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궁원, 전주
조선의 얼굴을 품은 정원,
전주 경기전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s://daum.jeonju.go.kr/_data/sys_webzine_list/1782277232_SzrKxMd4GMwddluEMFj75FBsnTyrS9a_qc9-RE6aH6a3b6470.jp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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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tc_txt01">전주에 세워진 왕의 그림, 경기전과 태조 어진</p>
<p>1410년(태종 10년), 조정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할 전국 주요 거점으로 개경, 경주 등과 함께 전주를 선택했다. 수많은 도시 중 전주가 선택된 이유는 명확하다. 전주는 태조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의 뿌리가 시작된 신성한 고향이었던 셈이다.<br>
어진이 봉안된 건물에는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442년(세종 24년) ‘경사스러운 기틀이 되는 전각’이라는 뜻의 ‘경기전(慶基殿)’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br>
홍살문을 거쳐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태조 어진이 모셔진 정전이 나타난다. 이 정전 처마 밑을 자세히 보면 거북이 한 쌍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나무 건물의 화재를 막아 달라는 염원을 담은 주술적 장치다. 이처럼 경기전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며 전주를 조선의 고향으로 각인시키는 중심 역할을 해 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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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tc_txt01">전쟁의 불길을 피한 유일한 얼굴, 기적의 에피소드</p>
<p>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태조 이성계의 전신상 어진이다. 다른 지역의 어진들이 전쟁의 불길 속에 모두 불타 없어졌을 때, 전주의 태조 어진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 희생 덕분이었다.<br>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주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뜻있는 자들이 모여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급히 빼내었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의 선비 손홍록·안의, 그리고 이들을 호위한 무사 김홍무와 왕의 영정 궤짝을 직접 등에 업고 험로를 오른 하급 관리(수복) 한춘 등은 정읍 내장산의 험준한 용굴암으로 숨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밤낮으로 이를 지켜 냈다. 이후 경기전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어진은 무사히 남아 1614년 중건과 함께 돌아왔다. 지금의 어진은 1872년(고종 9년)에 새로 모사한 작품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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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tc_txt01">축제로 부활한 왕의 행렬과 전주의 브랜딩</p>
<p>오늘날 경기전과 태조 어진은 단순히 구경만 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 공간이다. 매년 전주에서는 태조의 어진을 한양에서 전주로 모셔오는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한 대규모 퍼레이드 ‘태조어진 봉안의례(어진행렬)’가 펼쳐진다. 수백 명의 시민이 전통 관복을 입고 웅장한 취타대의 연주에 맞춰 함께 행진하는 모습은 도심 한복판을 순식간에 조선 시대로 되돌려 놓는다.<br>
또한 경기전은 젊은 세대와 관광객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나무 숲길에서 인생 사진을 남기거나 야간 국악 공연을 즐기는 트렌디한 문화 놀이터가 되었다.<br>
이러한 시도들은 전주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한국적인 전통의 멋과 품격을 간직한 문화 수도’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확립해 주었다. 과거 왕실의 뿌리였던 소중한 유산이 이제는 현대의 전주를 세계에 알리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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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 ‘전주사고’에 언급된 내용 중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 낸 안의, 손홍록은 ‘정읍’ 출신으로, 오희길은 ‘고창’ 출신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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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