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궁원, 전주
후백제 왕도
왕의 수도, 전주를 다시 묻다
<p class="center"><img src="https://daum.jeonju.go.kr/_data/sys_webzine_list/1771977806_3isCpI_wCa6Pd4oOVJIWqE9XuoiD1Hmh4AqxdI3Ec699e3c4e.jp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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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tc_txt01">왕궁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도시</p>
<p>후백제의 왕 견훤은 왜 전주를 왕도로 삼았을까. 이는 전주라는 지역이 지닌 조건과 가능성을 되묻는 질문으로도 치환된다. 전주라는 선택지는 우연이 아니다. 삼국 시대부터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 기능해 온 전주는 이미 사람이 모이고 도시의 질서가 형성된 공간이었다. <br>
완산 일대를 감싸는 지형은 방어에 유리했고, 만경강·동진강으로 이어지는 수운은 사람과 물자를 끌어들이는 통로였다. 호남 곡창지대를 배후에 둔 경제적 기반은 국가 성장과 번영에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전주가 단순한 지역 거점 이상으로, 정치적·경제적 기능을 갖춘 국가의 중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도시였음을 말해 준다.<br>
후백제 왕궁은 왕의 거처일 뿐 아니라, 정치·행정·외교의 중심으로 새 국가의 탄생을 선언하는 상징적 공간이어야 했다. 전주는 그에 상응하는 기틀을 이미 갖춘 도시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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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tc_txt01">왕도의 자취를 찾기 위한 노력</p>
<p>후백제의 왕궁터와 도성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물왕멀 일대가 후백제의 왕궁터로 거론되었다. 이후에는 동고산성이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받았다. 1980~1990년대 발굴을 거치며 동고산성은 한때 ‘전주성’, ‘왕성’으로 불리기도 했다.<br>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선은 다시 옮겨 갔다. 전라감영 일대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에서 후백제로 이어지는 도시의 연속성 속에 왕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논의는 노송동 구릉대, 중노송동과 인봉리 일대로 확장되었고, 최근에는 중노송동 종광대 토성에 무게를 두고 도성 위치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br>
종광대 주택재개발사업 중 발견된 200m 길이 토성의 축조 기법과 다량의 기와 유물이 후백제의 것으로 확인된 후, 국가유산청은 현지 보존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후백제 관련 유적이 전국적으로 매우 드문 데다, 도심 속에서 발견된 성벽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종광대 토성은 후백제 도성 연구의 결정적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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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atc_txt01">과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다</p>
<p>완산 일대를 감싸는 지형과 공간의 중심성, 오래된 길과 생활권의 구조 안에는 한때 수도였던 전주의 기억이 겹겹이 스며 있다. 전주시는 이 기억을 다시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후백제의 도성에서 출발해 고려와 조선, 근대와 현대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전주의 역사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시민들은 전주가 어떤 과거 위에 서 있는지, 또 어떤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상상하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p>
2026.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