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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밖 전북

전주에서 군산까지

사라지는 것들 너머 사라짐에 귀 기울이다

2020.10
세상은 언젠가부터 빈티지 열풍이다. 페인트를 새로 칠한 물건들도 일부러 사포질해서 낡아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을 제아무리 박물관처럼 모아둔다 해도 그 소란 속에 묻혀 지나치기 쉬운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사라짐’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관심은 어쩌면 여행과 닮은 듯도 하다. 생활이 팍팍할수록 여행에 대한 바람이 큰 것처럼, 현재의 삶이 힘들고 미래가 암울할 때 현재의 바깥인 낡은 것들 속에 잠시나마 우리의 피로를 기대게 된다. 하지만 여행은 내 생활 세계의 바깥만은 아니다. 생활을 떠나 여행을 하지만, 여행 속에서 현지인들의 삶을 마주하다 보면 두고 온 나의 생활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지는 것들을 마주할 때도 우리는 그것들 너머 들려오는 ‘사라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닐까. 사라짐은 과거의 것이 아니고 우리 곁에 늘 흐르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시간, 전주와 군산 지역에 있는 근대문화의 흔적들을 찾아 떠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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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재라는 두 겹의 군산 시간여행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군산의 근대상을 잘 보여 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가족이 처음 군산에 발을 내딛게 되는 째보선창은 군산에서도 가장 분주하고 생기 넘치는 지역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지러진 건물들만이 탁한 서해를 마주하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바다만 아니라면 강원도 어느 폐광 마을을 떠올렸을 것이다. 기계 부품과 공구를 파는 가게들 그리고 몇몇 식당만이 지난 시절을 간신히 이어주고 있다. 째보선창은 금강의 지류가 바다로 트이면서 Y 자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 지역 상권을 쥐고 있던 객주가 째보(언청이)였다는 말도 있지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일제가 그 지역에 부두와 어시장을 조성하고 배들이 정박하기 좋게 뜬다리 부두를 설치했다. 부둣가에 일렬로 서서 세월을 견디고 있는 건물들 뒤로는 바다와 나란히 놓인 철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금세 군산내항이다. 그 일대는 장미동(藏米洞)인데, 장미꽃 같다 해서 장미동은 아니고, 일본으로 실어 갈 쌀들을 가득 쌓아 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 조선은행 건물이다. 1923년 건립 당시에는 군산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이다. 높은 층고로 과시적인 위용을 드러내는 이 건물은 근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대금과 농지 수탈을 위한 대출이 주요 업무였다. 1981년부터는 개인 소유가 되어 예식장으로 사용되다가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거쳐 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로 곁에 자리 잡은 붉은 건물은 옛 군산세관이다. 대한제국 때인 1908년, 벨기에산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마감된 우아한 건물이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장미꽃 담장이 어울릴 만한 이 붉은 건물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관세행정 및 경제수탈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참 수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세관 창고와 근처 여기저기 20만 가마 이상의 쌀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한다.
장미동 너머 신흥동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고급스러운 적산가옥들이 모여 있고, 근처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가 있다. 팔작지붕 홑처마 지붕이 급경사를 이루는 대웅전과 복도로 연결된 요사채는 모든 재료를 일본에서 공수해 에도시대 건축양식에 따라 지었는데, 대들보는 백두산 금강송을 사용했다. 절 뒤편에는 창건 때부터 조성된 대숲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산 맹종죽이라 더욱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그곳에서 다시 월명산과 신흥동 일대를 천천히 걷다 보면 군산이란 곳은 어쩌면 지난 시간을 꽉 움켜쥐고 있다가 천천히 풀어내는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밀려오는 근대의 분위기 속에서 여정은 다시 전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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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 전주 안에 있는 또 다른 전주
전주에는 군산의 수탈상과는 또 다른 모습의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전주 웨딩의거리와 차이나타운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 ‘박다옥’이라는 우동집과 중국인 포목상점 건물이 있고, 서문교회의 한옥 종각이 남아 있다. 다들 지척이라 여유 있게 산책할 수 있다.
‘박다옥’은 일본인 상업지역에 들어선 우동집으로, 전주에 처음 생긴 대형 일식집이었다. 중앙 현관 맨 윗부분은 페디먼트(pediment, 고전 건축에서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이 있는 현관)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대 그리스 건축물에 많이 사용되던 삼각형 장식이 이채롭다. 중국인 포목상점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전주 전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들이 지었다고 한다. 출입구 상부에 삼각형 박공을 두었는데, 상하이의 전통적인 비단 상점을 따라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물 한쪽에 옛날식 이발소가 들어서 있다.
서문교회에서 다가교를 건너 왼쪽 언덕길로 접어들면 구 예수병원 건물(현 엠마오사랑병원)이 있고, 그 위로 가면 선교묘역과 선교사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곳을 만날 수 있다. 1892년 일곱 명의 젊은 선교 지망생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왔다. 호남 선교의 거점인 전주 중화산동 일대에는 그 흔적들이 많다. 담쟁이덩굴로 가득 덮인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인 구 예수병원은 1912년에 지었다가 화재로 소실되고 1936년에 새로 지어졌다.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에 이은 국내 두 번째의 근대적 병원이다. 원래 이름은 건축 비용을 댄 미국 교인 이름을 따서 매코완 기념병원으로 불렸으나 사람들은 야소 병원으로 더 많이 불렀다고 한다. 한자로는 예수를 야소(耶蔬)라고 적는데 사람들이 쉽게 부르던 그 이름이 공식 명칭이 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금 더 언덕을 오르면 선교묘역과 선교사촌이 나온다.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물탱크 창고와 숙소로 쓰던 몇몇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또 몇은 개축되어 있다. 먼 이국의 땅에서 깊은 신앙심으로 한국인에게 의료봉사를 하며 삶을 마감했던 이들의 생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주에서 이국적인 느낌이 그 어디보다 물씬 풍기는 동네다. 전주 안에 있는 또 다른 전주라 할 만하다. 이 길을 걷다 보면 과거와 오늘의 경계가 흩어지며, 시간은 담쟁이 잎들처럼 물들고 떨어지고 한다. 인생이 무상하다고 흔히들 되뇌지만, 무상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항상이지 않다는 말이니, 사라짐은 이미 우리 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삶의 내용일지 모르겠다. 가을이 깊어지면 호젓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구 예수병원을 가득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면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지구의 자전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사라짐의 소리’가 있다면 이곳 어딘가에서 들려올 듯도 하다.


글 유성용│여행생활자 
전주에서 태어나 세계를 떠돌다가, 최근 동고사 아래 작은 헌 집을 고쳐 살고 있다. EBS 세계 테마기행, KBS 영상 앨범 <산> 등에서 캄차카, 부탄, 칸첸중가, 멕시코, 중앙 안데스 등 세계의 오지들을 소개했다. 저서로는 <여행생활자>, <생활여행자>, <다방기행문> 등이 있다.