽게도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해준 멋진 하루였다. 조화로운 동물과 식물들을 한데 아우르며 흐르는 전주천은 왜 이곳이 수많은 전주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그냥 무작정 걷다가 서서히 마음이 평온해지고, 문득 무엇이든 깨끗하게 하는 전주천을 닮고 싶다고 느낀다면, 당신도 어느새 전주천과 함께 흐르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글 김은총 | 싱어송라이터김은총 씨는 모던포크듀오 ‘이상한계절’의 싱어송라이터다. 전주에서 음악을 시작했고, 음악 속에 전주에 대한 애정을 맘껏 담고 있다.
2020.09.22
#이상한계절
#전주천
#수달
#한옥마을옆
기획 특집
천년의 이야기를 품은 숲, 같이 걸을까요?
전주 마실길
천년의 시간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을 출발해 좁은목약수터 방향으로 걷다 보면 처음 마주하게 되는 길이 억경대에서 만경대 구간이다. 해발 630m 고덕산 초입에서 숲을 오르다 보면 낯선 풍경과 조우하게 된다. 여름의 숲, 우거진 녹음에 감춰진 흙빛 돌 산성이 이질적이면서도 정겹다. 숲길을 벗어나 남고산성을 걷는다. 돌을 이고 지고,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간절한 무게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붙잡는다.남고산성은 가팔랐으나 단아했고 산세와 어우러져 고즈넉했다. 남고산성은 삼국 통일 이후 남북국시대에 지어진 석축 산성으로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도읍이던 전주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견훤이 쌓았다 한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 부윤을 지낸 이정란이 왜군 방어를 위해 보수한 산성이다. 지키고자 하는 생의 간절함을 품은 숲, 천년전주 마실길이 숨겨 놓은 이야기가 장엄하다.천년전주 마실길은 남고산성을 지나 억경대와 만경대로 발걸음을 이끈다. 억경대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가빴던 숨을 돌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전주 풍경에 가슴이 벅차다. 고층 빌딩에서 바라본 전주와는 천양지차. 그 풍경에 넋을 잃을 무렵, 문득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바람을 머리에 인 숲이 무겁게 일렁인다. 천길 바위 머리 돌길을 돌고 돌아,나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누른 잎이 어지러이 백제성에 쌓였도다구월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백년기상 호탕함이 서생을 그르쳤네하늘가 해는 지고 뜬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하염없이 고개 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 만경대를 지나 충경사를 향하면서 만경대 암각서에 새겨진 시구를 읊조린다. 새로운 나라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 포은 정몽주와 태조 이성계 그들에게 길은 우국과 충정이었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였다. 어디 그뿐일까? 관직에서 물러난 64세의 노부인 이정란이 다시 칼을 잡고 적진으로 뛰어든 길 역시 우국과 충정이었고 백성에 대한 애민이었다. 남고산성 숲에는 우국과 충정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천년전주 마실길, 그 숲 곳곳에 역사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싸전다리를 지나 초록바위에서 완산칠봉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마실길이라는 이름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마실길’이란 이웃에 놀러 가는 길을 뜻한다. 사부작사부작 걷는 걸음마다 삼나무 잎사귀나 편백나무 향이 밟힌다. 여름에는 매미 소리와 청량한 숲 내음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겨울에는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로 가득하다. 완산칠봉 오르는 길은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자연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뿐일까? 장군봉 팔각정을 만나고 금송아지 바위의 전설을 듣고, 크고 작은 돌탑과 가람시비를 만난다.천년전주 마실길을 두른 숲은 천년의 삶과 문화와 역사를 안고 있다. 그 숲속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고목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 같다.천년전주 마실길국립무형유산원-억경대-만경대-남고산성-충경사-매화봉-장군봉-완산공원-금송아지바위-용두봉-용머리고개-다가공원-완산교-매곡교-초록바위-남천교-국립무형유산원 기억을 재생하는 숲, 모악산 마실길과 삼천마실길전주 모악산 마실길은 모악산이 품은 길이다. 길은 마을에서 시작해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바람과 나무와 숲을 잇는다. 추동마을 입구에서 시작해서 고개 너머 독배마을까지 이어지는 12.3km의 구간 동안 위뜸에 살았다는 강릉 함씨와 비선골에 살았다는 김해 김씨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굿을 해 주는 무녀 쟁인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험한 산이 아닌 고즈넉한 평야의 숲길이 마을과 마을이 지닌 이야기를 품고, 뒤 숲이 지닌 이야기와 앞 숲이 품은 이야기로 마을 지도를 만든다. 천년전주 마실길의 숲이 삶과 역사를 품은 숲이라면 모악산 마실길의 숲은 옛 풍경과 잊힌 기억을 재생하는 숲이다.가래나뭇골(추동마을)을 지나고 원당마을을 지나 시앙골을 넘고 학이 날아든다는 학전마을을 지나 만나게 되는 노송 군락지는 곧게 뻗은 노송들이 푸른 하늘을 이고 우뚝 서 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숲이 아니라 하늘 향해 곧게 뻗은 노송들이 장엄한 분위기를 내뿜는 숲이다. 마치 마을과 마을을 지키고 사람과 사람을 지키는 장승처럼 우람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삼천 마실길은 마을과 역사를 잇는 길이다. 옛 전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 길이라고 할 수 있다.탐진 안씨의 집성촌인 능안마을에서는 탐진 안씨들이 대대로 마을을 지켜 온 흔적을 엿볼 수 있고, 능안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찾을 수 있다. 소란소란 걷다 만나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전주역사박물관에도 한번 들러 보자. 탐진 안씨가 지킨 마을 이야기와 더불어 전주의 옛이야기에 빠져보는 즐거운 기회가 될 것이다. 모악산 마실길추동마을-원당마을-학전마을-완산생활체육공원-노송 군락지-신금마을-화정마을-봉암마을-독배마을-독배고갯마루
20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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